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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 헌터-2화 (2/160)

▣ 2화

2

한바탕 반가움에 눈물을 쏟은 미미는 “주군도 참, 이런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계셨군요?”라고 하더니 청소를 시작했다.

나는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내 안에서부터 뭔가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체 전체와 머릿속에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였다.

귀찮음과는 별개로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약간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통증이 동반된다거나 고통스러운 현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잠자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차근차근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미미의 이름이 생각난 것은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에 불과했다. 그녀는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삶에서 나에게-정확히 말하면 내게 기억과 능력을 잇게 한 누군가에게-헌신적으로 봉사했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바시냐 족이라는 오래전에 멸종된 소수 종족의 생존자.

바시냐 족은 본래 타 종족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지만, 본인이 충성을 맹세한 상대에게는 죽음을 불사하고 헌신한다.

종족의 특징 중 하나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생명력을 아주아주 길게 연장할 수 있다는 것.

‘잠’이라는 형태를 통해 생명력을 임의로 정지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종족이 멸망하기 전에 부모로부터 의식적인 ‘잠’에 빠지도록 조치 받았고, 그 결과 바시냐 족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런 그녀를 찾아 죽이려는 놈들로부터 구해준 것이 바로 나.

‘……가 아니라 람바스.’

내게 기억을 이식한 자의 이름이 생각났다.

지구 역사로 치면 중세 시대와 같은 계급 사회에서 군주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미가 ‘주군’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 언어와 계급의 명칭이 다르지만 미미는 이미 한국어 패치가 되어 있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해당 계급이 ‘주군’이 되는 것.

많은 기억이 뭉뚱그려져 있지만,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저 점점이 이미지만 파악할 수 있을 뿐.

천재 중의 천재.

인류를 구할 최후의 보루.

그것이 사람들이 람바스를 부르는 호칭이었고, 그에게 최후까지 희망을 걸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게을렀구나.’

그는 미치도록 게을렀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희망을 깡그리 무시하는 강철 같은 멘탈을 소유하고 있었다.

독립된 지역에, 누구의 발길도 들이지 않고 최소한의 동료와 함께 유유자적하게 생활했다.

군주라는 타이틀 또한 본인이 원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몬스터들이 행성을 침입했을 때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군주’라는 귀찮은 타이틀을 얻는 대신 자유를 허락받았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는 신체적인 통증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품었던 람바스의 회한.

그것이 파도처럼 의식을 덮쳤다.

‘마지막에 가서야 후회했구나.’

무엇을 후회했는지는 자명하다. 자신이 게으르지 않았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테니까.

적들에게 행성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고, 모든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넘치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이 람바스가 품은 엄청난 후회의 이유.

‘…….’

나는 흐릿하게만 떠오르는 몇몇 기억의 파편 속에서 내가 왜 일 년 전부터 이런 변화를 겪었는지 이해했다.

내게 빙의된 능력의 주인이 람바스였기 때문.

그는 엄청나게 게으른 자였고, 그 성격이 내게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런 게 각성이라고 할 수 있나?’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큰 것 같은데?

생각하기 귀찮다.

아무렴 어때.

부지런히 청소를 마친 미미가-나는 내가 사는 자취방의 바닥이 이런 색깔이었다는 것을 오랜만에 알았다.-팔을 걷어붙이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 냉장고 정리부터 해야 했지만.

못 볼 꼴을 계속 보면서도 그녀는 싫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콧노래는 내게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을 주었다.

나는 오늘 미미를 처음 보았지만 왜 람바스가 그녀를 총애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 향긋한 냄새가 떠돌기 시작했다.

내 냉장고 안에 있던 재료로 한 요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단히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

“주군, 식사하세요!”

그녀는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놓고 내게 말했다.

“그런데 샤워는 어디서 하면 되나요?”

“응?”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미모를 지닌 존재가 청소, 요리에 이어 샤워를 하겠다는 말을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래도 되나?’

혹시 람바스와 미미는 그렇고 그런 사이?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아쉽게도 관련된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본인이 원하니 장소를 알려주었다.

웬만하면 들어가지 않기를 권하지만.

“저기.”

욕실 겸 화장실을 가리키자 미미가 “넹~” 하고 대답하고 훌렁훌렁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 신이 내린 몸매구나…….’

물론 끝까지 벗지는 않았다. 다만 신기한 사실은 그녀가 휙휙 옷을 던질 때마다 그것들이 허공으로 빨려들었다는 사실.

