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각성수에 대한 기억이 일부 깨어났습니다.]
[기억이 정리됩니다.]
[‘각성수 도감 I’을 획득했습니다.]
전에 몬스터 아미토스를 마주쳤을 때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각성수’라는 것이 달랐지만.
일어나는 현상도 똑같았다. 두꺼운 책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파라락 책장이 넘어가며 특정 페이지에서 멈춘다.
이름 : 폴클로로
등급 : A-9
특성 : 푸트발 행성에 서식하는 이 짐승은 강인한 근육을 바탕으로 근력, 스피드, 점프력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 한번 자극을 받으면 물불 안 가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약점 : 생존 본능이 강하여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섣불리 덤벼들지 않는다.
‘
무시무시한 놈이구나.’
강인한 신체에 근력, 스피드, 점프력까지 겸비했다니.
역시 짐승이니만큼 피지컬이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약점이라고 적힌 내용도 골치 아팠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덤벼들지 않는다고 하면 놈보다 약한 사람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다른 말로 하면 딱히 약점이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무척 유용한 내용이었다.
얼핏 반칙으로 보이는 이 약점을 나는 공략할 수 있으니까.
내게 엄청 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놈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귀찮으니까 이리 와라.”
내가 한 발 내딛자 놈이 한발 물러선다.
“움직이기 싫으니까 이리 오라고.”
“끼우웅~”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도 멀리 도망치지 않는 것은 나에 대한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겠지.
‘아, 진짜.’
이 놈을 어떡해야 하나? 장풍이나 레이저를 쏘는 스킬은 없으려나?
눈에서 빔을 쏘아 태워버리면 간단할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은 ‘노력’, ‘근성’, ‘의지’, ‘인내심’이 다였다.
나는 뭔가 던질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치에 보이는 것은 건물이 부서지면서 떨어져 내린 돌멩이들뿐.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고릴라에게 던졌다.
쐐액-
평범한 우산을 던져 A급 몬스터를 잡은 전력이 있는 만큼 내가 던진 돌멩이는 마치 포탄과 같은 기세로 고릴라를 향해 날아갔다.
펄쩍-
폴클로로의 순발력은 대단했다. 내가 뭔가 던지리라는 것을 알고 거구를 움직여 뒤로 한 바퀴 회전했다. 간발의 차로 돌멩이를 피해낸다.
이어서 날린 세 개의 돌멩이들도 모두 잽싸게 펄쩍펄쩍 뛰어 피했다.
“우끼! 우끼! 우끼!”
‘아, 짜증 나.’
물론 작정하고 던지면 못 맞출 것도 없지만 그 ‘작정’이라는 것이 내게는 무척 힘든 일이다.
그저 다 그만두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분양소 안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부산한 소리가 쿵! 쿵! 쿵! 나더니 폴클로로 못지않은 위압감을 지닌 짐승들이 튀어나왔다.
독수리, 사자, 악어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풍기는 위압감으로 폴클로로 못지않게 위험한 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각성수 도감’이 작동했다.
두꺼운 책이 튀어나와 책장이 넘어가려고 하길래 내가 말했다.
“들어가.”
책이 탁 덮이고 홀로그램이 쓱 사라졌다.
이렇게 많은 짐승들의 정보를 언제 다 확인하고 있겠는가? 귀찮을뿐더러 의미도 없다.
처음에는 파프리카를 위해 싸우려고 마음먹었지만 많은 수의 각성수들이 몰려들자 뒷골이 당겼다.
빨리 내게 산을 밀어버리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딴 놈들은 전부 순삭할 수 있을 텐데.
내게 쫄아서 눈치를 보던 폴클로로가 태도를 바꾸었다. 아마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들이 많아져서 기운이 난 모양.
덩치에 맞지 않게 얍삽하게 구는 모습이 참 재수 없었다.
그래도 내게는 잘된 일.
드디어 놈에게도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거니까.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놈들 쪽에서 먼저 달려든다면 땡큐다.
“꺄오오오오~~!”
폴클로로가 고릴라 주제에 타잔처럼 허공을 향해 목청을 울렸다. 이어서 발소리를 울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각성수들도 모두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오냐, 와라.”
이런 감각은 본능적인 것이다. A급 각성수가 떼로 몰려와도 내가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멍! 멍!”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운드는 친숙하지만 볼륨은 전혀 그렇지 않다. 헌터인 나도 고막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컸으니까.
거대한 개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대체 이 짧은 순간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
문득 개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치 이곳은 내게 맡기라는 듯 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개의 이목구비가…….
“파프리카?”
“멍! 멍!”
거대한 개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짖었다.
“아…….”
옆을 보았더니 방금까지 파프리카가 있던 조그만 우리가 부서져 있었다.
‘무슨 시추에이션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군.’
나는 전투를 위해 불끈 쥐었던 주먹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디 우리 파프리카, 얼마나 잘 싸우는지 한번 볼까?’
