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아…….’
나는 이희진이 한 말에서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받고 있던 동질감.
그녀가 나처럼 관종이 아닐 뿐 아니라 귀찮은 것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희진은 짜증스럽다는 듯, 하지만 이제까지보다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말을 했다.
“네가 뒤처리를 안 하고 가는 바람에 내가 전부 덤터기를 썼잖아!”
하기야 헤타리로스를 사냥하고 내가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S급 몬스터를 사냥한 게 이희진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출현한 S급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했다는 사실이 전 국민을 놀라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실제 능력이 어떠한지를 떠나 다른 두 명의 대한민국 S급 헌터들 보다 실력이 한 수 뒤진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가뜩이나 대한민국에 S급 헌터가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이번 일은 대단히 큰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태도나 대화한 내용으로 미루어 이희진은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보상을 마음 편히 받는 스타일이 아닌 듯했다.
그것이 찜찜한 기분을 만들어 두 배는 더 귀찮았으리라.
나도 그녀와 비슷한 성격이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뭐, 만약 나였다면 기자회견장에 나타나는 것 같은 귀찮은 일을 하지 않고 그냥 뭉개고 넘어갔겠지만.
일부러 찾아와서 자기가 받았던 돈을 내놓은 것을 보면 어쨌거나 이희진은 상당히 양심적인 성격인 듯했다.
이쯤 되자 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어.”
상대가 계속 나에게 반말을 하는 이상 나도 존대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대로 서로 반말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내가 순순히 사과하자 이희진도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체 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그날 그 S급 몬스터는…….”
말끝을 흐리는 이희진은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헤타리로스를 사냥했던 날의 풍경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일은 그녀 입장에서는 굉장히 신선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 헤타리로스는 내가 스스로 불러내어 사냥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곱씹을수록 혼란이 올만 했다.
대답하기가 궁색하다고 여기고 있을 때 미미가 나섰다.
“그건 저희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아아…….”
이희진은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 혀를 찼다.
“나도 자세한 사정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야. 다만 다른 사람을 말려들게 해서 귀찮게 하지는 말아 달라는 뜻이지.”
‘거기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아무리 대화를 귀찮게 생각하는 나라지만 이 대목에서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만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이희진의 행동도 정상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날은 왜 나를 미행했던 거지?”
내 말을 들은 이희진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데……. 네가 강원도까지 갈 줄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그냥…….”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니 외모와 어우러져 귀엽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에 남은 S급 헌터가 나밖에 없잖아……. 그러면 S급 몬스터를 나 혼자 사냥해야 된다는 말인데…… 그거는……. 정말 힘든 일이거든…….”
‘아!’
거기까지만 들어도 나는 이희진이 뭣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S급 몬스터 사냥은 엄청 힘든 일이다.
내가 직접 그것을 경험한 것은 능력을 깨친 뒤이고, 내게 빙의한 능력자가 먼치킨인 만큼 아주 쉽게 사냥을 해왔지만, TV에서 보았을 때 S급 몬스터 사냥은 항상 엄청나게 격렬했었다.
당연히 이희진 입장에서는 혼자 S급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것이 걱정되고 두려웠을 터.
그래서 내 존재를 개인적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일은 100퍼센트 그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미안…….”
이희진이 내게 사과했다.
이쯤 되자 미미가 상황을 정리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거니까, 그 일은 이제 잊어버리기로 해요. 헌터님도 보셨다시피 우리 철웅 님은 능력이 무척 고강하시답니다. 다만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조금 약한 척을 하셔야 해요. 앞으로 S급 몬스터가 나타나면 저희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 부분은 약속드릴게요.”
“그러면…… 고맙지.”
이제는 완전히 귀여운 소녀 모드로 돌아간 이희진이 안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미미가 말했다
“아까 기자회견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마 기자들이 많이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부분은 헌터님이 나서서 도움을 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응.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대충 둘러댈 테니까. 어쨌거나 오늘 기자회견장을 그렇게 만든 것은 미안해. 앞으로는 서로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오빠는 오성택이나 김철호보다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 같으니까.”
이희진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오빠로 바뀌었다.
반말은 반말대로 기분 나빴지만, 멋대로 나를 연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뭐,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이것으로 모든 용건이 마무리되었다.
