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차니즘 헌터-13화 (13/160)

▣ 13화

15

집에 돌아오는 길에 미미가 설명해 주었다.

“파프리카는 모든 각성수들의 상위존재예요. 이곳 말로 하면 ‘킹 오브 각성수’라고 할 수 있죠.”

“각성수들의 왕?”

“네. 파프리카의 어미는 저희 행성에서 수백 년 동안 상위존재로서 고고한 삶을 살아왔었어요.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고, 더구나 키운다거나 사냥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죠. 오히려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았어요.”

미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 행성이 사도들에게 점령당한 뒤로 놈들은 그런 신격인 존재를 사냥하려고 했어요. 단순히 유희로 말이죠. 그때 람바스 님은 놈들의 사냥을 막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는데, 도착해 보니 이미 어미는 사냥당한 뒤였어요. 그 품에 이 조그만 아이만 남아 있었던 거죠.”

“아…… 그런 사연이.”

본래라면 남의 일이라고 귀를 후볐을 테지만 내 귀여운 파프리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픈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람바스 그놈 게으름 피우다가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내가 람바스의 능력을 잇고 있는 만큼 남의 잘못 같지 않아서 가슴이 찔끔했다.

미미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말을 했다.

“람바스 님은 남의 부탁을 받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셨지만 맡은 일을 팽개칠 만큼 의리가 없는 분은 아니셨어요. 의뢰를 받고 곧장 그곳으로 가셨지만, 정보가 엇갈렸던 거죠. 그렇게 빨리 상위존재가 사냥당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도 했고요.”

“……그랬구나.”

그래도 람바스 성격에 각성수들의 왕의 새끼를 데려다 키웠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책을 느끼고 각성수들의 왕의 새끼를 수습했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미미가 계속 말했다.

“그곳에서 람바스 님이 본 것은 또 한 명의 자신이었어요. 마치 거울처럼 똑같은 사람이 거대한 짐승의 사체 속에 서 있었던 거죠. 파프리카는 어미의 죽음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람바스 님을 보고, 그리고 상위존재의 본능에 따라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람바스 님을 흉내 낸 거예요. 그때 람바스 님은 어떤 영감을 받으셨죠.”

영감…….

그렇다.

나도 방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언가를 떠올렸으니 람바스도 충분히 그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프리카는 단지 모습만 흉내 낸 것이 아니었어요. 람바스 님의 아우라, 존재 자체가 품고 있는 막대한 마나까지 더해서, 정말 그럴듯하게 람바스 님을 흉내 내었죠.”

나는 품에 있는 파프리카를 보면서 대꾸했다.

“맞춰볼까? 람바스는 자신이 해야 할 귀찮은 일에 파프리카를 대신 내보냈을 거야. 파프리카를 자기 대신 보내놓으면 자신은 계속 게으름 피울 수 있으니까.”

“네, 맞아요. 처음에는 그럴 생각으로 이 아이를 거두셨지만, 나중에는 깊은 정을 느끼고 진심으로 파프리카를 대하셨답니다.”

이제야 모든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 람바스가 귀찮은 애완동물 키우기를 하려고 생각한 것은 파프리카가 자신으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이용만 할 생각이었지만 나중에는 정을 느끼고 파프리카를 진심으로 아끼게 되었다는 이야기.

“왈! 왈!”

‘어떻게 안 그러겠어.’

이렇게 귀여운데.

내가 볼을 내밀자 파프리카가 할짝할짝 핥았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실제로는 아니었지만 파프리카가 보기에는 그랬을 수 있다.-냉큼 변신해서 적들을 물리쳤다.

그 충성심을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정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파프리카의 사진만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은 그런 람바스의 기억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테고.

‘그렇단 말이지.’

나는 쌀이 떨어졌다는 대화부터 시작된 ‘파프리카 거두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깨달았다.

바야흐로 지금은 돈이 떨어진 상태이고, 가지고 있는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해야 할 처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정식 라이선스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뒤 진짜 아미토스를 사냥한 것은 나라는 것을 밝히고 사체를 팔면 되겠지.

