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이희진이 들어 보인 핸드폰, 그 안의 사진에는 나와 S급 몬스터, 즉 헤타리로스가 찍혀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뒤돌아 있어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걸 핑계로 반박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미묘했다.
헤타리로스는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죽은 걸로 되어 있으니까.
S급 몬스터와 마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A급 헌터도 불가능하다.-있을 리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사망했어야 정상이다.
즉, 빼도 박도 못할 증거사진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자발적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손을 뻗어 이희진의 핸드폰을 빼앗은 것.
“앗!”
이희진이 놀란 음성을 토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핸드폰이 내 손에 아작 난 뒤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변상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이희진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당연히 S급 헌터에게는 핸드폰 따위 망가진 것은 사소한 문제이다.
그걸 변상받는 게 핵심이 아닌 것이다.
“너어~~!!”
화가 난 그녀가 마나를 발산했다.
나는 큰일이라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그녀가 능력을 발휘하면 나도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S급 헌터 두 명이 부딪치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S급 몬스터가 출현한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이 호텔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후우…….”
의외로 이희진은 심호흡을 하며 자기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렇다. 그녀는 앞서 상대한 두 명의 S급 헌터와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냥 그렇다고 보기에는 호텔로 쳐들어와 기자회견장에서 기함을 지른 일이 설명되지 않지만, 아무튼.
화를 누른 것과는 별개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으으으…….”
얼핏 귀여운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가 어금니를 깨물고 분하다는 듯 노려보고 있다.
상황과 별개로 깜찍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내게 감정을 담아 이렇게 노려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발을 슬쩍 굴려서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그녀와 거리를 띄웠다.
기자회견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기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와 최태영, 그리고 이희진을 보고 있었다.
이희진이 순간이동 능력으로 내 뒤에 와서 핸드폰을 들어 보인 것은 결과적으로 행운이었다.
누구도 거기 맞춰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상황에 반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일반인이 아니었다.
기자가 아니라 헌터를 하고 있어야 했다.
“후후후.”
나는 위기를 극복했다는 생각에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최태영이 나를 팔꿈치로 찔렀다.
“저, 저기 헌터님…….”
“응?”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니 뭔가 X 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재빨리 스킬을 발휘해서 얼굴을 바꿔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이곳에 있는 기자들은 내 진짜 얼굴과 표정이 어떤지 보고 말았다.
게다가 이희진이 왜 여기에 난입한 것인지,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결국 누군가가 폭주하고 말았다.
사전에 조율된 내용이 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터뜨려버린 것.
“이희진 헌터님, 보여주시려고 한 사진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조철웅 헌터님은 왜 그 사진이 공개되길 꺼리시는 거죠?”
한 명이 폭주하자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영향을 받았다.
“맞습니다! 무엇을 감추시는 건가요?”
“애초에 이런 일방적인 기자회견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입니다!”
“옳소! 탄압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취재할 권리가 있다!”
심지어 사진기를 들고 있는 몇 명은 플래시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 미친…….”
결국 인내심의 끈이 끊어졌다.
애초에 노근의인 스킬은 하나가 아니니까. 네 개를 연달아서 사용해야 오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즉, 앞서 사용한 스킬 효과가 끝난 시점에 내 본성도 누를 수가 없게 된 것.
결국 나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내 정체를 공개하든 말든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야? 언론의 자유? 개소리하지 마! 오성택, 김철호가 헛지랄할 때는 찍소리도 못하던 것들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것들은 다 물 건너갔다.
“에잇, X발!”
표정관리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
나는 귀찮음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방을 벗어났다.
내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몰라,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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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
호텔 방으로 돌아오고 나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귀찮은 나머지 일갈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그 뒷수습을 생각하자 막막해졌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과 반대로 미미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괜찮아요, 주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람바스 님도 주군과 똑같았어요. 오히려 저는 그때 일이 생각나서 즐거웠답니다.”
“응?”
내가 각성한 람바스의 기억은 제한적이었다.
나는 표정 변화 스킬이 있는 것을 보고 람바스가 나름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지 관리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나마 노근의인 스킬이 있어서 어느 정도 감정 통제가 가능했지만 람바스는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떻게 언론과 대중 앞에서 내 본래 모습을 끝까지 꾸밀 수 있겠는가?
그것은 본모습을 일찍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귀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내 방에 뒤늦게 들어온 최태영도 웃는 얼굴이었다.
