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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51화 (51/160)

▣ 51화

“확실하군.”

이희진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사도들도 기억이 구체적으로 깨어나기 전에는 자기가 사도인 걸 모른다고 하니까 영웅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사실을 이희진에게 알려줄 의무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알려 준다고 해봤자 이희진이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마디로 얘기를 꺼내 봤자 귀찮기만 할 화제라는 뜻.

다만 호텔 방 한가운데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이희진의 태도가 무척 귀찮게 느껴졌다.

“이거 무단침입 아닌가요?”

내 말에 이희진이 인상을 썼다.

“말이 다 안 끝났는데 먼저 가버린 건 당신이잖아!”

“하아아…….”

나는 노골적인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그녀를 무시하고 소파에 몸을 묻고 싶었지만, 저렇게 살기등등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으면 마냥 무시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그녀는 S급 헌터 아닌가?

일반적인 손님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슬그머니 스킬을 썼다.

‘의지.’

기자회견보다는 덜 하지만 이희진과 대화하는 것이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했다.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이희진에게 미미가 권유했다.

“앉아서 얘기하시죠.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음…… 따뜻한 커피가 좋겠네요.”

나에게는 사납게 굴면서 미미에게는 공손하게 말을 하는 이희진이었다.

이렇다는 것은 그녀의 기본적인 성정이 그렇게 막 나가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만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던 거겠지.

여전히 나는 애매모호했다.

뭣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

내가 헤타리로스를 사냥하는 현장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였지만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무슨 이유일지 모르는 감정의 골을 해결하고 이희진이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싫어도 대화를 해야겠지.

스킬을 쓴 덕분에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다.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추후에 더 귀찮아지지 않으려면 한 번의 성실한 대화로 오해를 풀 필요가 있었다.

‘표정 변화’ 같은 스킬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편했다.

“흐흐흥~”

미미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준비하러 갔다. 그 뒤를 파프리카가 쪼르르 따라갔다.

미미와 파프리카 모두 이희진이 적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

어쩌면 내가 보였던 짧은 반응이 그런 확신을 준 것일 수도 있다.

미미는 눈치가 무척 빠른 데다가 람바스와 함께 긴 시간을 보낸 만큼, 그가 빙의한 내 마음을 읽는 데도 선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고 할까?

파프리카는 각성수 중의 각성수, 각성수들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 본능으로 피아를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희진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생각하는 내 앞에 그녀가 불쑥 양손을 쳐들었다.

그 행동에서는 공격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딱히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희진이 손을 돈 이유는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것은 돈이었다. 그것도 현금다발.

돈다발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게다가 S급 헌터가 되고 나서는 내가 보는 돈의 단위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도 예외는 없었다.

이진희가 꺼내 놓은 돈다발은 산처럼 쌓여 갔다.

전부 다 5만 원권인데 이게 다 얼마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돈이죠?”

“무슨 돈이기는…….”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아마도 내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이희진은 내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실 나이로 존대를 따지는 것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과 맞지 않기도 하고.

이희진이 ‘무슨 돈이기는.’이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돈을 꺼낸 걸까?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서 고함을 질렀던 것과 비교하면 전혀 이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돌아이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이희진이 길지 않은 다리를 척 꼬았다.

“헤타리로스 사냥한 정산금이야.”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희진이 돈을 내 앞에 꺼내 놓은 이유는 이게 자기 돈이 아니라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이 돈을 그냥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돈을 받는 순간 헤타리로스를 사냥한 게 빼도 박도 못하게 내가 돼버리는 거니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희진에게는 상관이 없지만 그게 공식화되어 버리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꼬이게 된다.

나는 꼬인 문제를 푸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그것은 기자회견장에서 소리를 질러버린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지만 람바스의 성정을 이어받고 나서는 그렇게 돼 버렸다.

상황이 점점 더 귀찮아지고 있을 때 미미가 돌아왔다.

그녀는 커피 세 잔을 쟁반 위에 올리고 와서 두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미 그녀도 예상한 바가 있기 때문인지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인 돈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커피 한 잔도 테이블 위에 놓고 그 앞에 앉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대화는 미미가 나보다 몇 배는 더 능숙하니까.

이희진은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을 보니 커피 맛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또한 표정도 눈에 띄게 온순해졌다.

