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기적의 스킬 자판기 131화
용후가 꿈에서 본 건 대흉년이었다. 남부뿐만이 아니라 왕국 전역에서, 모든 논과 밭과 과수원이 단 한 톨의 곡식도, 열매도, 채소도 수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곡식 창고도 텅텅 비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귀족들은 그래도 평민들보단 상황이 나았지만, 제대로 먹지 못해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했다.
그리고 귀족들이 그나마 조금 갖고 있는 식량을 뺏기 위해 영지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나 내성을 공격하고 영주를 잡아 죽이는 모습들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지옥!
그런 생지옥이, 잠에서 깰 때까지 용후를 괴롭혔다.
"……헉!"
눈을 뜬 용후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달려가 커튼을 세차게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그래도 마을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기에 마을의 모습은 어렴풋이 보였다.
어제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
그제야 용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뒷걸음질을 쳐 티테이블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꿈인 건 맞지만, 절대 단순한 꿈이 아니다.
"이게 예언 스킬……."
꿈속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욱 확신했다. 가슴 속에서 묘한 힘이 아직 일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기적의 스킬들을 쓰면 느껴지는 기운과 비슷했지만, 어떤 스킬과도 달랐다. 액티브 스킬이 아니라 패시브 스킬,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동되는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자신이 본 게 머지않아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한다면…….'
"대체 왜 그런 대흉년이 일어나는 거지?"
너무 뜬금없는 재앙이었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만큼, 절대 자연적으로 일어난 흉년이 아니다.
뭔가 인위적인 힘이 작용한 것이다.
"그 게이트와 관계가 있어."
그런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난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길태현이 만든 그 게이트뿐이다. 하지만 꿈속에서 마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물들의 공격이 아니라, 게이트에서 다른 무언가가 나와 왕국 전역의 식량이 말라버리고, 논과 밭에서도 작물들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게 되는 것일 터다.
또 하나.
자신이 절대 안 열려 스킬을 강화시켜 게이트를 완전히 틀어막기 전에, 게이트가 열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갑자기 대흉년이 일어나고 곡식이 씨가 말라버려도 왕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마련해야 돼."
용후는 자신의 영지를 돌며 영지 내 모든 논과 밭, 과수원에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을 썼다.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은 그저 수확량을 늘리는 효과만이 아니라 수확 시기도 훨씬 앞당기는 효과도 갖고 있다. 하지만 왕국민을 전부 먹여 살릴 정도의 양을 모으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의 스킬 레벨을 더 올려 효과를 더욱 증대시키고,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을 쓸 수 있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이 관리하고 지켜낼 수 있는 논과 밭을 더 늘려야 한다.
그리고 수확한 식량들을 저택 지하, 수련실에 넣고 수련실 문을 절대 안 열려 스킬로 걸어 잠가야 한다.
절대 안 열려 스킬은 문에만 스킬을 걸 수도 있지만, 집, 또는 특정 공간 전체에 절대 안 열려 스킬의 효과가 걸리도록도 할 수 있다.
즉 수련실이, 방어막을 두른 것처럼 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힘도 침투하지 못할 것이다.
그즈음 동이 텄다.
용후가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 되자 제이번을 집무실로 불렀다.
아무리 밑에 유능한 비서들이 셋이나 있다 해도 연금술사 드리안과 현자의 돌의 파편을 찾는 일을 맡게 되면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졌지만, 가장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게 그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제이번의 얼굴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언제나처럼 표정은 우직하고 눈에는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대상단들을 통해 가능한 많은 식량을 사들이세요. 그리고 그렇게 모은 식량을 저택 지하 수련실에 쌓으세요."
제이번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게이트에 대한 이야길 다 들었기에 제이번의 표정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곤란하겠지만, 어제 부탁한 일도, 이 일도 제이번 씨가 맡아서 해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신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제가 가진 역력을 총동원해, 아니, 그 이상으로 해내겠습니다."
김용후의 말대로라면 그 게이트를 막지 못할 경우 걷잡을 수 없을 일이 일어난다. 제이번은 의지를 다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이번이 영주실을 나갔고, 용후은 박정석을 호출해 마차를 대기시켰다. 홀더러스 남작령으로 가 농사를 지을 땅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 * *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세요, 김용후 준남작님."
홀더러스 성의 1층 로비, 무례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방문이지만, 홀더러스 남작과 딸 실피아의 얼굴에는 불쾌해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는 자라 해도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완벽히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티가 나기 마련. 그러나 홀더러스 남작과 실피아는 깍듯하게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용후를 진심으로 반기고 있었다.
그럴 게,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홀더러스 남작에겐 딸의, 실피아에겐 자신의.
"만찬을 준비했으니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시지요."
김용후가 자신에게 부탁을 할 게 있어 자신의 성에 방문했다는 걸 비서의 보고로 들은 상황.
약속조차 잡지 않고 이렇게나 급히 온 걸 보면 보통 부탁이 아니란 생각이 들지만, 김용후와 더 긴밀한 관계가 돼서 나쁠 게 없기에 홀더러스 남작의 얼굴은 편안했다.
'허…….'
식당으로 들어간 용후가 속으로 감탄을 냈다. 그야말로 진수성찬. 용후도 저택에 개인 요리사들을 고용해 쓰고 있지만, 먹어보지 못한, 본 적도 없는 요리들이 그득그득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요리들에 대화가 잘 진행될 거란 생각에 용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홀더러스 남작과 딸 실피아가 자리에 앉았고, 용후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벼운 신변잡기 대화와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그 뒤 약 15분, 용후가 본론을 꺼냈다.
"제가 홀더러스 남작님을 이리도 무례하게 찾아뵌 건 급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무례라니요. 용후 님은 제 딸의 은인이십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 언제든 제 성에 방문하시더라도 환영입니다. 또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힘껏 돕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셔 가볍게 입가심을 한 용후가 말을 이었다.