“기자회견은 제가 잘 마무리하고 왔습니다.”
“어떻게 됐는데요?”
“이희진 씨께는 제가 잘 설득해서 나중에 차분하게 이야기하자고 얘기했습니다. 기자들도 좋게 돌려보냈고요. 언론을 백 퍼센트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 세상에 S급 헌터는 필요하니까요. 셋 중 두 명이 사라지고, 새로 한 명이 생겨서 겨우 두 명이 됐는데, 대중은 희소한 존재인 S급 헌터를 지키고 싶어 할 겁니다. 언론이 자기네들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거라는 뜻이죠.”
“그건 다행이네요.”
“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동영상 편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요.”
“수고하셨어요.”
최태영이 돌아감으로써 기자회견 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나저나…….’
나는 기자회견장에서 보았던 이희진을 떠올려보았다.
여전히 S급 몬스터를 사냥하던 현장에 그녀가 있었던 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오늘 나타나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내민 것은 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희진은 뭐 하는 여자지?”
미미에게 물어보았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사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가 아니라면 뭐지?”
S급 헌터가 전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박혜나가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아군 포지션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S급 헌터라고 해서 전부 적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좀 안일한 판단인 것 같으니까.
“S급 헌터는 둘 중 하나예요. 사도 아니면 아군이죠.”
“그래?”
미미의 말은 얼핏 당연한 소리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적이나 아군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관계 설정이 가능하니까.
오히려 무관계라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제가 말씀드렸죠? 세상에는 아군도 많이 있다고요. 그녀가 사도였다면 주군께서 즉시 알아보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되레 아군일 가능성이 높아요.”
이희진이 보인 반응만 보면 전혀 아군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겠지.
어쩌면 그녀도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S급 헌터로 각성한 사도들이 아직 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걔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건데.’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억을 각성하지 못한 거라면, 뭔가를 착각하고 내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었다.
오성택과 김철호 건도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남은 한 명의 S급 헌터와도 싸워야 한다면 상당히 귀찮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오성택과 김철호 사건이 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깝다.
거기에는 미미의 눈부신 수완, 그리고 최근 합류해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박혜나의 도움이 있었다.
이희진까지 죽여야 했다면 대한민국에 S급 헌터는 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주목도가 높아진 만큼 더 성가시게 될 거라는 것은 자명했다.
‘일단 두고 보자.’
최태영이 잘 얘기해서 돌려보냈다고 하니까 나중에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소파에 드러누웠을 때였다.
강력한 미지의 기운이 호텔 방 한가운데 번쩍 존재를 드러냈다.
“왈! 왈!”
파프리카가 후다닥 달려가 그것을 향해 짖었다.
소파에 누운 내 고개도 스르륵 돌아갔다.
예상했던 대로 갑자기 나타난 존재의 정체는 이희진이었다.
순간이동 능력이 있는 만큼 그녀에게는 물리적 경계가 전혀 의미 없었던 것.
“나랑 아직 말 안 끝났잖아!”
앙칼진 음성과 표정.
‘적이 아니라고?’
진짠가?
살기등등한 모습만 보면 미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는 내 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영웅에 대한 기억이 일부 깨어났습니다.]
[기억이 정리됩니다.]
[‘영웅 도감’을 획득했습니다.]
이제까지 몇 번 겪은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몬스터 도감’ 그리고 ‘사도 도감’.
모두 특정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몬스터’와 ‘사도’의 정체는 명확했다.
모두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그런데 ‘영웅’은 뭘까?
파라라락-
홀로그램으로 표현된 두꺼운 책이 넘어갔다.
그리고 특정 페이지에서 멈춘 다음 정보가 표현되었다.
이름 : 테오나
등급 : S-3
특성 : 고요한 행성 데스타스의 출신인 그녀는 악마와 끝까지 싸운 영웅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영혼은 우주를 떠돌다가 부활의 기회를 얻어 지구에서 이희진의 몸을 통해 각성했다.
“…….”
이희진에 각성한 ‘영웅’이라는 존재의 이름은 테오나인 모양이었다.
그녀도 람바스와 마찬가지로 행성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끝까지 싸웠다고 한다.
적이 아니라 아군일지 모른다고 했던 미미의 말이 맞았던 셈.
람바스와 직접 연관이 없다고 해도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아무래도 내가 아는 정보를 본인은 모르는 듯 이희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내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