이희진이 개운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얘기 끝났으니까 나는 이만 가볼게. 아! 그리고 혹시 서로 연락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면 안 될까?”
나는 내 번호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희진이 사람을 귀찮게 할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핸드폰이 울리는 것 자체를 귀찮게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런 내 기분을 읽었는지 미미가 말했다.
“서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을 드릴게요.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조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알았어.”
이희진은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이 바이~”
이미지와 맞는 귀여운 인사를 남긴 그녀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빛줄기를 번뜩이며 사라졌다.
‘순간이동 능력, 엄청 편해 보이네…….’
귀찮은 일이 터지면 확 사라지면 되니까 굉장히 유용할 듯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스킬을 얻을 수 있을 테지만, 오늘은 이런저런 일이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일에도 체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잘됐네요.”
미미가 커피를 홀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가까운 곳에 든든한 동료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빨리 이희진 씨가 본인의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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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에 비해 나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전 같았으면 귀찮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좀 더 뻔뻔해졌다고 할까?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지금 나를 둘러싼 상황은 불과 한 달 전과 비교한다면 굉장히 복잡해졌으니까.
이것을 온전히 감당한다고 생각하면 내 가슴은 답답함에 아마 터져 버릴 것이었다.
완벽한 차단.
나는 외부 영향력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꺼버리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뭔가 좋은 능력을 얻은 느낌인데…….’
아마 람바스도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복잡해질수록 거기 적응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물론 람바스, 그리고 내 능력이라면 귀찮게 하는 사람들을 싹쓸이해 버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을 다 죽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이라면 점점 더 많은 적이 생기고 말 것이다.
단순히 말해서 악당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는 뜻.
애써 복잡한 일을 무시하고 내면의 평화를 얻는 능력을 계발했건만, 그런 내 평화는 불과 하루를 가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유튜브를 보지 않고 인터넷에도 접속하지 않았다.
미미는 부지런하게 정보를 알아보고 수집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내가 기자회견장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그것이 낳을 후폭풍은 엄청날 것이었다.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각오는 도저히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문제를 떠나 내가 감당해야 할 귀찮은 문제는 또 있었다.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 미미가 내게 말했다
“주군, 손님이 온다는데요?”
손님이라니.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없다고 해.”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요. 이 사람들은 주군을 만날 때까지 계속 찾아올 거거든요.”
“하아아…….”
나는 소파에서 몸을 굴린 뒤 썩은 눈으로 물었다.
“누군데?”
“정부에서 나오는 사람들이에요.”
“아…….”
그렇구나.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체를 드러냈으니까.
모든 헌터는 국가기관에 등록되어 있다.
물론 나 역시 등록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각성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헌터인 내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S급 헌터였다는 사실은 국가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국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것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협상’을 의미했다.
나도 기본적인 상식이 있었다.
잘나가는 헌터들을 국가가 어떻게 관리하는지.
S급 헌터는 국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국가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국가 영역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혹시라도 자유로운 국제시장에 S급 헌터들이 활동을 풀려난다면 그들을 독점하기 위한 국가들의 움직임들이 엄청나게 활발해질 테니까.
당연히 S급 헌터의 국가 이동을 불허하는 국제법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이유는 강대국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S급 헌터들을 자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국제법의 분야에서 강대국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그 나라들의 속내가 약소국들의 S급 헌터를 자국에 이민시키는 것에 있다면 당연히 S급 헌터의 이민을 불허하는 법률을 만드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각국이 S급 헌터를 자국에 붙잡아 두기 위해 필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개발도상국, 그리고 후진국들에서는 S급 헌터들이 적지 않게 이탈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탈한 S급 헌터들은 원조라는 형태로 다시 약소국들에 재수출되었다.
자연스럽게 반발이 일어날 일이지만 S급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게 S급 헌터밖에 없기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냐 마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떤 무력을 동원하더라도, S급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도 더 S급 헌터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자면 S급 헌터는 경우에 따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국제 깡패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S급 헌터 두 명을 잃게 되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그런 이유가 섞여 있었다.
지금은 무력, 그리고 경제력으로 전쟁하는 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S급 헌터로 전쟁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귀찮게시리…….”
미미의 말마따나 정부와의 협상은 꼭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었다.
S급 헌터더러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으니 오늘 이 호텔 방으로 담당자가 찾아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