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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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집을 치울 때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미미가 이근수의 체액을 닦을 때는 마스크는 물론이거니와 고무장갑까지 끼었다.
“윽, 적의 국물이다.”
국물이라니. 왠지 며칠간 국은 못 먹을 것 같다.
나는 미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거 엄청난 스킬 아니야? 람바스보다 네가 더 먼치킨 같은데?”
헌터의 각성 능력을 무효로 돌리다니.
곱씹을수록 믿을 수 없었다.
미미는 고무장갑 낀 손을 파닥파닥 내저으며 겸손해했다.
“에이~ 아니에요, 주군. 그 기술은 제약이 많답니다. 만약 빙의한 영혼이 각성자를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면 통하지 않고요. 각성자의 능력이 저보다 더 뛰어나거나 저항이 엄청 거셀 경우에도 통하지 않아요.”
“그렇구나.…….”
한 마디로 이근수가 떨거지였기 때문에 통했다는 얘기다.
뭐,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대단한 스킬이지만.
“어이쿠야…….”
하루 동안 많은 활동을 해서 피곤했다.
사실 헌터의 신체 능력을 가진 내가 이 정도로 피곤하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치 않은 일을 하는 바람에 정신적인 대미지가 쌓였다고 할까?
본분을 크게 저버린 기분이다.
람바스의 유지를 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내 사명일 터인데.
청소를 끝낸 미미가 마스크와 고무장갑을 벗었다.
“주군. 식사를 차리려고 하는데 마트에 다녀와도 될까요?”
“응. 잘 다녀와.”
나도 배가 고팠다. 지난 일 년간은 먹는 일도 귀찮아서 식사를 등한시했지만, 각성의 영향인지 허기짐을 느끼는 정도가 훨씬 세진 기분이다.
마트에 간다던 미미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조용히 내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
나는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쿠. 숙녀를 부끄럽게 하고 말았군.
하지만 굳이 몸을 일으켜서 지갑을 가지러 가기 귀찮았다.
지갑이 들어 있는 외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져가.”
“넵.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그나저나 참 편하구나. 각성했을 뿐 아니라 청소와 요리를 잘하는 부하까지 생기다니.
부하라고 부르는 건 미미에게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는 이상 그렇게 생각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멍하니 있다 보니 깜빡 잠이 들었다.
갑자기 귓속에 솔솔 따뜻한 바람이 들어와 퍼뜩 깨어났다.
“헉!”
“주군~ 일어나셔요~~”
미미가 내 귀에 바람을 집어넣고 있었던 것.
“왜 그렇게 깨워? 그냥 몸을 흔들면 되잖아.”
“람바스 님이 주무시고 계실 때는 항상 이렇게 깨웠는데…… 불편하셨군요…… 제 불찰입니다.”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 미미.
야, 네가 그러니까 내가 미안하잖아.
사실 귀에 바람을 넣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녀만 한 미녀가 귀에 입김을 불어 잠을 깨워준다는 것은 최상의 호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왕이면 앞으로도 계속해 주었으면 한다.
“아니야. 나쁘지 않았어.”
“정말요? 헤헤헤.”
배시시 웃는 미미의 얼굴이 새삼 예뻐 보였다. 요리하느라 입은 앞치마 때문에 새색시 같은 분위기도 풍기고.
나는 어쩌면 오늘 밤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꼭…… 그냥 잠들지 말아야지.’
딱히 뭘 하려는 게 아니라 미녀와 한 침대에 몸을 붙이고 눕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서 그런다.
물론 나도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지만 야시시한 경험이 많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
매일 아르바이트다, 학과 공부다, 바빠서 여자친구와 여유 있는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다.
정말 후회로 점철된 과거사로구나.
“오~~ 스멜~~!”
잠들어 있는 사이 완벽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내가 꾸물꾸물 밥상 앞에 앉자 미미가 지갑을 내밀었다.
“잘 썼습니다. 주군.”
“응.”
“그런데…….”
미미가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주군 통장의 잔액이 다 떨어졌습니다. 원래는 더 많은 식재료를 사려고 했는데, 잔액이 부족하다는 말에…….”
“큽!”
다행히 밥알을 뿜지는 않았지만, 목구멍이 콱 막혔다.
그래, 그랬지…….
나는 저축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비상사태.
“후우…….”
진수성찬이 눈앞에 있는데 편하게 먹질 못하겠다.
돈 벌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더니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열이 났다.
콱 죽어버릴까?
미미가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주군은 이제 헌터세요. 사냥하면 식비 정도는 쉽게 벌 수 있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헌터였지.
항상 바라왔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6개월에 한 번만 사냥하고, 그 돈으로 나머지 시간은 빈둥대며 지내는 극락 생활!
하지만 생각해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오늘 각성 판정을 받았잖아. 정식 라이선스가 나오기도 않았는데 어떻게 사냥을 해?”
미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군께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사냥 예약을 하면 주군은 실습이라는 형태로 따라오실 수 있어요.”
“실습?”
상식이 부족한 나를 위해 미미가 설명해 주었다.
“각성 판정을 받은 헌터는 정식 라이선스가 있는 헌터와 동행하여 사냥 실습을 할 수 있답니다. 실습 경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면 정식 라이선스를 일찍 발급받을 수도 있고요.”
“아~~”
그런 시스템이 있었다니.
미미가 나를 데리고 실습이라는 형태로 사냥을 가고, 어쨌거나 사냥만 하면 부산물을 획득할 수 있으니 그걸 팔아 돈을 마련할 수 있다.