곧이어 기대 이상의 장관이 펼쳐졌다. 파프리카는 먼저 폴클로로에게 달려가-덩치가 더 클 뿐 아니라 스피드나 도약력에서도 앞섰다.-목덜미를 물었다.
“크르릉!”
고릴라의 목이 뜯기며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폴클로로는 자기 목에 손을 갖다 댄 채 힘없이 쓰러졌다.
한 방에 고릴라를 처리한 파프리카는 다른 각성수들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세 마리나 되는 A급 각성수들이 한꺼번에 움찔 몸을 떨었다.
슬금슬금 도망치려는 것을 잽싸게 따라가 한놈 한놈 숨을 끊어놓는다.
발톱으로 할퀴면 피부가 찢어지다 못해 몸통이 잘려나갔고, 물었다 하면 두꺼운 짐승들의 목이 뚝 부러졌다.
“와…….”
그 조그맣고 귀여운 강아지가 이렇게 변신하다니.
장하다! 우리 파프리카!
내 감정이 전해졌는지 파프리카가 기분 좋게 ‘멍! 멍!’ 짖었다.
여전히 고막이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듣기 좋았다.
‘이제 가볼까?’
이런 상황에 각성수를 사고 말고 할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데리고 유유히 사라지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옆을 보았더니 미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해체용 칼을 꺼내 들고 열심히 각성수들을 해체하고 있었던 것.
이 각성수들은 몬스터에 준하는 존재로 분류할 수 있을 테니 당연히 돈이 되겠지.
잘한다! 우리 미미!
얼굴 예쁘고 집안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생활력까지 강하다.
준법정신이 약한 것이 작은 흠이기는 하지만, 그녀 말마따나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이 지구의 법률을 연연할 필요는 없을 터.
기가 막힌 솜씨로 각성수를 해체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더니 누군가가 다가와 슬며시 말을 걸었다.
“저기…… 헌터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을 걸기 전부터 독한 스킨 냄새가 훅 코를 찔렀으니까.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미미의 각성수 해체쇼만 보고 있었다.
“저는 강아지가 변신할 수 있는 전투종인 줄 몰랐습니다. 이러면 또 계산이 달라지거든요. 헤헤. 더도 말고 딱 스무 배만 주십시오.”
나는 순간 골이 띵 울렸다.
인상을 쓰고 돌아보자 깜짝 놀란 주인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아, 네! 이해합니다. 갑자기 60억을 마련하기는 어려우시겠죠. 에잇, 인심 썼다! 우리 헌터님이 남 같지 않으니까 딱 50억만 받겠습니다. 이 정도면 완전히 거저예요. 아시죠?”
거저긴 거저다. 어떻게 우리 파프리카에게 가격을 매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장 놈이 말하는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각성수 폭주해서 망하려는 걸 막아주니까 이제는 돈을 내라고요? 뭐? 스무 배?”
내 말에 사장 놈이 정색했다.
짐짓 허리에 손까지 올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헌터님이 무슨 각성수를 막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엄밀히 말해 강아지가 변신해서 각성수들을 죽였고, 그 강아지의 소유권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아닌가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저 여자분이 챙기고 있는 각성수 사체도 저희 거니까 내놓으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아.
도망친 줄 알았더니 다 보고 있었던 건가?
뭐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닌데, 여기에서 내가 50억을 주고 파프리카를 사면 호구가 되는 기분이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파프리카가 나선 것도 엄밀히 말해 나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으으~ 귀찮아~~’
귀찮다 못해 살기가 흘러나왔다.
사장이 흠칫 놀라서 뒷걸음쳤다.
“어허! 이 사람이! 헌터가 사람 치면 가중처벌 받는 거 몰라? 사기 싫으면 썩 나가든가!”
그때였다. 재수 없는 사장 놈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카멜레온을 닮은 각성수 하나가 우적우적 사장 놈의 머리통을 입안에 넣고 씹고 있었다.
‘한 놈 남아 있었구나.’
등급이 낮고 체구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나를 향해 본능을 자극받았지만 덤비지는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팍!
갑자기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거니 카멜레온의 몸뚱이가 두 동강 났다.
해체쇼를 마친 미미가 돌아오는 길에 카멜레온까지 베어버린 것.
그녀는 살뜰하게 B급 각성수의 사체까지 수습했다.
“왈! 왈!”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와 아래를 보았더니 어느새 본래 사이즈로 돌아간 파프리카가 짖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배어 나오는 웃음을 머금고 녀석을 안아 올렸다.
“으이구~ 우리 귀여운 파프리카~ 오늘 잘했쪄요~”
칭찬을 들은 파프리카가 기분 좋다는 듯 내 볼을 날름날름 핥았다.
그러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분양소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그냥 가시라는 손짓을 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십시오~”
패닉에 휩싸였는지 평소에 하던 접객 멘트를 앵무새처럼 내뱉었다.
‘자, 그럼.’
나는 파프리카를 안고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을 얻고, 각성수 사체를 여러 구 챙겼으니 이 정도면 집 밖에 나온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왈! 왈!”
어엿하게 각성을 마친 파프리카가 내 품에서 기분 좋게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