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42화 (42/160)

▣ 42화

그나저나 대담한 놈이었다.

내가 S급 헌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리고 오성택도 내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싸움을 걸어오다니.

나도 김철호를 따라 추리닝을 벗었다.

어차피 싸움을 하면 찢어지거나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옷이다.

돈 관리는 미미가 전담하고 있으므로 자세한 경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추리닝 한 벌 정도 버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은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기분 문제지.’

굳이 아낄 수 있는 옷을 버린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좋은 걸 입고 있군.”

김철호가 말했다.

미나는 이 방어구를 주면서 일단은 쓰레기 같은 걸로 버티고 있어 달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역시나 이 방어구 또한 S급 헌터가 보더라도 보통 물건이 아니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미나의 제작 능력은 먼치킨급이었다.

람바스는 이런 먼치킨 군단을 이끌고 어떻게 싸움에서 패배를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악마라는 놈이 만만치 않은 거겠지.

그런 생각을 했더니 위장이 아팠다.

누군지 생각나지도 않는 악마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첩첩산중이라는 것 때문에.

“미친.”

“그래, 나는 너 따위한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거든.”

마나를 본격적으로 뿜어내기 시작한 김철호가 내가 욕한 이유를 오해하고 그렇게 말했다.

‘너 따위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욕한 거 아니거든?’

귀찮아서 그렇다.

‘의지력’ 스킬의 유지시간이 점점 끝나가고 있어서인지 이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근성!’

부와악-

스킬을 쓰자 의욕이 샘솟았다.

“이왕 싸울 거면 빨리 끝내자! 덤벼!”

“대체 뭘 믿고 까부는 건지 모르겠군.”

네 바로 앞에 있는 적의 실력도 제대로 파악할 줄 모르면서 너야말로 까불지 마라.

나는 지배자의 손아귀를 양손에 끼웠다.

아직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김철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이 보구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하는 대로 무기와 방패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적이 어떻게 나오든 대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근래 자발적으로 호텔 훈련소에 들어가 실력을 쌓았다.

비록 김철호가 오성택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 해도 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

김철호가 본격적으로 실력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놈이 몸을 통통 튕기면서 스텝을 밟는 걸 보니 기억이 났다.

나도 가끔 S급 헌터들이 사냥하는 것을 TV로 보았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에게 자국 S급 헌터가 무엇을 주특기로 하는지 아는 것은 상식에 가까웠다.

‘스피드.’

김철호의 장점은 발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물론 S급 헌터이니만큼 상식적인 선에서 말하는 발이 빠르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는 어떤 탈 것보다도 본인의 발이 빠르기 때문에 S급 몬스터를 사냥하러 출동할 때 직접 달려서 나타나곤 했다.

그래도 대부분 하늘을 날아서 오는 오성택보다 빨리 현장에 나타났다.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하는 이희진은 논외로 해야겠지만.

얼굴에 여유작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철호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이미 일반인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스피드였다.

제자리에서 과시하듯 스텝을 밟고 있다.

“후후후.”

아마도 내가 겁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김철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래도 양아치 같은 인상을 가진 놈이라 굉장히 꼴 보기 싫었다.

‘제멋대로네.’

나는 김철호의 스텝 밟는 모양을 보고 되게 형편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역시나 생긴 대로 이놈은 사냥 연습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조금만 연구하면 효과적으로 스텝 밟는 것 정도는 익힐 수 있을 텐데.

요즘은 유튜브로도 헌터들을 위한 유용한 동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그 동영상들은 대개 낮은 등급의 헌터들이 올리는 것이었지만, 마나 운영이라든가 기술을 쓰는 요체는 모든 헌터가 같으므로 조금만 연습해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요즘은 세상이 좋아서 헌터들도 집에서 편하게 실력을 향상할 수 있다는 뜻.

‘이 자식은 그마저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훈련을 하는데 감히 김철호 따위가 훈련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난다.

휙-

김철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꽤 빠르기는 했다.

이제는 일반인뿐 아니라 웬만한 헌터도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A급 헌터도 아마 놈을 눈으로 좇지 못하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이놈아.’

김철호는 히죽거리면서 내 주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놈이 뭘 하려고 하는지는 뻔했다.

파앗-

내 뒤에서 놈이 발차기를 해왔다.

나는 놈의 허접한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깔끔한 스텝으로 공격을 피했다.

“앗!”

쿠당탕!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S급 헌터께서 헛발질을 하고 바닥을 굴렀다.

이 타이밍에 나는 반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놈이 하는 양을 더 보고 싶었다.

‘훈련이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호텔 지하에 있는 훈련소에 가는 것보다 S급 헌터와 치르는 실전이 훨씬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

내 눈은 이미 ‘분석’이 발동되어 있었다.

훈련하는 동안 감각도 무척 발달해서, 안 그래도 빠른 분석을 통한 계산과 습득이 더 빨라진 느낌이었다.

