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기적의 스킬 자판기 132화
홀더러스 남작과 베핀 남작으로부터 빌린 땅들의 논과 밭에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을 쓰고, 작물이 자라지 못하는 땅들에도 영지민들을 시켜 씨앗을 뿌리게 한 뒤, 그 논과 밭에도 전부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을 쓴 용후는 박정석의 마차를 타고 소로브 산맥으로 갔다.
드워프 장로 팔란스와 엘프 장로 카헨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하하! 어서 오게나!"
드워프들 모두 용후를 반겼고, 최고장로인 팔란스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용후를 맞아주었다.
도움을 받거나 빚을 진 게 있다면 반드시,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갚는 게 드워프들이었다.
또 하나, 여러 장로에게 호감도를 많이 올려둔 덕도 있었다.
이야기는 술술 풀렸다.
"예언을 볼 수 있는 스킬이라……."
팔란스는 용후의 말이 의심스럽다거나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일절 품지 않았다.
드워프들은 믿는 자의 말은 무조건 믿고, 믿지 않는 자의 말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말을 하든, 어떤 달콤한 제안을 하든 콧방귀를 뀌어버리는 자들이었다.
"인간들의 세상이 그렇게까지 식량이 말라버린다면 우리 드워프들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네."
"이 마을의 드워프들을 전부 동원해 제 영지 전역을 두르는 15m 이상 높이의 장벽을 축조하고 싶습니다. 한 달 안에 완공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성도 아니고 영지 전역을 두르는 장벽 공사, 드워프들만으론 한 달 안에 완공시키는 건 절대 무리지만, 홀더러스 남작과 베핀 남작에게 공사에 쓸 수 있는 영지민들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일꾼들을 빌리는 건 비리마 남작에게도 가능할 것이다. 홀더러스 남작과 베핀 남작만큼은 아니라 해도.
또, 퀘스트 스킬을 통해 유저들을 장벽 공사에 동원하는 방법도 있다.
단순 노가다지만, 퀘스트 등급은 상당히 높은 등급을 받게 될 것이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재앙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리는 장벽이니.
'거기에 셀터 300기를 공사에 투입시킨다면, 충분히 15m 이상의 장벽을 한 달 안에 완공시킬 수 있어.'
현자의 돌의 파편을 구해 뭐든 다 만들어 스킬을 강화시킨다면 셀터 300기 이상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 계획대로 진행시키려면 무조건 이 마을의 드워프들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80% 이상은 장벽 공사에 투입시켜야 돼.'
그저 한 달 안에 장벽을 쌓아 올리는 데 성공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드워프들의 기술력과 그들의 광석과 마석이 사용되어 만들어진 장벽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전원 투입이라……."
팔란스의 얼굴이 조금 무겁게 변했다.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드워프들.
다들 하던 일들이 있을 테니, 한 달이나 마을을 떠나 장벽 공사에만 매달려야 하는 일을 쉽게 결정할 순 없겠지.
그러나 역시 팔란스의 생각은 길지 않았다.
"좋네. 그 정도는 돼야 한 달 안에 영지를 두르는 15m 이상 높이의 장벽을, 그것도 성벽 축조에 참여한 드워프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장벽을 만들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든든합니다!"
"나 또한 든든하고, 나야말로 고맙네."
미소를 지은 팔란스가 말을 이었다.
"용후 자네가 당연히 우리 드워프들에게도 식량을 나눠줄 테니 말이야."
팔란스가 용후의 부탁을 승낙한 데는 그 이유도 컸다.
인간은 물론, 어떤 종족이든 다 그렇지만, 특히나 대식가들인 드워프들에겐 먹는 문제는 정말 중요했다.
"일반 일꾼들은 몇 명이나 붙여줄 수 있나?"
당연히 드워프들만으로 그런 장벽을 한 달 만에 만들 수 있을 리 만무, 수백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의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다.
"못해도 건장한 일꾼들로 3천 명 이상을 투입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장벽 축조에 마법사들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팔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원하게 끄덕인 건 아니었다. 적은 수는 아니지만, 아무리 마법까지 동원이 된다 해도 한 달 안에 반드시 완공할 수 있단 확신까진 들지 않아서였다.
용후가 말을 이었다.
