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레벨 업 메시지가 쭉 떠오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온몸이 무기력함에 휩싸였다.
그 이유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킬의 효과가 바닥난 것.
“아, 이게 뭐냐…….”
나는 온몸을 덮고 있는 시퍼런 몬스터의 피와 그곳에서 풍겨오는 썩은 내에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왔다.
집에 가서 침대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돌아갈 집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짜증이 솟구쳤다.
“아오!”
과연 ‘이피누스의 등뼈’ 하나를 얻자고 이 고생을 한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냐를 두고 생각할 때 내 기준에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뭐, 나 때문에 출현한 S급 몬스터를 인명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사냥했다는 것은 나름 잘한 일 같지만.
‘그나저나 이거 기록 아닌가?’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S급 몬스터를 사냥한 것.
그리고 사냥에 걸린 시간도 역대 최단 시간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그것을 기록하고 상이라도 주지 않는 한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윙윙대는 소리가 나서 허공을 보았더니 수십 대의 드론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제길.”
가만히 서서 쉴 시간조차 없구나.
방송국 입장에서도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드론이 도착하기도 전에 S급 몬스터가 사냥된 것이니까.
아니, 이것은 이것대로 화제가 되려나?
화제의 현장에 있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두 발을 뽑아내어 미끄러지듯 이피누스의 등판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내려서자 아쉬운 얼굴로 이피누스를 바라보고 있는 미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 그냥 두고 가려니 아쉽네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몬스터의 사체였다.
S급 몬스터 사체를 팔면 대체 얼마를 벌 수 있을까?
유튜브 같은 곳을 찾아보면 비공식적인 기록이 있겠지만 그것을 찾아본다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이었다.
별로 관심도 없고.
미미는 이미 내가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람바스와 오랫동안 같이 생활한 그녀이니만큼 그것은 조건반사 같은 반응이었다.
“왈! 왈!”
파프리카도 어느새 귀여운 강아지로 돌아와 있다.
“얼른 가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문득 정면에서 육중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뭐지? 몬스터는 분명히…….’
이피누스에 뒤지지 않는 위압감.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단번에 이름이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매우 익숙한 생김새였다.
“아…….”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낸 것은 기억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내 앞에 ‘사도 도감’이 펼쳐졌기 때문.
이름 : 오성택
빙의된 영혼 : 카날리스
등급 : S-7
설명 : 서열 27위 사도. 비교적 낮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27위라는 높은 서열을 차지한 것은 비열하고 잔악한 성품 때문이다. 본성을 각성하기 전에 1초라도 빨리 죽여야 한다.
하루도 아니고 1초라도 빨리 죽여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인상을 왕창 찌푸려야 했다.
사도 카날리스가 자행한 만행들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재생되었기 때문에.
이석두-정확히는 그에게 빙의한 부페르-가 했다는 짓거리들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내 몸을 덮고 있는 몬스터의 피가 더 역하게 느껴진다.
그때 누군가가 내 팔짱을 꿰었다.
그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파프리카가 안겨 있었다.
“나중에요, 주군. 그리고 이피누스의 사체를 얻을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딱히 지금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내게 떠오른 기억으로 미루어 놈이 수천 번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악마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보다 내 게으른 본성이 먼저였다.
이피누스를 사냥하느라 체력을 소진한 마당에 또 다른 사도와 싸우다니.
내 사전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빠르게 현장에서 벗어나자니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이 사도의 것이라고 생각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33
미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공원이었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S급 몬스터 출현으로 대피가 이루어진 마당이니 더욱 조용했다.
“일단 씻는 게 좋겠어요.”
그것은 나도 동감이다.
샤워는 귀찮아서 싫어하지만 이피누스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은 몹시 찝찝했다.
공원에는 음용 식수대 하나가 있었다.
여기서 물을 마실 일은 없겠지만 몸을 닦는 용도로 쓰기에는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수도꼭지가 위를 향해 있고, 그나마 하나밖에 없어서 세 명이 씻는 일 자체가 몹시 힘든 일이 될 듯했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미미가 먼저 물을 틀었다.
그리고 콸콸 흘러나오는 물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울컥울컥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물줄기.
그것은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북적북적 몬스터의 피를 닦아냈다.
“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스킬이다.
전투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둘째 치고 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혹시 미미는 이 스킬로 람바스의 몸을 씻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람바스가 샤워를 싫어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니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나는 람바스를 씻어주는 미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과연 그녀가 람바스와 단순한 동료 관계였을지 기억을 다시 한번 뒤져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미의 스킬로 내 몸은 깨끗하게 씻겨졌다.
공원 식수대에서 씻은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몸에 물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몸을 씻고는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냈다.
자기 옷을 꺼내 입을 줄 알았더니 깔끔하게 다림질된 남성용 셔츠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어?”
역시 준비성 하면 미미.
