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9
나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A급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하지 못한 탓에 라면을 먹어야 했다.
‘그나저나 라면값도 꽤 나오겠는데?’
헌터가 된 뒤로 식욕이 왕성해진 바람에 먹는 양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차차 마나가 안정적으로 몸 안에 자리 잡으면서 확실히 전보다 배고픔을 느끼는 정도가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전처럼 하루에 한두 끼 인스턴트 식품만 먹고 살았다가는 살이 쭉쭉 빠지고 말리라.
미미야 그렇다 치더라도 파프리카 역시 조그만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많이 먹나 싶을 정도로 먹성이 좋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의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먹는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는다는 사실.
뭐, 옛날 조상들이 키웠던 잡종견은 늘 사람이 남긴 잔반을 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아지가 라면을 맛있게 먹는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우리 영리한 파프리카는 당연히 대소변을 잘 가렸다.
때가 되면 알아서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을 보고 나오곤 했는데, 나는 조그만 녀석이 어떻게 사람 사이즈에 맞춘 변기에서 일을 보나 싶어 슬쩍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때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파프리카가 나로 변신해 용변을 보고 있었던 것.
가만히 있는 나를 마주하는 것도 무서웠지만 내가 똥을 누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몇 배나 더 공포스러웠다.
나올 때는 다시 귀여운 파프리카가 되어 왈! 왈! 짖어대는 통에 트라우마는 곧장 사라졌지만.
“……연락은 끝내 안 오네.”
헌터관리소에서 내일 오전 중으로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점심을 먹은 뒤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미미 역시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늘 또 가봐야겠어요. 확인해 보니 어제 하루 동안에 많은 거래들이 정상적으로 처리됐어요. 우리만 따돌리고 있는 게 분명해요.”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미토스 사냥은 길드 라이온스가 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아미토스 사체를 돈으로 바꾼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을 막아야 할 동기가 있는 곳은 당연히 라이온스 길드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길드 이름이 뭐 이러냐? 라이온스라는 이름을 보고도 들어갈 마음이 생긴다는 게 웃기네.’
길드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는 탓에 라이온스가 어느 정도 위상을 가진 길드인지도 잘 모르겠다.
“진짜야? 또 가겠다고?”
나로서는 궁금증을 해결하겠다는 약한 동기로 굳이 헌터관리소까지 또 가려는 미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일주일쯤 더 기다려보고 움직여도 될 텐데.
약간 화가 난 듯한 그녀는 잽싸게 준비를 마치고 씩씩하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가자, 파프리카!”
“응. 잘 다녀와~”
이제는 라면을 먹든 맛있는 식사를 하든 별 관심이 없어졌다. 사람은 역시 적응하는 생물인가 보다.
하지만 미미가 문을 열었을 때 바깥에 낯선 그림자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전에 미미가 기척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빼고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더구나 문밖의 그림자는 상당히 커다랬다.
“안녕하십니까.”
굵은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더니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아미토스 사냥 때 하늘 높이 날려버렸던 라이온스의 대장.
그런데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
“실례했습니다. 저는 라이온스의 제2 분대장 이철두라고 합니다.”
이름이 이철두였군.
머리가 나빠 보이는 인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미미가 미간을 찡그렸다.
“남의 집 문 앞에 서 있다가 대뜸 자기소개를 하는 건 어느 나라 매너인가요?”
“크흠, 사실은 벨을 누르려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문 앞에 서 있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벨을 누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무슨 일로 오셨다고요?”
몬스터 사체 처리 문제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인지 미미의 말투가 평소보다 전투적이었다.
어쩌면 이 자가 라이온스 소속인 걸 알고 사체 처리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저는 오늘 형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조철웅 헌터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는 문 앞에 서 있었던 탓에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이름이 나온 탓에 귀찮음을 물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나한테요? 무슨 부탁을?”
추리닝 차림의 나를 발견한 이철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난 일이 생각났는지 표정에 노기가 드러났다.
“당신이 훌륭한 헌터라는 것은 알겠소. 나랑 한 번만 겨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당신 형의 부탁이라고? 그리고 대관절 당신 형이 누군데?”
“아니, 이것은 내 개인적인 부탁이오. 그리고 내 형은 길드 라이온스의 수장 이석두요.”
“뻔뻔하게 집까지 찾아와서 뭐? 한 번만 싸워달라고? 헌터가 깡패야? 그리고 나는 남의 사냥이나 가로채는 개념 상실한 길드 헌터랑은 볼일 없거든?”
귀찮기도 하고.
미친놈이 다짜고짜 집까지 찾아와서 싸움을 걸다니.
내가 거기 응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뭐요? 듣자 듣자 하니까 말이 너무 심하구만! 그리고 왜 아까부터 반말하는 거야?”
“당신이랑 나는 서로 존대를 할 만큼 유쾌한 사이가 아니야.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말 있으면 반박해 보시든가. 남의 사냥 가로챈 건 사실 아니야? 그런 양아치 짓이나 하는 길드원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떠들어?”
“으윽!”
입으로는 꽤 심한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내 태도는 여유만만했다.
이미 한번 날려 보낸 적이 있는 만큼 이철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말하자면 어른이 초등학생을 꾸짖는 심정이라고 할까?
물론 놈들 때문에 라면을 주구장창 먹고 있고 미미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짜증도 났다.
“너 이놈……!”
자존심을 내세우려면 실력이라도 있든가.