“퍼펙트!”
나는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잘 다녀와.”
“네?”
“실습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누가 그런 걸 일일이 확인하겠냐고. 실습한다고 말만 해두고 너 혼자 다녀오면 되지. 그러면 돈도 벌고, 나는 집에서 놀 수 있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휴우…….”
미미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게이트에는 입장 인원을 식별하는 카메라가 있어서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답니다.”
“이런 젠장!”
6개월에 한 번의 사냥도 안 하고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무원 녀석들, 제법인데?
“가야겠네…… 사냥. 언젠가는…….”
“당장 내일 먹을 것도 없는데 빨리 가야죠. 그럴 줄 알고 예약을 해뒀어요.”
“뭐?”
정말 필요 이상으로 유능한 녀석이다. 왠지 계속 휘둘리는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단순히 부하라고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아…….”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입맛이 떨어진다.
그때, 띵동 하고 벨이 울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니 미미가 “네~” 하고 명랑하게 몸을 일으켰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 작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덩치 큰 침대.
그뿐 아니라 귀여운 디자인의 이불과 베개까지 딸려왔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이, 침대가 설치되고 배달원들이 떠나갔다.
나는 침대에 폴짝 뛰어올라 쿠션을 확인하고 있는 미미에게 물었다.
“……뭐야?”
“주군이 제가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나간 김에 하나 사 왔죠.”
얼굴 옆에 손가락을 붙이고 브이를 그린다.
침대 사 온 걸 과자 한 봉지 사 온 것처럼 가볍게 말하지 말란 말이다!
어쩐지 통장 잔액이 갑자기 바닥났다 했다. 식재료를 포기할 게 아니라 침대를 포기했어야지!
나는 생글생글 웃는 미미의 얼굴을 보고 뭔가 함정에 빠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축이 바닥났을 뿐 아니라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겠다는 소박한 희망마저 깨어졌다.
‘젠장…….’
생각해 봤자 귀찮기만 하지.
에잉~ 씨.
밥이나 먹자.
8
침대에 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눈앞에 이상한 것이 떠올랐다.
손을 휘저어 없애려고 해보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에 흐릿했던 이물감은 점점 또렷한 문장이 되었다.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테이터스가 생성되었습니다.]
“응?”
가만히 있었더니 문장이 사라지고 조그마한 빨간 점이 생성되었다.
그것을 터치했더니 팟 하고 문자가 나열된다.
등급 : S(Lv 1)/???
근력 : 95/???
민첩 : 90/???
체력 : 88/???
기량 : 99/???
정신력 : 10/100
특수능력 : -
스킬 : -
칭호 : -
“으음…….”
뭔가 게임에서 자주 보는 스테이터스 화면 같다.
나는 한참 그것을 노려보다가,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미미에게 묻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녀를 불렀다.
“미미.”
“네, 주군!”
밥상에 노트북을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던-뭘 하는가 싶었더니 인터넷 쇼핑을 하는 중이었다.-미미가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나는 내게 나타난 기현상에 대해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아마 그것은 주군의 능력을 수치화한 표일 거예요. 람바스 님에게도 비슷한 능력이 있었답니다. 람바스 님은 자신의 능력을 명확하게 보고싶어 하셨거든요.”
그렇군.
왠지 그렇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명확하게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나타나게 만들다니, 새삼 람바스는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정보창이 람바스가 보던 것과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기억과 능력이 전이되면서 내게 적합한 방식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다른 남자들처럼 게임을 좋아하니까.
스테이터스 정보창만큼 능력을 확인하기 편한 방식도 없을 것이다.
“거기 어떻게 적혀 있나요?”
미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나는 스테이터스 창에 적힌 수치를 그대로 읽어주었다.
끝까지 듣고 난 미미의 표정이 다소 심각해졌다.
“음…… 아직 그분의 능력이 아주 일부밖에 깨나지 않았군요. 하긴 보구(寶具)를 하나도 찾지 못했으니 지금 람바스 님의 능력을 전부 발휘한다는 건 무리지만요.”
“보구?”
“네. 이곳의 표현을 빌리면 람바스 님이 마지막에 소유하셨던 장비와 무기, 아이템을 일컫는 거예요. 람바스 님은 최후의 싸움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보구 전부를 따로 떼어내 봉인하셨거든요. 주군께서 하셔야 할 일 중 하나가 그것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뭐? 그 보군지 뭔지 하는 것을 하나씩 일일이 찾아야 한다고?”
세상에 그런 귀찮은 일이!
보구 문제를 제외하고도 미미의 말은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됐다.
정보창에 적힌 내 능력은 얼핏 보아도 엄청난데…….
등급에 떡 하니 S가 박혀 있을 뿐 아니라 수치도-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엄청 높았다.
내가 어제 B급 각성자 이근수를 한 방에 날려버린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미는 능력이 아주 조금밖에 깨나지 않았다고 했다.
‘S급이라니…….’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나는 등급 판정을 받을 일이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내가 S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즉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테니까.
나중에 S급 몬스터가 출현하면 빼박 거기 동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 돼!!!’
나는 대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그것이 보구 따위를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축하드려요, 주군. 능력이 보인다는 얘기는 주군께 헌터의 능력이 제대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예요.”
그러고 보니 스테이터스가 생성되기 이전에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먼저 떠올랐었다.
이는 남들은 6개월씩 걸린다는 능력의 안정화가 단 하루 만에 완료되었다는 뜻.
‘정말 먼치킨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