나는 그것이 헌터들이 ‘인벤토리’라고 부르는 아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각성자였던 것.

‘당연하지.’

람바스의 총애를 받았던 여자인데, 게다가 전설의 종족 바시냐 최후의 생존자다.

욕실 문을 연 미미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녀는 샤워를 하기 전에 먼저 욕실 청소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금세 모드가 전환되어 다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미안하네.’

내가 람바스라면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오늘 처음 보았다.

처음 본 여자에게 치부란 치부는 모조리 드러내는 기분이다.

하지만 밥상 앞에 앉았을 때, 다른 생각은 깡그리 사라졌다.

말 그대로 진수성찬.

내 냉장고에서 나온 재료로 이런 밥상이 차려지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다.

‘냉장고를 부탁합니다’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건 보지 못했다.

‘조리법은 좀 다른 것 같지만.’

미미가 만들어 놓은 요리는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 했다. 나는 그것이 이국(異國)이 아닌 이성(異星)의 요리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꼬르르르르륵.

근 일 년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이 없다. 비주얼과 냄새가 엄청나게 훌륭한 밥상을 접하고 나니 귀찮음에 덮여 있던 식욕이 왕성하게 살아났다.

우적우적.

쩝쩝접.

‘졸라 맛있네!’

감탄의 마음을 담아 욕실 쪽을 흘긋 보았더니 마침 이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던 미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생긋 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가 없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인생은 살아 있고 볼 일이라는 건가?

나는 뱃속에 블랙홀이 들어 있는 것처럼 상당한 양의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아, 잘 먹었다!”

“정말요?”

앗, 깜짝이야.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미미가 다소곳한 자세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샤워를 마친 그녀에게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미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는 것.

아마도 인벤토리에서 다른 옷을 꺼내입은 듯하다.

그녀의 지금 복장은 뭐랄까,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오피스 레이디의 의상이었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스커트, 검정 스타킹.

뭔가 전에 입고 있던 옷도 그렇고 전형적인 코디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미미가 말했다.

“혹시 제 옷이 이상한가요? 사실 제가 이곳에서 눈을 뜬 건 얼마 되지 않아서, 급하게 정보를 모아 얻은 옷이에요. 저도 적응이 잘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귀여운 것 같아요.”

“응, 좋아. 잘 어울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녀가 옷을 선택하는 기준은 ‘정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정보가 좋은 정보라고 생각했다.

뭐, 이렇게 얼굴과 몸매가 예쁘다면 무슨 옷을 입어도 어울리겠지만.

내 칭찬에 미미가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그리고…… 요리도 정말 잘하네.”

미미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어렸다. 살풋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와, 처음이에요. 주군이 저를 이렇게 칭찬한 건.”

람바스 이 새끼야, 너는 봉사를 받으면서 칭찬 한마디도 안 했다는 말이냐?

쓰레기네.

내가 대신 사과하고 싶어진다.

“뭐, 나는 람바스가 아니니까…….”

“아! 이름이 생각나셨군요? 다른 건요? 또 뭐가 떠오르셨나요?”

나는 내가 떠올린 단편적인 기억들을 말해주었다. 말 그대로 단편적인 기억일 뿐이지만.

하지만 그것조차 미미에게는 고무적인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분의 기억이 온전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나실 거예요!”

하지만 나는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대단히 신경 쓰이는 한 가지.

“나는 람바스가 아닌데…… 나한테 봉사할 이유는 없지 않나?”

“아니에요!”

미미가 벌떡 일어났다.

“주군은 그분의 기억과 능력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분의 전생(轉生)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제가 주군께 봉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 그래…….”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녀처럼 청소와 요리를 잘하는 여자가 옆에 있으면 엄청 편할 테니까.

DREAM COME TRUE.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내 이름은 조철웅이야. 남들 앞에서 주군이라고 부르지 마.”

“아! 그렇죠. 그건 이 행성에서 적당한 호칭이 아니니까요.”

미미가 검지를 턱에 갖다 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드리웠다.

“……아시겠지만 저희가 살던 행성은 놈들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같은 일이 이 행성에서도 일어나려 해요. 주군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뭐? 왜?”

설마 했는데 진짜 내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건가?

‘말만 들어도 엄청 귀찮은데!’

질린 표정을 하는 나를 보고 미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분의 성정이…… 그대로 옮은 것은…….”

빙고.

나는 람바스 때문에 엄청 게을러졌다.

아, 밥을 먹었더니 눕고 싶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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