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미나는 파프리카 때처럼 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별일이네. 이딴 구멍가게에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달라고 오는 사람도 있고.”
“어허! 여기가 왜 구멍가게야? 매출이 급성장하고 있는 엄연한 유망공방인데!”
주인이 말하자 미나가 팍 인상을 구겼다.
“그게 누구 덕분인데요? 사장이 직원보다 실력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덕분에 만날 내 일감만 밀리고 말이야. 그것도 하찮은 일감들.”
“크흠. 어떻습니까, 손님. 저희에게 제작을 맡겨주시겠습니까? 얘가 입은 좀 험해도 실력이 아주 좋거든요. 분명 만족할 만한 물건을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뭐…….”
내가 대답하려는 찰나에 미나가 주인을 혼내듯이 말했다.
“이 아저씨가 뭘 모르시네. 이런 물건은 손님이 아니라 우리가 부탁해야 하는 거예요. 장인으로서 이런 무기를 제작할 기회가 인생에 몇 번이나 올 거라고 생각해요? 얼른 손님한테 사과하고 제발 제작을 맡겨달라고 하세요. 물론 공짜로.”
“뭐?”
미나의 말은 듣는 나도 어이가 없었다.
훌륭한 물건을 제작하면 장인으로서 실력과 긍지가 는다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공짜로 일을 맡겠다니.
그것도 사장한테 대신 사과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 본다. 개념이 없다는 경지를 넘어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사장이 울그락붉그락해진 얼굴로 씩씩거리자 미나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해하세요. 동네 구멍가게 사장이 다 그렇죠, 뭐. 이 일은 제가 맡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재료는 가져오셨죠? 제 인벤토리에 옮겨주시고 연락처 남겨주시면 제가 제작을 마친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공방 방문은 뜻밖의 전개로 마무리되었다.
뭐, 돈이 굳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지만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공방을 나오면서 등 뒤로 사장과 미나의 티격대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로 파악건대 사장이 미나를 이겨 먹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아마 미나 덕분에 매출이 바닥이었던 공방이 급성장한 모양이니까.
사장으로서는 위가 쓰린 것을 감안하고라도 미나를 잡아두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투덜대는 것이 전부.
나는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아 미미에게 물었다.
“왜 미나는 바로 각성을 하지 않았지?”
“아마 사람마다 각성 포인트가 달라서일 거예요. 제 생각엔 미나는 장인이니까 아이템을 제작하면서 기억이 깨어날 확률이 큰 거 같아요.”
“그 말은 굳이 내가 여기 올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잖아?”
“에이~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미래의 부하에게 미리 눈도장도 찍어두면 좋은 거죠, 뭐.”
30
8일 동안이나 연속해서 사냥을 했더니 내 안에 뭔가가 근본적으로 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이 좀 무료하다는 생각이 든 것.
‘‘노력’을 써 볼까?’
마냥 시간을 죽일 바에야 5분을 투자하여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를 자주 사용해서 레벨을 올린 것처럼 ‘노력’도 자주 사용하면 레벨이 오를 테니까.
이른바 선순환이다.
그런 생각으로 ‘노력’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더니 불끈 지난날의 기억이 휘몰아쳤다.
발딱 몸을 일으키고 미미에게 말했다.
“미미, 수련하러 가자!”
“오! 좋은 생각이에요, 주군!”
“왈! 왈!”
31
공방에 레시피를 맡기고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 후로 하루 5분씩 ‘노력’해서 ‘핵주먹’의 레벨을 120까지 올렸다.
100 이후로 레벨이 잘 안 오르길래 이게 끝인가 싶었는데, 몇 번 더 주먹을 내지르자 거기서 또 레벨이 올랐다.
100이 일종의 경계로 작용하는 듯 스킬의 위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매일 사용한 덕분에 ‘노력’ 레벨도 4가 되었다.
유지시간은 8분.
드디어 공방으로부터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무기가 완성되었으니 가지러 오라고 한 것.
“잘 다녀와.”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에야말로 미나가 각성할 수도 있어요. 당연히 주군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음.”
에잇, 젠장.
귀찮을 땐 역시 ‘의지’다.
부와아악!
“뭐해? 빨리 가지 않고!”
32
공방에 들어가자 처음과 달리 사장은 우리를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골이 난 표정으로 홱 등을 돌린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미나가 말했다.
“일주일 동안 이걸 만드는 데만 몰두했어요. 누가 레시피를 생각해냈는지 정말 놀랍네요.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은가 봐요.”
