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프라이빗 룸이라고 했지만, 개인 독서실이나 개인 피시방 규모의 조그마한 사적 공간이 아니었다.
이 넓은 곳을 혼자 써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다.
육방(六方)이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소재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후면에는 편안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앞의 테이블에는 두 개의 책자와 리모컨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흘긋 보았더니 하나는 음료 등을 주문하기 위한 메뉴판이고, 하나는 시설 사용에 대한 매뉴얼이었다.
그렇다면 리모컨은 뭘까?
뭔가 시작하기 전부터 급격히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미미가 먼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모든 벽에서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벽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실감 나게 연출이 되었다.
“여기 입력된 몬스터 중에서는 이놈이 가장 강하겠네요.”
미미는 몬스터 이름이 적힌 목록을 가장 아래까지 내리더니 유일하게 ‘A-1’ 등급이 달린 몬스터를 선택했다.
이름은 메하니카.
당연히 이름만 보아서는 어떤 몬스터인지 알 수 없다.
몬스터 도감을 꺼내 정보를 보는 방법도 있지만, 경험으로 미루어 A급 몬스터는 내 적수가 아니었다.
굳이 약점까지 보지 않아도 된다.
‘시작하기 전에.’
나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S급 몬스터 이피누스를 쓰러뜨린 뒤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레벨 업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실제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보지 않았으니까.
등급 : S(Lv 89)/???
근력 : 188/???
민첩 : 188/???
체력 : 180/???
기량 : 199/???
정신력 : 25/100
특수능력 : 조철웅, 분석
스킬 : 노력(Lv 4), 근성(Lv 2), 의지(Lv 6), 인내심(Lv 1), 핵주먹(Lv 43)
‘쭉쭉 오르는구나.’
아마 다른 헌터들이 내 성장 속도를 안다면 배가 아파서 죽으려 할 것이다.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근성 레벨이 오른 것이 눈에 띄고, 핵주먹의 레벨도 급격히 상승했다.
역시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획득한 경험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가장 빠른 성장을 위해서 S급 몬스터만 찾아다니면 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비정규 몬스터인 S급이 나타나 달라고 한다고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운명의 목걸이.’
이것은 ‘지배자의 손아귀’에 핵심재료 하나가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S급 몬스터를 출현시켰다.
만약 내가 다른 방향으로 ‘필요한 의지’를 갖는다면…….
예를 들어 다른 보구를 제작하기 위해 S급 몬스터를 사냥할 필요가 생긴다거나, 레벨 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S급 몬스터 출현을 바란다거나 하면.
‘모른 척하자.’
나는 방금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걸이를 벗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정말이지 위험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지배자의 손아귀’를 꺼내려고 생각했다가 그것은 이미 미나가 가져갔다는 데 생각이 이르러 그만두었다.
어차피 훈련일 뿐이니까 보구는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다.
“주군, 시작할까요?”
“응.”
나는 스킬 ‘노력’을 발동했다.
예의 그런 것처럼 지난날의 내 경험과 감정이 훅 치밀어오르고, 나는 언제 게을렀냐는 듯 넘치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미미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주변의 배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장소는 밀림.
뜬금없이 너무 이국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전면에 나타난 몬스터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공룡형 몬스터가 나타나기에는 이 배경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나저나 연출 한 번 죽이는구나.’
몬스터 게이트가 출현한 이후로 인류가 이득을 본 부분이 있다면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몬스터 사체는 비단 헌터용 장비를 만드는 데만 사용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보다 훨씬 많은 부분이 산업용으로 쓰인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한계에 와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인류의 과학기술이 역사상 어느 때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곧 태양계를 벗어나 유영할 수 있는 우주선이 개발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저 우주 밖에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득실댄다고 생각하면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닐 수 있지만.
메하니카가 제자리에서 통통 몸을 튕기더니 대뜸 이빨을 들이밀고 달려들었다.
정말 일반인이었으면 기겁하고 도망쳤을 법한 현실 같은 영상이다.
나는 ‘노력’을 통해 열정을 얻은 상태이므로 의욕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핵주먹!’
뻐억!
“꿰엑!”
‘와…….’
정말로 몬스터를 후려친 듯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내려다봤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내가 방바닥에서 뒹굴거리는 사이 정말 기술이 많이 발전했구나.
아마도 시스템이 헌터의 마나에 반응하게끔 설계된 것이겠지만 당연히 자세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 갑자기 밀림으로 덮여 있던 영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대신 전면 벽에 문장이 떠올랐다.
-훈련 완료 시간 01초.
-더 높은 등급의 훈련을 추천합니다.
‘이게 제일 강한 몬스터 아니었나?’
주먹 한 방에 죽어버리다니.
이래서는 훈련 효과를 누릴 수 없다.
차라리 허공에 대고 빈 주먹질을 하는 것이 낫겠다.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미미가 말했다.
“이보다 높은 단계도 있어요.”