내가 직접 한다면 대단히 귀찮을 그 일이, 파프리카를 동원하면 그렇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프리카, 나를 위해서 변신해 줄 수 있겠니?”

“왈! 왈!”

16

“라면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미미가 끓이는 라면은 횟수가 더할수록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지난 일 년간 패스트푸드로만 연명한 나인 만큼 얼마든지 라면만 먹으면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굳이 지금 정식 라이선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주군, 혹시 라이선스 받는 걸 미루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응?”

뜨끔!

역시 오랫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람바스를 보좌해 온 여자다웠다.

“아, 아니. 따, 딱히 그,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걸?”

내가 딴 곳을 보면서 더듬대자 미미가 한숨을 쉬었다.

“주군이 그러시는 건 주군을 위해 변신을 하려는 파프리카의 마음을 배신하는 거예요.”

윽! 비겁하다!

귀여운 파프리카를 걸고 넘어지다니!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방안을 뒹굴거리며 놀고 있던 파프리카가 발딱 일어나 쪼르르 달려왔다.

무릎 위로 올라와 손등을 할짝할짝 핥는다.

“이 녀석을 배신할 수는 없지…….”

뭔가 미미의 술책에 자꾸 넘어가는 느낌이 들지만, 그녀가 알려준 교훈대로라면 귀찮은 건 오히려 빨리 해치워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주군, 주군이 라이선스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파프리카를 보내는 거예요.”

그렇지.

내가 직접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자 부담이 확 줄어들었다.

일단 프로젝트의 안정적인 성공을 위해서 나는 파프리카를 변신시켜보기로 했다.

“파프리카, 나로 변신해 볼래?”

“왈! 왈!”

밝게 대답한 파프리카가 내 무릎에서 내려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곧 녀석의 몸에서 밝은 빛이 분사했다.

“깜짝이야!”

누구냐, 이 추리닝 차림에 눈빛이 거멓게 죽어 있는 녀석은.

나에게까지 녀석의 게으름이 옮을 것 같아 슬금슬금 피하고 싶어진다.

왜 도플갱어를 만나면 곧 죽는다는 말이 있는지 알겠다.

눈앞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은 가히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미미의 말마따나 단순히 외형만 닮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자아내는 분위기를 똑 닮아 있었다.

그런 점이 소름 돋는다.

“등급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파프리카라면 A등급까지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원래는 더 나와야 정상이지만 변신을 하면 아무래도 능력이 제한되거든요.”

“등급까지 조절할 수 있는 거야?”

미미 대신 파프리카가 대답했다.

“왈! 왈!”

오, 좋네!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

C급 헌터 되기!

게다가 내 귀찮은 일을 대신해 줄 충견까지 생겼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C급이지!”

“네, 그렇군요.”

뭔가 딴지를 걸 줄 알았던 미미가 순순히 수긍했다.

“적에게 최대한 주군의 능력을 감추는 것은 좋은 전략입니다. S급 판정을 받으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게 될 테니까요. 지금 사도들이 주군을 노리고 덤벼들면 승산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파프리카 얘기를 들을 때도 나왔는데, 사도라는 게 대체 뭐야?”

미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천천히 이 행성의 모든 것을 지배할 거예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죠. 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에게 이곳을 통째로 바치려는 거예요.”

“신?”

귀찮은 이야기가 줄줄 나와서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당연히 내 장래와 깊은 연관이 있겠지.

“네. 그는 우주적인 존재예요. 최악, 최강의 악마죠. 람바스 님마저도 그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으셨으니까요.”

“음…….”

그렇군.

사도들과 신이라는 놈들은 행성을 하나씩 먹어치우는 엄청난 스케일의 작업을 하는 모양이다.

몬스터들을 동원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헌터는 뭐야? 내가 람바스의 유지를 이어 각성했다는 건 알겠는데 나머지 각성자들은 뭐지?”

“그들은 사악한 양동작전을 펼치는 거예요. 헌터들 틈에 사도들이 섞여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저급한 악마들도요. 람바스 님은 그들의 방식을 이용하기로 했어요. 같은 방법으로 지구인을 각성시키면 그들로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렇구나.”

이해 완료.

‘……?’

더불어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몬스터와 헌터랑 싸워야 한다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