"또한 마도대인병기 셀터 300기도 투입시킬 계획입니다."
"셀터 300기?!"
김용후가 셀터를 수리했단 이야긴 호델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리와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 그것도 두세 기도 아니고 300기라니?!
"만들 수 있습니다. 제 스킬을 쓴다면 말이죠."
팔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에게도 들은 김용후의 기적의 스킬. 게다가 오우거들도 간단히 잡아냈다지.
죽은 생명의 나무도 살려낸 그 힘이라면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팔란스가 머릿속에서 의구심을 지웠다.
"그 인원과 셀터 300기가 제공된다면 확신할 수 있네. 한 달 안에 완공이 될 걸세."
"다행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하나 더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마력포의 설계도를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마력포 또한 셀터처럼 제 스킬을 사용해 대량 생산이 가능합니다."
"흠, 그건……."
말끝을 조금 끌었지만 이번엔 팔란스의 입에서 바로 대답이 나왔다.
"마력포가 더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 으음…… 알겠네. 게다가 수백 기를 완공된 장벽 위에 설치한다면 악마와 마족들이 몰려온다 해도 절대 쉽게 장벽이 뚫리지 않겠군."
그 장면이 상상되는지 팔란스가 탄성을 냈다.
"하지만, 하나 약속해 주게."
"말씀하십시오."
"게이트에서 나온 재앙을 막아내고, 게이트를 무사히 닫는다면 마력포는 이전에 준 한 개를 빼곤 전부 폐기해 주게. 그리고 더 만들지 않는다 약속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용후가 팔란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진심을 담아 약속을 했다. 진심으로 자신을 대해주고 전력으로 자신을 돕겠다 한 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기만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껏 퍼플 마석으로 만들어낸 마력포를 폐기하는 건 아쉽지만, 단 한 기만 있어도 다른 귀족들을 상대로 영지를 방어하는 데는 충분하다.
또, 자신에겐 기적의 스킬들이 있고, 그 스킬들을 이번 기회를 통해 더더욱 강화시킬 테고, 게이트를 막아낸다면 그걸 통해 얻은 막대한 양의 명성으로 또 기적의 스킬을 살 수 있게 된다.
"믿겠네. 용후 자네는 믿을 수 있네."
팔란스가 웃으며 용후를 대우해 인간식으로 악수를 권했다. 용후가 그 손을 잡았다. 팔란스가 시원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후 바로 드워프 마을을 나온 용후는 엘프 마을로 향했다.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얻기 위해.
* * *
"드세요."
엘프 마을. 장로 카헨의 집. 카헨과 용후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카헨의 딸인 엘로이스가 넓적한 나뭇가지에 자른 과일을 올려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잘 먹겠습니다."
엘로이스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생명의 나무 꼭대기에서 딴 열매랍니다."
"이 귀한걸!"
생명의 나무에서 열린 열매라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었다. 맛은 크게 차이가 없지만, 꼭대기에 가까운 곳에 열린 열매일수록 먹으면 얻게 되는 효과들이 훨씬 컸다.
색도 모양도 멜론 같았다.
용후가, 비스듬히 꽂혀 있는 이쑤시개 같은 얇은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열매를 들어 올려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가볍게 씹자 과즙이 듬뿍 흘러나와 입안을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 느껴지는 달콤함과 상큼함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꿀꺽 삼키자 용후의 눈앞에 알림창들이 떠올랐다.
-생명력이 30 오릅니다
-체력이 20 오릅니다
-근력이 10 오릅니다
-정령 친화력이 120 오릅니다
"허……."
딱 한 조각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스탯 상승이라니! 용후가 또 자른 열매 한 조각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와!'
과즙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방금 먹었을 때보다 맛도 시원함도 더 커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똑같은 알림창들이 떠올랐다. 용후가 대화를 잠시 잊고 몇 개를 더 입에 넣어 허겁지겁 먹었다.
단지 스탯 상승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이렇게 맛있는 건 먹어본 적이 없었다. 홀릴 정도로 맛있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용후가, 용후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하던 대화를 잊고, 심지어 카헨과 엘로이스가 함께 있단 것도 잊고 전부 다 먹어버렸기 때문.