그녀는 내가 주먹을 뻗는 타이밍에 맞추어 ‘미러 월’을 생성시켰다.
‘미러 월’은 훈련장의 벽이 손상되는 것을 막았지만, 충격을 감지하는 센서는 그보다 몇 미터 앞에서 발동되었으므로 시스템이 감지한 대미지는 제대로 측정되었다.
미미가 말한 더 높은 단계란 같은 몬스터를 여러 마리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과연…….’
한 마리당 한 발씩 맞춘다고 하면 스킬을 여러 번 날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네.’
미미는 이 훈련시설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를 실행시켰다.
메하니카 열 마리 등장.
-위험한 단계의 훈련입니다. 충분한 준비를 한 뒤에 실행할 것을 추천합니다.
“됐고, 시작하자.”
‘노력’의 발동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쓸데없는 메시지를 볼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훈련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
다시 밀림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몬스터의 크르릉 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성가시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열 마리나 되는 몬스터의 움직임을 시력으로 감지하려고 하면 비효율적일 것이므로.
‘온다!’
나는 보지도 않고 좌측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뻐억!
“꾸엑!”
두 번째는 후방, 그다음은 오른쪽.
전면에서 한꺼번에 달려오는 두 마리 몬스터는 양 주먹을 뻗어 날려버렸다.
빠아악!!
“꾸엑!”
“꿱!”
‘핵주먹’이 양손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훈련 완료 시간 05초.
-더 높은 단계의 훈련을 추천합니다.
이 이상 선택할 수 있는 단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앵무새 같은 결과를 출력했다.
개발자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몬스터가 등장하는 시간에 딜레이가 있어서 그렇지, 만약 한꺼번에 등장했다면 먼저와 같이 1초 만에 훈련이 끝나고 말았으리라.
나는 이 시설이 내보낼 수 있는 최고난도의 훈련을 ‘노력’의 발동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
스킬 유지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훈련 시간은 딱 8분.
딜레이된 시간을 제외하고도 10분이 넘지 않았다.
스킬 효과가 사라지자 어마어마한 귀찮음이 찾아왔다.
“쉬러 가자.”
“넵!”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나는 이 8분간의 훈련으로 ‘핵주먹’ 레벨 150을 달성했다.
38
미나는 다음날 오전 호텔로 찾아왔다.
두 눈이 퀭한 걸 보니 밤을 새운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것도 그냥 새운 것이 아니라 보구를 완성하느라 온종일 높은 집중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등뼈를 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완성하다니. 인간의 실력이 아니구나.’
역시 역사상 최고의 장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혼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미나가 설명했다.
“이번에는 재료만 하나 추가한 것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어요. 게다가 기억을 각성한 뒤로 기술도 많이 늘었고요.”
그렇게 말하고 불평하듯 덧붙였다.
“공용 공방에서 작업하려니 엄청 불편해요. 같지도 않은 실력을 가진 것들이 내 쪽만 쳐다보고 ‘우와.’ ‘우와.’ 해대는 데, 어찌나 귀찮았는지.”
실력이 출중한 사람을 보고 감탄한 것뿐일 텐데 ‘같지도 않은’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역시 미나는 싸가지가 없었다.
싸가지가 없어도 실력이 출중하고 내게는 고분고분하니 뭐라 할 건 없지만.
나도 각성 판정을 받을 때 시선을 한몸에 받아 불편을 겪었던 바가 있으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미나는 완성품인 ‘지배자의 손아귀’를 꺼냈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저 재료만 하나 추가했을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단순히 그렇게 보기에는 이전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오른손뿐이었던 장갑이 왼쪽까지 한 쌍이 되어 있었으니까.
몬스터의 등뼈가 하나 추가되었는데 정교한 장갑 한 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재료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공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아이템 제작기술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놀라움 그 자체다.
이는 현재 지구인의 과학 수준으로는 밝혀낼 수 없는 고차원의 기술이겠지.
우주선을 날리는 정도로 만족할 게 아니라 지구의 과학기술은 앞으로도 어마어마하게 발달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무기를 두 개 만들 수 있는 건가?”
일차원적이기는 해도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답은 그것뿐이었다.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장갑이 한 쌍이 되었으니 무기 개수가 하나 늘어났을 거라는 게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내 말을 들은 미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맞은 말씀이지만요.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추가되었어요.”
“그게 뭔데?”
나는 질문을 하면서 장갑을 끼었다.
한 짝만 있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내 손에 딱 들어맞는 보구라는 생각이 든다.
장갑을 끼었다고 해서 불편한 느낌은 전혀 없고, 오히려 내 마나와 호응하여 두 손이 편안해졌다.
“싸울 때 공격용 무기만 있으면 좀 아쉽지 않겠어요?”
“응?”
나는 그렇게 반문했다가 무언가가 떠올라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생각한 것을 시험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양손 장갑에서 부우웅-소리가 나며 둥그런 막이 형성되었다.
방패.
완성된 ‘지배자의 손아귀’에는 방어용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