하긴, 대화의 장이 열렸으니 이제 더는 그녀가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손님 접대는 미미에게 맡기고 소파에 가서 눕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이겠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괜히 이희진에게 밉보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희진이 돈과 상관없는 물음을 내게 던졌다.

“왜지?”

‘왜지’라니.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대화법을 즐기는 그녀였다. 아니, 단순히 내가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이희진이 자신의 물음을 더 풀어서 이야기했다.

“왜 헤스테로스를 사냥하고 그냥 가버린 거지?”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간 것은 아니었다.

보구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확실히 챙겼을 뿐 아니라 미미가 현란한 솜씨로 주요 부위를 도축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에 산처럼 돈이 쌓일 만큼 정산금이 많다는 것은 역시 S급 몬스터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나는 골치가 아팠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대관절 너는 왜 거기에 있었던 건데?

내가 씁쓸하게 입술 끝을 비틀고 있자 나 대신 미미가 말했다.

“필요한 건 다 얻었으니까요.”

“아! 당신!”

이진희이 이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미미를 보고 놀랐다.

“당신은 왜 그날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지?”

‘뭐라고!’

나는 허걱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미미는 이희진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세히 따져보니 그때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는 했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미미가 다람쥐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을 따름이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다람쥐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희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따라서 은밀하게 기동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S급 헌터, 그것도 평범한 S급 헌터가 아닌 내 인지 능력은 피할 수는 없었다.

나도 미미를 바라보았다.

그래. 왜 모른 척했던 거야?

미미가 드물게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는 두 분이 만났으면 했거든요. 서로 적이 아닌 이상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마치 소개팅을 주선한 사람 같은 말투였다.

당연히 이희진과 나 사이에 있는 기류는 소개팅, 아니, 그것을 떠나 친화적인 것이라고도 보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미미는 그때부터 이미 이희진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구나.

그녀가 ‘영웅 도감’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흐름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미 미미와 나눈 대화가 있기 때문에 그녀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사도들 그리고 악마와 싸우려면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러면 이희진을 어떤 포지션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내 부하는 아니고 그냥 동료 포지션인 것 같지만, 그녀가 기억을 찾기 전에는 그나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냥 이럭저럭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가 나중에 기억을 깨치게 되면 관계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를 굳이 나쁜 쪽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미미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자회견장에 이희진이 난입해서 증거사진을 들이민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이희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조금 편안한 상태에서 그녀를 보고 있자니 꽤 귀여운 외모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것이겠지.

지금은 사라진 두 명의 S급 헌터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팬덤으로 치면 다른 두 명보다 훨씬 컸다.

혹자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팬덤이 전세계적으로 훨씬 커질 거라고 보기도 했다.

S급 헌터는 단지 국경 안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부 인기 있는 S급 헌터들은 국경을 뛰어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우라 자체가 일반인은 범접도 할 수 없다고 할까?

S급 헌터가 등장하고 나서는 일반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도 몇 수 접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이희진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한 결과 그녀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푸근한 동질감도 느꼈다.

‘너도 나처럼 관종이 아니구나.’

뭔가 조금 친해질 수 있을 만한 틈이 보이는 것 같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마음 풀어요~”

미미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의 마음도 사르르 녹이는 매력이 있었다.

이희진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지? 결혼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어머! 결혼이라니요~”

미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싫은 기색은 전혀 없었고 양손으로 볼을 감싸 쥐면서 부끄러워했다.

느낌이 굉장히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뭐, 그것을 보는 내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이성 교제는 굉장히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미미는 엄청나게 유능하고 아름다운 여자이니 그럴 수밖에.

그녀는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람바스가 아니니까, 지구 기준으로 결혼이라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패스.’

미미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여전히 이성 교제와 결혼을 받아들일 만큼 나는 조철웅의 부지런한 기질을 되찾지 못했다.

“흠~ 그냥 사귀는 사이인가?”

그렇게 말하고 납득하려는 이희진에게 내가 말했다.

“그냥 친한 사이야.”

미미가 약간 실망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면 S급 헌터는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니까.

더군다나 연애 문제라면…….

그 가십 거리가 얼마나 나를 귀찮게 할지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희진이 커피를 한 모금 더 홀짝이고 나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나를 귀찮게 만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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