이미 나는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상의 추리닝은 아까 이피누스와 싸울 때 버렸으므로 내 상체는 알몸인 채였다.
여기가 동남아시아도 아니고 윗몸을 드러내고 돌아다닐 수는 없으므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가 건넨 셔츠를 입었다.
어느새 세련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뭘 입어도 모델 포스가 풀풀 난다.-미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갈까요?”
“어디로?”
돌아갈 집이 없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또다시 우울해진다.
“사냥을 했으니 쉬어야죠. 호텔로 가요.”
“아…….”
생각해 보니 꼭 쉴 장소가 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다 보니 떠올릴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나저나 미녀가 먼저 호텔로 가자는 말하니 자극적이구만.
그동안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벌어들인 돈이 있으니 호텔 투숙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을 터였다.
34
호텔에 체크인하는 데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파프리카와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 문제는 약간의 기지를 발휘해 해결했다.
나와 미미가 먼저 방을 잡고, 나중에 나로 변신한 파프리카가 따로 들어오는 것.
직원이 약간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지만 파프리카의 모습은 나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똑같았으므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보는 사람까지 무기력하게 만드는 내 썩은 눈은 매우 인상이 강하다.
상대방이 헷갈려서 혼동할 염려가 없다고 할까?
미미는 당연하다는 듯이 호텔 방 하나를 잡았다.
그녀로서는 내 수발을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 것 같지만, 호텔은 어차피 직원들이 청소며 빨래며 다 해주지 않나?
뭐, 나로서도 미미와 같이 있는 것이 싫지 않으니 딱히 딴지를 걸 일은 아니지만.
‘와, 좋구나…….’
호텔 방에 투숙하는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미미가 잡은 호텔 방은 오성급이었다.
파프리카까지 세 명이 투숙할 것을 감안해 방도 꽤 큰 것으로 잡았다.
‘좁아터진 자취방에 만족할 게 아니었구나!’
전에 미미가 내게 속삭였던 말들이 생각났다.
게으름에도 스케일이 있다는.
돈을 버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일단 벌고 나면 훨씬 쾌적한 Lazy Life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인 듯하다.
나는 널따란 침대에 풀썩 뛰어들어 몸을 눕혔다.
“좋구나!”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35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번에도 잠에서 깬 나를 맨 먼저 맞이한 것은 레벨 업 메시지였다.
이제 꽤 레벨이 높을 텐데도 변함없이 네 개나 한꺼번에 오른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마 이번에는 힘든-객관적인 기준에서 결코 어려운 사냥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처음으로 고전 비스무리한 것을 경험한 사냥이었다.-사냥을 하고 난 뒤의 초과회복 효과가 반영된 것 같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무척 개운한 것을 보니 꽤 장시간 숙면을 취한 듯했다.
“주군.”
“앗,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육성을 내서 놀라고 말았다.
S급 헌터를 놀래키다니 제법이로구만.
목소리를 낸 것은 내 침대맡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미녀라는 점은 똑같지만 미미와는 타입이 다르다.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미나.
공방에서 찾아낸 내 세 번째 부하이자 동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장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앳된 소녀이지만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마 꼬장꼬장한 성격의 노인이 아니었을까?
예쁜 용모의 지금 모습과 매치가 되지 않기는 하지만 적어도 성격은 그것과 유사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매우 초조해 보였다.
차마 나를 깨우지는 못하고 꽤 오랜 시간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다.
“너 여기에 얼마나 있었어?”
“음…… 주군이 호텔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왔으니까 한 열두 시간쯤 된 것 같네요.”
“……설마 내 침대에서 쭉?”
“아니, 설마요. 밥은 먹었죠.”
밥.
밥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내가 깨어난 인기척을 느꼈는지 미미가 소리쳤다.
“주군~ 룸서비스 시킬게요~”
“오케이! 굿!”
음식도 방으로 직접 가지고 오게 할 수 있다니, 호텔이란 알면 알수록 좋은 곳이구나.
이왕이면 거처를 옮기지 않고 여기에 쭉 눌러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짓는 내게 미나가 초조함을 담아 다시 한번 말했다.
“주군.”
“응? 뭐 필요한 거 있어?”
밥 먹는 시간만 제외하고 쭉 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거, 가지고 계시죠?”
“그거?”
“이피누스의 등뼈요.”
“아아~”
나는 왜 미나가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천성이 장인인 그녀는 ‘지배자의 손아귀’를 완성할 생각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깨우지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로서는 흉내 내기 힘든 열정이다.
“여깄어.”
나는 인벤토리에서 냉큼 ‘이피누스의 등뼈’를 꺼내주었다.
“그리고 그것도요.”
그녀가 ‘그것’이라고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지배자의 손아귀’도 꺼내어 건넸다.
표정이 확 밝아지는 미나.
“다음번 보구는 언제 만드실 거예요?”
‘윽!’
다음 보구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모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건 천천히 생각하자,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