나는 귀찮음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됐으니까 그만 가세요~~”
등을 돌려 침대로 돌아가려던 내 귀에 미미의 예상 못 한 한마디가 박혔다.
“주군, 죄송하지만 이 대결, 저를 위해 받아 들여주실 수는 없나요?”
‘으잉?’
솔직히 이철두 정도라면 미미 혼자서도 충분히 데리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내 성격을 뻔히 알면서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게 이상했다.
‘뭔가 또 꿍꿍이가 있구만…….’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이철두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나?’
미미는 라이온스에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귀찮은데…….”
“주군~~ 한 번만요. 네?”
“왈! 왈!”
파프리카는 영문도 모르고 옆에서 짖었다.
하긴, 이철두 이 작자는 싸워주지 않으면 남의 집 앞에서 밤이라도 새울 기세였다.
큰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작은 귀찮음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 또 발생했군.
“정 그렇다면…….”
“와! 주군, 감사해요!”
20
그리하여 나와 이철두는 싸움을 하기 위해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이게 과연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냐 하는 황당함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분위기에 휩쓸려 승낙해 버렸다는 후회가 훨씬 컸다.
‘아, 귀찮아…….’
솔직히 이철두는 내 상대가 아니다.
상대도 헌터인데 그 차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덤벼든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에 하늘을 날았던 걸로 부족했나?
물론 오늘 이 대결을 제안한 것은 그때의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고지식한 인물에게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치욕일 테니까.
“오늘 나한테 지면 언론에 공개 사과하고 아미토스를 사냥한 건 라이온스가 아니라고 밝히세요.”
“음……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젭니다.”
어휴.
별 그지 같은 놈이 싸우재서 받아줬더니 간단한 조건 하나를 안 받아들이네?
이철두는 자기가 생각해도 염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겸연쩍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님께 얘기는 해보겠소.”
“음.”
나는 추리닝에 손을 꽂은 채로 말했다.
“덤벼요. 빨리 끝내게.”
이철두는 싸움을 앞두고서는 태도가 상당히 신중해졌다.
내가 추리닝 차림인데 비해 그는 외투 아래 헌터 장비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한 수 배우겠소.”
배우기 전에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다행이라면 평일 오전이라 공원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 큰 성인 두 명이 공원에서 싸운다면, 거기다 그 사람들이 헌터라면 신고가 들어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이철두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의 몸 위로 넘실넘실 특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대목에서 나는 뭔가 특이한 감각을 맛보았다. 몸이 근질거리고 집중력이 상승하는 느낌이랄까?
이 고양감은 분명 몬스터, 각성수와 싸울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싸우는 상대가 달라서라기보다는 내가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는 기분이 든다.
정확히 말하면 헌터 레벨이 올라서 감각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귀찮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가슴속 밑바닥에서 나쁘지 않은 간질간질함이 올라왔다.
[특수능력 ‘분석’을 각성했습니다.]
뭐야, 이건?
‘조철웅’ 특능 세트를 얻은 뒤로 처음 보는 메시지다.
흘긋 미미를 돌아보았더니 그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설마하니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람바스는 미미를 지구에 보내면서 자세한 지령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 내가 탈선하지 않도록 잘 보살피라고.
나는 이미 특수능력 ‘조철웅’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따라서 이번에도 능력을 사용한다는 ‘의지’를 조금 발휘해 보았다.
“…….”
마나를 끌어올려 싸움을 준비하는 이철두의 모습이 이전과는 좀 달라 보였다.
그의 몸에 코팅된 마나, 그리고 꽉 쥔 주먹 등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가 예측되었다.
‘혹시…….’
‘분석’이라는 것은 람바스의 전투경험을 일깨우는 스위치 같은 걸까?
내게 부족한 점을 보완시키기 위해 이런 능력을 심어둔 건가?
이철두가 움직였다.
예상대로 그는 완력을 활용하는 타입이었다. 다짜고짜 나를 향해 달려들더니 마나가 응축된 묵직한 주먹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확실히 작정하고 날린 주먹이라 예사롭지 않은 마나가 담겨 있었다.
약간이지만 피부에 아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물론 나는 주먹이 닿기 전에 한 발 옆으로 내디뎌 그것을 피해냈다.
여기서 반격을 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한 이철두의 공격을 마주하다 보면 왠지 도움이 되는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쩌엉!
찌어어엉!
이철두는 막무가내로 주먹질을 했다.
얼핏 빈틈이 많아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상대가 당황할 수 있는 패턴이었다.
50퍼센트의 확률로 반격할 수 있지만 10퍼센트 확률로 주먹에 얻어맞는다면 그게 오히려 손해라고 할까?
‘기백이 장점이네.’
동시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백이 필요하다는 것은 곧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요리조리 스텝을 밟으면서 이철두의 주먹을 피해냈다.
이철두는 지치지도 않는지 묵직한 주먹을 계속 날렸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눈빛이 호랑이처럼 빛났다.
“우리야압!”
쩌어어어엉!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력한 주먹이 뻗어졌다. 몸 전면에 거친 마나를 뿜고 있었으므로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지이익-
나는 주먹이 내질러진 방향으로 죽 밀려났다.
하지만 대미지를 정면으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머니에 꽂혀 있던 한 손이 꺼내졌을 뿐이다.
손바닥으로 이철두의 궁극기를 받아냈다.
분석이 끝남과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핵주먹(Lv 1)’을 획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