"땅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생각도 못한 말에, 홀더러스 남작이 예? 하는 말을 뱉었다.
"그저 들판과 숲만 있는 땅도 상관없지만, 밀과 보리를 심을 수 있는 땅이 포함된 땅이었으면 합니다."
다짜고짜 성에 들이닥쳐 땅을 빌려 달라? 홀더러스 남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홀더러스 남작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용후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당연한 반응.'
말도 안 되는 말이니까. 영주가 영주에게 가서 땅을 빌려 달라 한다? 누가 봐도 땅을 빼앗기 위한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용후는 홀더러스 남작을 진지하게, 그리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빌리겠습니다. 딱 반년만. 그리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생각지도 못한, 당황스러운 부탁이군요."
여전히 굳은 얼굴로 홀더러스 남작이 포도주잔을 들어 연거푸 세 모금을 마신 뒤 목에 두른 수건을 빼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충분히, 밀과 보리를 많이 수확할 수 있는 기름진 땅들을 많이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땅을 빌리려 하시는지요?"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허……."
결국 홀더러스 남작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용후를 봤다. 눈에는 적개심까지 은근히 담겼다.
지구와 연결된 게이트가 열린 걸 숨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걸 다 설명하고, 예언 스킬에 대해서도 설명한다면, 그 말들을 전부 다 믿는다 해도 문제다.
소심하고 겁이 많다 알려진 홀더러스 남작의 성격상 그 말들이 다 사실인지 하나하나 알아보려 할 테니.
그걸 다 알아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확인 작업이 끝난 뒤에 땅을 빌려줘서는 의미가 없다. 지금 당장 땅을 빌려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을 써야 한다.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딱 3개월 뒤에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은인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싶게 빌려주지도, 믿지도 못할 것이다.
만약 거절할 경우, 용후는 힘을 써서라도 협박을 해서라도 땅을 빌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버님, 저도 부탁드려요. 김용후 준남작님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실피아가 홀더러스 남작에게 말했다. 용후가 실피아를 봤다. 마지막으로 치료를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얼굴에 생기가 돌고 살도 올라와 있었다.
"그저 절 고쳐주신 은인이기 때문에 하는 부탁이 아니에요. 용후 님이 그동안 해 오신 일들 모두 남부 영지민들에게, 그리고 왕국에도 도움이 되는 일들이지 않았나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데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부탁드려요!"
실피아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홀더러스 남작이 흔들렸다. 또한, 홀더러스 남작이 생각하기에도 김용후는 땅을 빼앗기 위해 수작을 부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짓을 했다간 땅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껏 쌓은, 하늘을 찌를 기세인 명성이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그 명성이, 영지의 땅을 좀 더 넓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단 걸 김용후가 모를 리가 있나.
또한, 절대 간단히 들어줄 수 없는 부탁, 그런 만큼 들어준다면 김용후와의 관계를 아주 끈끈히 할 수 있는 기회다.
"……좋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3개월간 영지의 30% 정도를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후가 생각했던 건 20~25% 정도.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란 평이 나 있는 홀더러스 남작이지만, 결단을 내리면 통이 커지는 화끈함도 갖추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3개월간 합당한 대여비를 지불하겠습니다."
홀더러스 남작의 표정이 더 풀렸다. 땅을 제대로 돌려주기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말이기에.
용후가 실피아 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피아 님."
살짝 마주 고개를 숙이며 실피아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잘 됐다고.
'용후 님, 힘내세요.'
무슨 일을 하는 건진 알 수 없지만 분명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용후는 베킨 남작의 성으로도 갔다. 그러나 베킨 남작에겐 부탁이 아니라 협박을 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단 걸 알고 있기에,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낫단 생각이었다.
힘으로 누르는 것보단 자신에게 호감을 사게 하고 자발적으로 돕도록 만드는 게 미래를 생각하면 더 좋지만, 지금은 나중의 일까지 설계하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만큼."
용후가 준비해 간 지도를 테이블 위에 올리곤 동그라미를 슥 그렸다.
"3개월간 빌렸으면 합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3개월 뒤에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물론 대여비도 지불합니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힘으로라도 뺏겠습니다."
이전 영지전 때 너무도 무력하게 당했고, 영지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김용후의 명성과 전력이 더 커졌기에, 베킨 남작은 감히 용후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용후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심은 더 커졌다.
용후도 그걸 느꼈지만 무시했다. 혹 자신에게 뭔가 수작을 걸어온다 해도 무서울 건 없으니.
"비리마 백작까진 힘들어……."
베킨 남작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성을 나온 용후는 결국 비리마 백작의 성으로 가는 건 포기했다.
홀더러스 남작이나 베킨 남작처럼 만만한 자가 아니기 때문. 자신에게 큰 호감도를 가진 만큼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면 땅을 빌려주겠지만, 그건 비리마 백작이 확인 작업을 다 거친 뒤가 될 터.
협박이 통할 자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될 자니 비리마 남작에게서 땅을 빌리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가능해."
자신의 영지 안에 있는 논과 밭, 과수원에서 나는 식량, 그리고 상단들을 통해 사들여 저택 지하에 저장해둔 식량으로 1~2년 정도는 왕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두 가지 더 필요한 게 있다.
적들로부터 영지를 막아줄 수 있는 드높고 튼튼한, 영지 전역을 두르는 성벽과 불온한 힘을 막아내고 정화시키고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의 효과까지 더욱 증폭시켜줄 생명의 나무.
그게 필요하다.
"일단은……."
용후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밀 평야로 향했다.
"무럭무럭 자라라."
용후의 손에서 시작된 황금빛을 내는 빛이 화살과도 같은 속도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밀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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