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37화 (37/160)

▣ 37화

59

김철호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는 화려한 가운을 입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였다.

어젯밤의 어지러운 파티를 짐작하게 하는 술병들이 거실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었다.

곧 방문이 열리더니 술이 덜 깬 얼굴의 여자 한 명이 나왔다.

그녀는 눈을 찡그리고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김철호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기, 뭐 보고 있어?”

김철호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래? 싸구려 같은 년이 술김이 한 번 만나줬더니 기어오를래? 빨리 이 손 안 치워?”

인격 모독 수준의 심한 말이었지만, 여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급히 그의 어깨에서 팔을 빼며 몸을 움츠렸다.

“미,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꺼져!”

S급 헌터의 일갈에 여자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녀는 겁에 질린 나머지 후다닥 옷가지만 챙겨 현관으로 달려갔다.

김철호는 TV를 계속 보았다.

오성택이 죽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뒷일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웬 유튜버 하나가 비리를 폭로하여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을.

오성택이 죽은 것까지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일전의 블랙마켓 이권 문제로 부딪쳤을 때, 그에게 패배하여 시장의 거의 전부를 내주었으니까.

당연히 그 뒤로는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오성택의 죽음은 잃었던 시장의 지분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물론 S급 몬스터 사냥에서 한 명이 빠지게 되니 위험도가 커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S급 몬스터가 날이면 날마다 출현하는 것은 아니니까.

확률적으로 보면 이전에 연달아 두 마리가 출현했으니 당분간은 거의 나올 확률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과거의 사례로 보았을 때 S급 헌터가 사망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같은 지역에 또 다른 S급 헌터가 각성하곤 했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로 이미 또 한 명의 S급 헌터가 대한민국에서 각성했다고 하니, 어쩌면 자연법칙에 의해 오성택이 도태되어 사망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오성택의 죽음은 자신에게는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은 일이었다.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에 S급 헌터 세 명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차지할 수 있는 이권은 정해져 있고, 그것을 두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니까.

A급 이하의 피라미들이야 자기네들 수준의 밥그릇을 가지고 아등바등 싸우면 된다.

그 위의 알짜배기 이권은 S급 헌터들이 나눠 갖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사이좋게 나눈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느냐 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로 직결되며, S급 헌터의 프라이드는 엄청나게 강하니까.

오성택에게 시장 쟁탈전에서 패배한 것은 그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경제적인 손해는 둘째치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눈엣가시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 됐든 대단히 환영할 일이었다.

그런데…….

김철호는 뉴스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멍청한 놈이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똥을 싸지르고 갔네.”

S급 헌터가 권력과 결탁하고 비리를 자행하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느 정도 인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S급 헌터는 정치인이나 재계인과는 달리 어떤 수단으로도 제어할 수 없다.

실로 법을 초월한 존재나 다름없는 것.

그래도 이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되어버리면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법적 처벌은 피할 수 있다 치더라도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을 뜬다는 발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떤 나라에 가도 한두 명의 S급 헌터가 있으며, 타국에서 그들과 이권을 나눈다는 것은 애초에 불리한 경쟁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S급 헌터의 존재 의의는 상당 부분이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는 명예에서 발생한다.

국적을 이탈하는 즉시 명예를 잃고 그에 수반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김철호의 머릿속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과 얼굴들이 스쳐 지났다.

그들 중 누구도 아직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며, 이럴 때 굳이 S급 헌터와 접촉하여 본인 입장을 불리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뭘 어쩌라는 거야?”

오성택이 죽으면서 그가 남긴 이권을 회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진 상황이었다.

그는 거칠게 손을 뻗어 테이블에 있는 위스키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빨개진 눈으로 TV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60

나는 지난번 오성택과 싸울 때 ‘노근의인’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 훈련을 할 때 똑같은 행동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즉시 후회를 해야 했다.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엄청난 귀찮음이 부글부글 뱃속에서 끓어오른 것.

훈련 장치가 내보낼 수 있는 몬스터의 수준이야 빤한 것이지만, 그 빤한 몬스터들에게조차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게는 그럴 동기가 없으니까.

훈련 장치가 만들어낸 몬스터들은 어차피 가짜다.

그들은 내게 실질적인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아무리 능력을 연마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해 봤자 의식 깊은 곳에서 몸을 움직이길 싫어하니 도리가 없었다.

‘역시,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네.’