카헨이 먹은 건 겨우 한 조각뿐이었다. 이런 실례가 없었다.
그러나 카헨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고, 엘로이스도 쿡! 하는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괜찮습니다. 주리안을 처음 먹은 분들은 누구든 다들 그런 반응들을 보입니다. 심지어 엘프들조차도 그러니 부끄러워하실 거 없습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천하의 용후 님까지 이런 반응을 보이시다니, 하하."
"용후 님 덕분이에요. 생명의 나무가 정말 예전처럼 완전히 되살아났어요. 아니, 더 튼튼해지고 생명력이 커진 것도 같아요."
"그렇다면 안심이 됩니다……."
카헨이 다시 표정을 되돌리며 말을 이었다.
주리안 때문에 잠시 멈춰졌던, 꽤 진행됐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용후 님은 저와 제 딸, 그리고 부족의 은인. 부탁하신, 생명의 나뭇가지를 드리겠습니다. 더구나,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것 외에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용후 님……."
카헨이 표정을 바꾸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세계수가 아닌 생명의 나무입니다.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잘라 심어도 그 나뭇가지가 생명의 나무가 되진 않습니다."
물론 카헨은 그걸 용후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방법이 있기에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달란 말을 한 것일 터.
하지만…….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세계수에서 잘라낸 나뭇가지처럼 키워내는 건, 신들의 영역에도 손을 댔다는 마도 시대의 마법사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신화시대의 신들이나 할 수 있는 일. 그때 용후가 입을 열었다.
"제 스킬을 쓰면 가능합니다."
너무도 확신에 찬 말이었다.
"카헨 님, 부탁드립니다.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 나뭇가지가 헛되게 말라죽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엘프들에게도 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카헨은, 김용후에게 신이 깃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는 신이 보낸 사자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한 것일 수도 있단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러니…….
'도와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카헨은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또 다른 생명의 나무로 키워내는 건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김용후는 믿었다.
또한, 혹 나뭇가지를 잘라냄으로써 생명의 나무가 약해진다 해도, 그렇게 약해져 다시 말라죽게 된다 해도 김용후가 다시 되살려줄 것이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나뭇가지들 중 하나를 잘라 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반드시 생명의 나무로 키울 것이고, 게이트를 막은 뒤에도 생명의 나무가 인간들의 욕심으로 고통받게 되거나 허투루 관리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믿습니다."
엘프 카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후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헨이 앞장을 서 밖으로 나갔다.
생명의 나무 앞에 선 카헨이 외투를 벗고 직접 생명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빨랐다.
* * *
탁!
1시간 만에 바닥으로 내려온 카헨의 손에 다른 나무의 나뭇가지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 여린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 나뭇가지를 카헨이 용후에게 건넸다.
"……!"
건네받은 직후 용후의 눈이 커졌다. 마치 빨려들 것 같은 막대한 생명의 기운과 정령의 기운이 느껴져서였다. 용후가 그 나뭇가지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생명의 나무의 나뭇가지를 얻었습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5,000 오릅니다
바로 엘프 마을을 나온 용후는 팔켄 마을로 향했다. 박정석의 마차 안에서 용후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제야 등을 깊이 등받이에 기대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며칠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탁 풀리며 나른함마저 밀려들었다.
용후의 입가에 크게 미소가 지어졌다.
"되었다."
이젠 현자의 돌의 파편을 찾아내면 된다. 분명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많은 양을 구할 수 있을 터다.
연금술사 드리안은 분명 현자의 돌의 파편을 갖고 있을 테니.
중독시킨 멧돼지의 새끼에 새끼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독과 특히 생명의 나무가 녹아 줄줄 흘러내릴 정도의 맹독, 그런 독을 만드는 데는 분명 현자의 돌의 파편이 사용됐을 터다.
연금술사 드리안만 찾아낸다면 현자의 돌의 파편도 더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이 구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확신처럼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3천 명이 넘는 일꾼들과 5백 명이 넘는 드워프들을 데리고, 마도 시대의 병기까지 사용해 김용후가 영지에 15m 높이의 장벽을 두르고 있단 소식이 남부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헨슬런 백작의 귀에도 들어갔다.
당연히 그 소식을 들은 헨슬런 백작의 눈이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