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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68화 (68/160)

▣ 68화

‘뭐지?’

나는 궁금했다.

이미 이 일본 헌터가 사도가 아니라고 확정한 이상 홀로그램 책이 나타나 펼쳐진다는 것은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의 종류는 셋밖에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남자가 몬스터일 리는 없으니까.

바로 ‘영웅 도감’이었다.

‘들어가.’

정체를 확인했으니 책을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뭐, 일일이 기억할 것도 아니고.

다만 이자에게 빙의한 영웅의 이름이 ‘샤로티’라는 것만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남았다.

S급인 것은 확실하지만, S급 중에서 가장 낮은 레벨에 속했다.

지구인에게 빙의하여 헌터가 된 영웅들의 전반적인 사정은 사도나 악마와 싸우다가 져서 그 원한이 발동한 것이므로, 대충 그렇게 이해하고 자세한 사연은 알 필요가 없었다.

‘흥미롭네.’

미미는 대체 어디까지 감각이 발달한 걸까?

그녀는 이미 내게 접근하려는 외국인이 사도가 아니라 그 반대일지 모른다고 했었는데, 그게 사실로 밝혀졌다.

나처럼 책이 펼쳐져서 정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이런 면에 있어서는 람바스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아니, 본격적으로 감각을 벼리면 람바스는 즉각 즉각 피아를 식별해 낼 테지만-내가 남자를 만나고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게 된 것도 그런 날카로운 감각에 기인했다.-당연히 귀찮아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사도들, 악마와 싸우기 전에는 적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그냥 죽여버리면 되었으니까.

일일이 전력을 파악하고, 불필요한 문답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응? 너 적? 죽어랏!

이거면 끝이었다.

“아……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남자가 미미가 갖다 준 차를 홀짝이면서 내게 물었다.

여전히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기색인 데다 이마에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의 S급 헌터들을 만났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태도이다.

일본의 S급 헌터들이 다 이 남자처럼 겸손한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이것은 이 남자의 본성 때문일 터였다.

아니, 차라리 나처럼 빙의한 영웅의 성품이 스며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아마 그편이 맞을 것이다.

샤로티는 겸손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본론만 말하시죠.”

나는 썩은 눈과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쓸데없는 목적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온 타국의 헌터에게까지 ‘표정 변화’ 스킬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게 사도든 영웅이든 상관없었다.

“음, 그렇군요.”

남자는 이미 각오를 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가 한국에 들어온 지 이미 상당히 되었다는 사실을 미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내 뒷조사를 하는 것이었을 터다.

처음부터 목적이 나를 영입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일본에서 한 생각은 손에 잡힐 듯이 훤했다.

기존 두 명의 S급 헌터들이 사라지고, 존재 유무가 불확실한 새 S급 헌터는 행보가 불명확하다.

아마 나를 영입한다면 단숨에 대한민국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헌터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있는 일본은 대한민국보다 힘의 우위에 있었지만, 만약 대한민국에 단 한 명의 S급 헌터만 남는다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가장 단적인 예로 S급 몬스터가 출현하여 이희진 혼자 막아내는 것이 역부족이라면 일본에서 헌터를 불러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중국도 있기는 하지만, 그쪽은 정치적 대립관계가 일본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중국은 미국 다음가는 헌터 강국이었으므로 만약 중국에 기대게 되면 완전히 그 나라에 지배될지 모른다는 모종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차라리 일본이 낫다.

둘 다 싫지만 어쩔 수 없다면 일본으로 S급 헌터 파견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S급 헌터 숫자에 여유가 있는 일본은 S급 헌터 한국 상주와 같은 조건을 걸어 대한민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다 내 추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강대국들이 하고 있는 일이었다.

매뉴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국민들이 제4의 헌터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으로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새로 각성한 헌터를 영입하는 것을.

일본이 굳이 S급 헌터를 파견한 것과 파견된 이 S급 헌터가 이처럼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에 대해 조사했으니, 내가 상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어쩌면 귀찮은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아니, 내 얼굴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그러니 얼른 본론을 말해라.

듣자마자 싫다고 하고 쫓아낼 거니까.

나도 대한민국 사람이니만큼 일본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이 있다.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면 거기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면 대한민국 전체 국민에게 평생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국민들에게 미움받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만 나는 돈이든 권력이든 뭐든 관심이 없었다.

귀찮게 일본까지 가고 싶지 않다.

내 베이스캠프가 한국인 만큼 국적을 옮기면서까지 정치적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김말중이나 그에 부화뇌동한 언론이 하는 짓을 보면 그것도 꼭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조철웅 씨!”

단호한 얼굴로 목청을 높인 남자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 정부는 귀하를 일본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당연히 아무 조건 없이 오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조철웅 씨를 위해…….”

“싫어요.”

“네?”

“싫다고요. 용건 다 말하셨으면 가세요.”