나는 괜히 저항해서-그럴수록 귀찮음이 더 배가되었다.-피곤함을 만들지 않고 ‘노력’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부와악-

노력 스킬도 이제 레벨이 11에 달한 만큼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반응을 유발했다.

발동시간이 길어진 것도 당연한 일.

나는 미미가 내보내는 몬스터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일부러 몬스터들을 정통으로 맞추지 않았다.

정통으로 맞추기는커녕 빗맞히지도 않았다.

지금 내 능력이라면 A급 몬스터들은 스치기만 해도 즉사니까.

나는 보통 때와 달리 신중하게 무기를 사용했다.

내 안에서 어떤 특별한 것을 끌어내기 위해.

이왕이면 한 단계 높은 기술을 구사하는 상대와 싸우면서 ‘분석’을 사용하는 게 효과가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이렇게 하면서 뭔가 터득하기를 바랐다.

‘음, 알 듯 말 듯 하네.’

의식하는 것만으로 이전과는 느낌 자체가 달라졌다.

역시 먼치킨의 재능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수치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람바스식 무기술’의 등급을 높이는 데 필요한 경험치 습득 속도가 빨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A급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로 효율적인 공격을 했다면 이제는 자연스럽게 약한 몬스터들도 강한 몬스터라고 가정하고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경험……!’

말할 것도 없이 람바스는 어마어마한 사냥 경험을 가지고 있다.

횟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의 수준에 걸맞은 상대와 셀 수 없이 많이 싸웠다.

그도 그럴 수밖에, 행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바로 그였으며, 마지막까지 적과 싸워야 했던 것도 바로 그다.

누구보다 질 높은 사냥 경험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경험이, 능력과 함께 고스란히 내게 전수되었다.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떠올릴 수는 없어도 이렇게 무기를 휘두르다 보면 몸이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기억하는 듯했다.

또한 ‘노근의인’ 스킬들의 레벨이 높아졌기 때문에 훈련 시간이 늘어났다.

‘지배자의 손아귀’뿐 아니라 미나가 만들어준 S급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탯 자체도 높아졌다.

한마디로 이전에 하던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훈련을, 더욱 장시간 할 수 있게 된 것.

그 효과는 고스란히 결과로 반영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거의 반칙이다 싶을 정도로 내 레벨은 빨리 오른다.

S급 헌터의 레벨이 이 속도로 오른다는 것은 밸런스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물론 이것은 게임이 아니므로 레벨이다 밸런스다 하는 문제를 깊이 따질 필요가 없겠지만.

애초에 내 능력이 스테이터스로 표시되는 것도 람바스가 자기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안 되네…….’

훈련이 모두 끝날 때까지도 특능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히 고작 한 시간도 안 되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치도 그것에 맞춰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미미, 녹화 잘했어?”

“네. 걱정하지 마세요. 빠짐없이 녹화했답니다.”

이번 훈련이 평소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과정 전체를 미미에게 녹화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중에 이것을 보면서 피드백하기 위해서.

발전을 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해도 좋을 이 훈련법이, 내게는 큰 결심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훈련 자체가 귀찮은 일일진대-훈련을 하는 중에는 ‘노근의인’ 스킬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난 후에는 한꺼번에 피로감이 찾아오곤 했다. ‘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하고. -그것을 녹화한 영상을 본다는 것은 두 배로 피곤해지는 일이었다.

더구나 영상을 보면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

‘어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지만 나는 이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의식적으로 훈련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몸이 느끼는 것과 눈으로 보면서 머리로 판단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설득력이 부족하겠지만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분석’ 특능.

내 훈련 동영상을 보면서 특능을 발휘하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거기서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성택처럼 어설픈 인간의 능력을 보면서도 특능을 뽑아냈는데 천재 먼치킨의 움직임을 보면 얻는 게 더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내가 나 스스로 천재니 먼치킨이니 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애초에 지금 능력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객관화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훈련을 끝내고 호텔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계획했던 대로 미미가 녹화한 영상을 보았다.

당연히 그 전에 몇 시간을 뒹굴거렸고, 슬쩍 무료하다 싶은 시점에 ‘의지력’ 스킬을 사용한 다음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나는 동영상 안의 내 움직임을 보면서 내가 품고 있는 누군가의 기억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특능 ‘람바스식 무기술’의 등급이 ‘고급’으로 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