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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14화 (14/160)

▣ 14화

“전부는 아니에요. 대부분의 헌터는 더미니까요.”

미미가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내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아…….”

먼치킨이면 뭐하냐?

짊어진 게 이렇게 큰데.

그냥 다 내려놓고 쿠바에 가서 모히토나 들이키고 싶은 기분이다.

미미는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차근차근 하나씩 하시면 돼요. 저에게 계획이 있답니다.”

‘물론 그러시겠지.’

그녀는 파프리카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알려주었다.

“주군, 눈을 감아보시겠어요?”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았더니, 놀랍게도 깜깜해야 할 시야가 여전히 확 트여 있었다.

시점도 방바닥에 있던 것보다 높아졌다.

‘설마 이거…….’

“왈! 왈!”

눈을 감으면 변신한 파프리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거구나.

정말 녀석과 나는 영혼이 깊게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뜨고 파프리카에게 말했다.

“다시 돌아와.”

팟!

조그마해진 파프리카가 쪼르르 내 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정말 나로 변신한 파프리카를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내가 그렇게 썩은 생선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니 충격이다.

근성을 발휘해 눈빛을 바꾸는 대신 가급적 거울을 보지 않기로 했다.

17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다음날도 같은 메시지와 함께 눈을 떴다.

‘왜 어제보다 하나 늘어난 거지?’

설마 각성수 분양소에 가서 돌멩이를 몇 개 던졌다고 그런 건가?

어느덧 내 레벨은 S급 24가 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이 오지는 않지만.

오늘은 반갑게도 내가 외출을 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 헌터관리소로 가려고 준비 중인 미미와 파프리카를 배웅했다.

“잘 다녀와~”

“네, 주군.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왈! 왈!”

미미가 내 집에 들어온 지는 불과 며칠 되지 않지만, 그녀와 종일 붙어 있었던 탓에-그녀만 한 미녀와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새삼 믿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게 따지면 S급 헌터로 각성한 것이 훨씬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부쩍 허전하게 느껴졌다.

게으름뱅이가 남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것은 역시 내가 람바스의 기억을 이어받았고, 람바스 또한 자신의 부하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람바스라는 놈은 알면 알수록 그리 나쁜 놈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미미나 파프리카 같은 훌륭한 부하들이 충성을 다해 보좌했겠지.

굳이 지금부터 눈을 감고 파프리카의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볼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그러자 대뜸 화면에서 익숙한 배경이 흘러나왔다.

-어제 오전 각성수 분양소에서 발생한 사고로 분양소 사장 김모 씨가 사망했습니다. 이 사고는 각성수 관리 소홀로 발생한 것으로 보여지며…… 각성수 간의 싸움이 벌어져 상황이 확대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현장 분석 결과 각성수들의 사체가 해체되어 있었던 것은 미스터리한 일이며 이는 앞으로 더 조사를 해보아야 할 사건으로…….

조사하지 마!

TV에서 나오고 있는 사건 현장은 당연히 우리 동네 분양소였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로 인터뷰를 한 직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단순한 대답만 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아 나와 미미, 그리고 파프리카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꼭 그의 입을 통하지 아니더라도 조사 과정에서 어떤 게 밝혀질지 모를 일이었다.

“으윽!”

TV에서는 급기야 사고 발생 시 녹화되었던 CCTV 영상이 흘러나왔다. 화질이 고르지 않고 중간중간 끊겨 있어 깔끔하지 않은 영상이었지만, 파프리카가 다른 각성수들과 싸우는 장면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자이크 투성이인 그 영상 속에 나와 미미의 뒷모습도 스쳐 지났다.

‘으악!’

파프리카를 얻은 기쁨이 너무 컸던 나머지,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제발 이 일이 크게 비화하지 않고 묻히기를 바랄 뿐이다.

답답한 마음이 들어 TV를 꺼버렸다.

그러자 바로 미미에게 핸드폰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군, 관리소 도착했어요!

굳이 파프리카와 나란히 서서 인증샷까지 찍어 보냈다.

뭐, 똘똘한 미미와 킹 오브 각성수인 파프리카 둘을 보냈으니 안심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직접 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일을 그르쳤을 경우 불편은 내가 감당해야 했으므로 중계는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따로 할 일이 없기도 했고.

방금 TV로 보았던 불편한 영상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나는 침대에 몸을 눕힌 상태로 눈을 감았다.

미미는 관리소 직원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직원은 내가 각성 판정을 받을 때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나로 변신한 파프리카를 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뭐야? 왜 저렇게 당황하지?’

딱히 미미와 파프리카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직원이 보인 태도가 수상쩍었다.

물론 각성 판정을 받았던 날을 떠올리면 내가 지나치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했지만.

오래지 않아 안쪽에서 중년 남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기름기가 번질번질한 얼굴이 전혀 신용이 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곳 소장 최구호라고 합니다. 각성 판정을 받으신 지도 얼마 안 되셨는데 벌써 등급 판정을 받으러 오셨다고요?”

“네, 우리 오빠가 워낙 재능이 뛰어나서요.”

최구호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미미를 바라보았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신지…….”

미미는 대답 대신 자신의 가짜 라이선스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최구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A급 헌터셨군요! 두 분 다 선남선녀십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세요! 허허허!”

뭘 오해하고 자빠졌냐?