“일단 조건이라도 들어보시는 게…… 아마 제 얘기를 들으시면 조철웅 씨도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돈도 필요 없고, 지위도 필요 없어요.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세요.”

어흥!

나는 먹잇감을 노려보는 호랑이처럼 마나를 팍! 쏘아냈다.

같은 S급 헌터이지만 나는 이자와 내 격차가 까마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A급 이하의 등급은 어느 정도 경계가 확실하다.

하지만 S급은 그렇지 않았다.

천장이 뻥 뚫려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강함의 고하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S급이라는 등급은 단순히 S급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S급 헌터 사이에도 명확한 힘의 우열이 있었다.

“으윽!”

마치 무협 영화에서 내력으로 쏜 장풍이라도 맞은 듯 바닥에 엎드렸던 남자의 자세가 무너졌다.

벌렁 뒤로 자빠져서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이제는 절대로 내게 덤비지 못할 것이다.

“가세요. 네?”

“아…….”

남자의 얼굴에 심한 갈등의 흔적이 보였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내 앞에서 말로 꺼내지 못했다.

“주군.”

응?

나는 미미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외국인이어도 이 남자는 한국어를 마치 자기 나라말처럼 잘하던데.

아마 그게 내 영입 건을 담당하여 한국으로 건너온 주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야박하게 그러실 것 없어요. 이분은 앞으로 저희를 도와줄 분이니까요.”

뭐야, 무슨 뜻이야?

항상 말과 행동에 수수께끼 같은 면을 보이는 미미이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너만 품고 있지 말고 나에게도 네 계획이라는 것을 공유해 주렴.

“맞습니다! 저는 조철웅 씨가 일본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지고 돕겠습니다!”

미미가 한 말이 동아줄처럼 여겨졌는지 남자가 급히 말했다.

“이름이 다나카 씨 맞죠?”

“네, 맞습니다! 성함이 조미미 씨 맞으시죠? 조철웅 씨의 일을 돕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저희는 조미미 씨께도 귀화 권유를 할 생각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지고 함께 모셔갈 테니 저를 믿어주십시오!”

미미까지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다니.

역시 준비가 철저하구나.

그녀와 내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아는 거겠지.

제법이군, 다나카.

물론 일본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틀렸어요, 다나카 씨. 저희는 일본에 가지 않을 겁니다.”

“네?”

“오히려 다나카 씨가 한국인이 되어 저희를 돕게 될 거예요.”

“네에?”

“뭐?”

나조차도 깜짝 놀라 미미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영웅’이라도 그렇지.

나를 영입하러 온 일본인이 되레 한국인이 되려고 하겠어?

그러면 반대로 일본 정부와 국민의 대대적인 미움을 받고 말 텐데?

“잘 생각해 보세요, 다나카 씨. 다나카 씨는 지금 착각하고 계세요. 진짜 그놈들에게 돌아갈 건가요? 사도들이 당신한테 한 일을 돌이켜보세요.”

미미 쪽에서 마나가 피어올랐다.

나는 이것이 어떤 종류의 스킬인지 알고 있었다.

헌터에게 빙의한 사도를 뽑아내어 장악하는 기술!

하지만 다나카는 사도가 빙의한 게 아닌데?

그리고 그는 S급 헌터인데 미미가 마음대로 스킬을 걸 수 있는 걸까?

미미의 눈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그녀의 온몸에서 본격적으로 강력한 마나가 흘러나오면서, 입에서는 외계어가 쏟아졌다.

물론 나는 그 외계어를 해석할 수 있었다.

대충 내용은, ‘영웅이여, 당신의 사명을 깨달아 당신의 원수를 자각하십시오.’ 같은 것이었다.

이 의식의 목적은 분명했다.

다나카에게 빙의한 영웅을 깨워 동료라고 의식하고 있던 일본의 헌터들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이거라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나카에게 빙의한 샤로티가 자신의 기억을 일깨우고 사명을 자각한다면, 적들이 우글대는, 그리고 자신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게 될까?’

미미의 의식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녀가 엄청나게 많은 마나를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왈! 왈!”

파프리카가 달려와 미미를 향해 짖었다.

녀석은 나에게만 충성하는 게 아닌 것이다.

미미가 동료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녀가 심각할 만큼 마나를 소모하며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보고 걱정되어 짖었다.

“아아…….”

나조차도 미미의 행동을 말리고 싶어졌을 때, 드디어 다나카 쪽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그의 몸 위로 둥실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치 육체를 이탈한 영혼처럼,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근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뭐라고 할까?

피부색은 보랏빛이고, 복장은 마치 SF 영화에서 본 외계인 의상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딱 봐도 지구인의 생김새와 지구인의 의복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인간형의 얼굴이지만 대머리인 데다가 묘하게 얼굴 이목구비의 생김새가 달랐다.

양손을 들더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은 각각 네 개씩이었다.

샤로티의 피부 곳곳에 새겨진 문신들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그가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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