내가 보는 것은 김철호의 허접한 스텝과 공격법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마나를 운용해서 발이 빠르게 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바보한테도 배울 건 있다더니.’

마나의 운용법은 무궁무진하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저 각성할 때의 수준에 머물며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끝까지 갈 때가 많았다.

‘뭐, 내가 반칙이겠지만.’

보기만 해도 S급 헌터의 특수한 마나운용법을 이해하는 람바스의 재능이 사기일 것이다.

김철호는 발의 빠르기를 더 빠르게 했다.

그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서 바닥이 푹, 푹, 파였다.

이렇게 하면 더 눈에 띌 확률이 높아지지만, 어차피 그런 식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다.

놈은 흥분해서 마구 날뛰고 있었다.

김철호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자신의 공격을 옆으로 한 발 이동하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냈으니까.

놈은 지금 혼란스러울 것이다.

내가 자신의 공격을 피한 것인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실력인지.

‘오만한 놈들은 항상 오판을 하지.’

예상대로 놈은 내가 자신이 공격을 피한 것이 우연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같은 식의 공격을 또다시 해왔다.

이번에 나는 놈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냥 선 채로 놈의 발을 잡아버렸다.

뚝.

S급 헌터의 강력한 발차기도 내게는 아무런 충격을 주지 않았다.

내 몸은 1밀리미터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김철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시시한 놈이네.”

이놈은 오성택보다도 못한 놈이었다.

물론 그렇게 판단한 데에는 내가 오성택과 싸울 때보다 지금 훨씬 강해졌다는 게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쨌든 배울 게 많은 놈은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놈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쿠앙!-

놈의 몸이 바닥에 부딪혀 퉁, 퉁 튕겼다.

굳이 쫓아가서 재차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자, 이제 어쩔 거냐?’

당연히 김철호의 실력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명색이 25위 사도가 빙의한 놈인데, 발만 빠르다면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지.

게다가 나는 알고 있었다.

놈이 대한민국 헌터 중 최강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 이유를.

그것은 놈이 아직 쓰지 않은 강력한 스킬 때문이었다.

“히이익!”

깜짝 놀란 김철호가 후다닥 일어나 다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적응하고 나자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내 눈에는 느리게만 보일 뿐이었다.

‘자, 슬슬 끝을 내자.’

나는 놈이 자신의 최강 무기를 쓰길 바랐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뭔가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와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김철호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파직, 파직, 전격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이 놈의 주특기였다.

전격을 일으키는 것.

그것을 본인의 스킬과 연계시켰다.

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고속 스핀을 거는 김철호.

그의 몸이 붕 떠오르고 강력한 바람이 생성되었다.

휭, 휭, 휭-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허리케인.

이런 게 게이트 바깥에서 생겼다면 동네 하나는 우습게 날려버릴 것이었다.

“음…….”

이건 쓸 만하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나왔으면 나도 김철호를 조금은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

‘간 보다 죽는 수가 있지.’

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까불다가는 제 능력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게 마련이다.

김철호는 내가 관대한, 아니, 게으른 성격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뭐, 어차피 내 손에 죽겠지만.

쿠와아아아-

거대한 허리케인이 전격을 품었다.

콰직! 콰직! 콰직!

나는 가만히 선 채로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 거지?’

‘분석’ 능력을 통해 돋아난 호기심이 김철호의 필살 스킬의 요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쿠지직!

콰악!

그러는 동안 김철호는 돌풍이 동반된 전격을 내 쪽으로 연속해서 쏘았다.

그것들은 전부 내 몸을 비껴갔다.

김철호의 조준 능력이 형편없다기보다 내가 세련된 스텝으로 그것들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김철호가 발이 빠른 만큼이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내가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내 몸을 돌풍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알았다!”

분석이 끝났다.

“별거 아니네.”

일반인일 때 TV로 봤을 때는 김철호 대단하다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스킬은 별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 과학적 지식-이라고 해봤자 마나의 운용은 지구의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이 아니지만-이 일천한 탓에 말로 풀어낼 수는 없었다.

‘먼치킨이 원래 그런 거지.’

천재란 원래 이해하는 게 아니다.

그냥 느끼는 거지.

나는 몸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내 주위에서 전격이 발생했다.

콰직! 콰직! 콰직!

돌개바람이 생성되어 그것의 부피가 커지기 시작했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김철호와 내가 발생시킨 허리케인 사이에 크기 차이가 벌어졌다.

쿠웅! 쿠웅! 쿠웅!

내가 발생시킨 전격이 떨어진 자리에는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크레이터가 생겼다.

김철호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놈의 몸에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는 사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혀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왜냐면 내 머릿속에 저 사도가 한 짓들이 재생되었으니까.

‘니들은 사라지는 게 전 우주를 돕는 것이다.’

콰과과과-

나는 굵직한 전격을 쏘아 보냈다.

그것은 정면으로 날아가서, 김철호와 놈에게 빙의하고 있던 사도 켈로스를 함께 쓸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