물론 내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오해는 아니었지만.

미미는 얼굴을 붉혔다. 파프리카를 주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빠라고 부른 부분은 칭찬해야겠지만 지금은 명백히 사심이 들어간 반응이었다.

내 팔짱을 끼고 부끄러워하는데 감각까지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유감이었다.

“자질이 있다면 기간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서 검사를 받으러 가시죠!”

나는 왜 내 등급 검사를 받는데 소장까지 나와서 관심을 갖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매우 불편하고 귀찮게 여겨졌다.

비록 몸은 집에서 편하게 누워 있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직접 안 가서 정말 다행이야.’

최구호에게는 분양소 김 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독한 스킨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각성 판정과는 달리 등급 판정은 훨씬 심플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커다란 기계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기계가 이것저것 측정하여 결과를 내는 시스템인 것 같다.

아마 마나나 신체 능력 따위를 종합적으로 측정하지 않나 싶었다.

나로 변신한 파프리카가 기계에 앉자 최구호는 흐뭇한 얼굴로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왜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냐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직원의 말에 희희낙락하던 최구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C급입니다.”

“뭐? 제대로 측정한 것 맞아? 다시 검사해봐!”

직원에게 윽박지른 그는 파프리카와 미미에게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미숙해서 실수를 저질렀나 봅니다. 다시 측정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대로 판정하신 것 같은데요?”

미미가 말했지만 최구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왜 내 등급이 C급 이상일 거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 높은 등급이 안 나오면 본인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흠…… 그런 건가?’

지난번에 내가 각성 판정을 받으면서 일으킨 소요.

근력 측정기를 망가뜨리고 러닝머신에서는 멋대로 내려온 다음, 심지어 B급 각성자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물론 막대가 직접 몸에 닿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내게 기대를 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S등급 각성자가 나온다면 본인의 커리어에도 유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안 가기를 천만다행.’

이렇게 간접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인데, 직접 그 번들번들한 얼굴을 마주했다면 몇 배나 더 짜증스러웠을 것이다.

재차 검사를 해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C급이십니다…….”

직원은 앞서 소장이 윽박질렀던 탓에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최구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확실해?”

“네…… 이제까지 한 번도 오작동하지 않은 장치입니다.”

“에잉~~”

최구호는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검사실을 나가버렸다. 아까와는 달리 미미와 파프리카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유, 꼴 좋다. 왜 남의 일에서 떡고물을 얻으려고 하는 거야?’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어쨌든 C급 라이선스를 받으러 간 미미와 파프리카의 미션은 석세스!

나는 눈을 떴고, 곧 미미가 보낸 또 한 장의 인증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방금 발급받은 따끈따끈한 C급 라이선스 사진을 찍어 보냈다.

내 얼굴 사진이 들어간 부분에 입술을 내밀고 있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이제 사체를 돈으로 바꾼 다음에 장을 봐서 들어갈게요, 주군 ^^

장을 봐서 들어온다니 반가운 소리였다.

물론 라면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그녀가 만들었던 훌륭한 요리들이 그리웠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사체교환 창구에 가서 이야기하자 담당 직원이 어색한 얼굴로 난색을 표한 것.

“……죄송하지만 처리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일단 댁으로 돌아가 계시면 저희가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몬스터 사체는 바로 처리되는 것 아닌가요?”

미미가 따졌지만, 직원은 식은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금일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아마 다른 관리소로 가셔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돌아가 계시면 내일 오전 중으로는 꼭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석연치 않지만, 방법이 없었다.

미미는 내게 실망감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주군, 장은 내일 봐야 할 것 같아요 ㅠㅠ

내 기분도 ㅠㅠ다.

ㅠㅠ…….

18

최구호는 성난 얼굴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어디론가로 연락했다.

-여보세요?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상체를 확 숙였다.

“아이고~ 길드장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통화한 게 바로 어젠데 무슨 일이야 있었겠습니까? 무슨 일로 전화하셨지요?

“그게 그…… 조철웅 건 말입니다.”

-아!

거만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던 상대가 조철웅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태도를 바꾸었다.

-조철웅이 혹시 그곳에 들렀나요?

“네, 오늘 등급 판정을 받으려고 왔었습니다.”

-아! 벌써요? 그래서요? 어떻게 나왔습니까?

“그게…… C급이 나왔습니다.”

-뭐요? 확실해요?

“네. 두 번이나 검사했습니다. 한 번도 오작동하지 않은 기계라 아마 결과가 잘못 나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아…… 그랬군요. 쯥, 사체 건은 어떻게 하셨죠?

“말씀하신 대로 일단 보류했습니다.”

-잘하셨어요.

상대방의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최구호는 슬며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 제 딸아이 길드 가입 건은 어떻게 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최구호가 통화하는 상대인 라이온스의 수장 이석두가 웃음이 담긴 말투로 물었다.

-소장님은 조철웅이 정말 C급 헌터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 결과가 그렇게 나온지라…….”

-뭔지 몰라도 아마 술수를 썼을 겁니다. 등급을 조정할 수 있는 스킬 같은 게 거겠죠.

“죄송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데요. 등급이 높게 나오면 좋은 거 아닙니까?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아마 신비주의로 몸값을 올리려는 거겠죠. 아무튼 이 사실은 소장님과 저만 아는 겁니다. 다른 곳에 흘리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물론이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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