응, 그거 네가 만든 거야.
네가 역사상 최고의 장인이었대.
미나는 경이가 담긴 태도로 테이블 위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내 감상은 조금 복잡했다.
‘뭐야, 이게?’
람바스가 사용했던 보구(寶具).
미나 역시 서두를 장황하게 늘어놓아 큰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한 짝의 장갑이었다.
“이게 무기라고?”
나는 미미를 돌아보았다.
실망한 내 얼굴을 보고 그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에이~ 눈으로만 판단하시면 안 돼요. 직접 착용해 보면 아실 거예요.”
“그런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장갑을 오른손에 끼웠다.
곧장 장갑 안에 마나가 꽉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은은하게 빛까지 발했다.
[보구 ‘지배자의 손아귀’를 획득했습니다.]
‘오오…….’
보이는 것과 달리 거창한 이름이 붙은 장비였다.
“주군, 사용하고 싶은 무기를 상상해 보세요.”
“상상하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내가 생각한 것은 이 장갑을 끼고 ‘핵주먹’을 날리면 위력이 꽤 세겠다는 것뿐이었다.
우주 최고의 재능을 가진 먼치킨 람바스가 사용했다기에 어떤 대단한 무기일까 했는데 고작 장갑이라니.
나는 미미가 권유한 대로 한 가지 무기를 상상해 보았다.
지난번에 이석두가 사용했던 채찍.
그러자,
치이잉!
장갑 밖으로 기다란 마나가 뻗어 나왔다. 그것은 밧줄처럼 주욱 손밖으로 이어져 내렸다.
“어?”
이게 무엇인지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내 마나를 품은 장갑이 채찍을 만들어냈다.
나는 혹시나 하여 다른 무기를 상상해 보았다.
내가 상상한 대로 축 늘어졌던 마나가 빳빳하게 살아나 날카로운 검이 되었다.
“오!!”
먼치킨의 무기가 맞았구나!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마나양이 막대한 사람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내 성장에 맞추어 무기 또한 성장할 것이었다.
내 마나양이 늘어나고 강력해지면 거기 따라 무기도 강력해질 거니까.
“와아!”
내가 감탄하는 것을 보고 미나가 슬쩍 한숨을 쉬었다.
“근데 뭔가 좀 아쉬워요. 결정적인 게 하나 빠진 것 같은데. 그것만 있으면 더 완벽한 물건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멀찍이서 토라져 있던 공방 사장이 그 소리를 듣고 소리를 빽 질렀다.
“됐어! 뭘 더해? 일주일이나 다른 일 내팽개치고 돈도 안 되는 일에 매달려 놓고! 네가 여기서 공짜로 일하니? 진짜 살다 살다 너 같은 직원은 처음이다.”
“하아…….”
미나는 거기 대꾸도 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이걸 만들고 나니까 제가 하는 일이 더 하찮게 느껴지네요. 왜 내가 이런 데 처박혀서 장난감 같은 물건들이나 뚝딱거리고 있는 건지.”
“왈! 왈!”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파프리카가 있었다.
“와. 짜식, 귀엽네?”
잠시 파프리카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번쩍 시선을 들어 미미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도.
그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봤다.
그리고 나는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미미가 말했던 대로 기억의 각성이 일어나려는 모양이다.
잠시 먼 곳에 다녀온 듯 흐려졌던 그녀의 동공이 제빛을 찾았다.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주군!”
얘도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는구나.
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대단히 쑥스러운 장면이었다.
“응응, 알았으니까 빨리 일어나.”
미나는 감격스러운 눈으로-부담스러운 시선으로-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목에 걸고 있던 것을 벗었다.
“이것은 제가 주군 대신 맡아두고 있었던 거예요. 그냥 자연스럽게 레시피가 떠올라 만들기는 했는데, 제가 사용할 수 없었던 물건이죠. 이제야 이 물건의 주인이 주군이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동그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뭔데 그러지?’
겉으로 보았을 때는 좀 특이하게 생긴 목걸이에 지나지 않는다.
펜던트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보구 ‘운명의 목걸이’를 획득했습니다.]
‘응?’
이 또한 ‘지배자의 손아귀’처럼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보구란다.
나는 오늘 두 개의 보구를 한꺼번에 손에 넣은 것.
뜻밖에 얻은 목걸이를 만지작대고 있었더니 펜던트에서 밝은 빛이 분사했다.
동시에 공방 유리창을 통해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으아아악!
바깥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 일이래?”
공방 사장이 문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히이익! S급 게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