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기적의 스킬 자판기 127화
교황청.
"수고가 많았네, 갈먼."
크고 고풍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흰 사제복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라 불러야 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갈먼에게 먼저 말을 하고 이어 용후를 보며 말했다.
"제가 추기경 날폰입니다."
"준남작 김용후입니다."
"교황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또한, 제 제안을 승낙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날폰이 용후에게 성호를 긋고 세히브교식의 인사를 했다. 아주 깍듯한 태도.
교황청의 추기경은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직책이고 교회의 사람이지만 화려한 인맥은 물론, 행사할 수 있는 권력도 많은 만큼 귀족들도 비유를 맞추려 들었다.
하지만 날폰은 인사 이후에도 계속 깍듯하게 김용후를 대했다.
길태현을 잡는데 김용후를 꼭 쓰고 싶어서였다. 길태현을 잡는데 인력을 크게 투입한다면 교황청의 힘만으로도 길태현을 찾아 잡아낼 수 있겠지만, 시일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반면 김용후는 벨베른에 악마교까지도 금방 찾아 제거하고 뿌리까지 뽑아냈다.
유저가 귀족을 수족으로 만들고, 그 밑의 기사들과 유저 수백 명을 언데드로 만들어 부린 전대미문의 사건.
추기경 날폰은 길태현을 빨리 잡아 처단해 본보기를 보이고 교황청의 위신을 서둘러 세울 필요성을 느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교황청만큼은 변함없는 힘을 발휘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쪽으로."
날폰이 오른쪽 벽에 있는 문을 열곤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회의실이었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용후가 날폰이 권한 의자에 앉자, 날폰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날폰이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길태현을 찾을 수 있으십니까?"
"예."
바로 대답이 나오자, 날폰의 눈이 조금 커졌다. 허풍이거나, 일단 뱉고 보는 말론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단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퀘스트를 주시면 그때부터 찾을 겁니다."
"……그렇군요."
날폰이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략 어느 정도의 시일이 걸릴는지……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지성을 가진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유저입니다. 필시 부활해 또 뭔가를 꾸미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잡아내야 할 너무도 위험천만한 자입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퀘스트를 받는다면, 그 즉시 제 역량을 총동원해 최대한 빨리 잡아낼 것입니다. 왕국 내에 있다면 아무리 늦어도 열흘 안에는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열흘……?!"
김용후가 교황청까지 오는 동안 교황청이 그저 손만 빨고 기다렸을 리가.
인맥을 총동원하고, 정보 길드를 통해서도 길태현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러나 어디쯤 있을지 가늠할 수 있을 만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고, 아예 길태현에 대한 정보도 딱히 없었다.
팔켄 마을에서 시작했고, 바르뎅 마을을 거쳐 비리마 성에서 활동했단 정보가 전부. 그 이후의 정보는 더 찾을 수 없었다.
벨베른의 밑으로 들어가 그에게 마법을 배우고 벨베른의 결계 근처에서 몬스터 사냥을 하며 레벨을 올리고, 가끔 그가 주는 퀘스트를 하며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빨리 찾는 게 정말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공성전 당시 길태현의 상태창을 봤기에, 용후는 길태현이 부활 귀환 스킬을 갖고 있고, 부활 장소를 동부의 비클겔 산맥으로 지정해뒀단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 비클겔 산맥 안 어딘지까지 적혀 있진 않았지만 비클겔 산맥에 도착해 이쪽 스킬과 탐색 마법을 쓰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 대로만 된다면…… 정말 대단하군요."
그러나 날폰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그럴 것이다. 벨베른이나 악마교와 달리 길태현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튀어나온 자.
아무 정보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열흘 안에 찾아내겠다는 건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날폰의 표정에서 그 표정은 이내 사라졌다. 상대가 상대니.
"기적을 일으키는 스킬을 쓰면 가능한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용후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의 사람, 그것도 추기경씩이나 되는 자를 상대로 감히 신만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 그 기적의 힘을 쓴단 말은 함부로 해선 안 되지만, 기적의 스킬을 쓴단 말 외에 자신이 가진 힘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날 이단으로 몰려 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유용하니까. 결국 힘이 있는 상대고, 가치가 있다면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랬기에 용후는 스킬들에 대해 세세히 알려줄 생각은 없지만 굳이 자신의 힘을 숨기기 위해 더는 애쓸 생각이 없었다.
"교황청은, 유저 길태현이 벨베른과 아주 관계가 깊었던 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길태현도 벨베른이 썼던 결계를 써서 숨어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보고 있고요. 그 결계는 어떻게 해체하거나 뚫고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그 또한 방법이 있으신지……?"
용후가 벨베른의 결계를 결계의 열쇠로 열고 들어간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날폰은 그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열흘 안에 길태현이 있는 결계를 찾아낸다 해도 결계를 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빨리 찾아낸 의미가 없으니.
"결계의 열쇠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얻어낼 방법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계를 찾아낸다면 바로 뚫고 들어갈 방법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아예 결계 채로 길태현을 없애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날폰의 눈이 더 커졌다. 그런 그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열쇠가 없는데 된다? 기적의 스킬로는 뭐든 다 해결이 된다는 건가? 기적의 스킬이란 건 대체 뭘까? 어떤 형태의 스킬인 건가.
"기적의 스킬이라 불리지만 만능은 아닙니다. 마력포를 쓸 겁니다."
"마력포?"
"예. 마력포로 결계 채로 날려버릴 겁니다."
"아아……!"
날폰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마력포가 뭘 말하는 건지 알기 때문이었다.
길태현의 언데드 부대를 단 한 방으로 절반 가까이 없애버린 고대의 병기!
어디서 어떻게 구해 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보 길드는 틀림없는 고대의 마력포라 했다.
'그래, 그걸 쓰면 가능할 것이다.'
결계가 어떤 결계든 소멸시켜버릴 수 있을 터다. 안에 있는 것까지 모조리. 또한, 부활을 하겠지만 길태현의 부활 장소는 결계 안. 그러니 바로 잡는 게 가능하다.
'과연!'
해결사다. 역시 김용후만큼 확실한 자는 없다.
"좋습니다. 김용후 준남작님께서 요구하신 추가 보상을 넣어 퀘스트를 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 용후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묘한 술법들을 쓰고, 어쩌면 악마 소환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토벌대를 소홀히 짜선 안 될 것입니다. 사제와 성기사, 이단 심문관, 그리고 4서클 이상의 마법사도 2~3명은 있었으면 합니다."
길태현 체포는 추기경이 직접 맡아 하고 있는 일. 교회와 마탑은 사이가 썩 좋지 않지만 추기경이 힘을 쓴다면 마탑에서 4서클 마법사를 빌려오는 건 어렵지 않을 테고, 마탑이 아니더라도 인맥을 쓰면 충분히 금방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황청의 의뢰를 받아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날폰은 그 자리에서 퀘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잠시 뒤, 용후의 눈앞에 S++등급의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 * *
"저기가 지구……라고?"
길태현의 결계 안. 소환된 중급 악마가 만들어낸 게이트 속을 보며 길태현이 몸을 살짝 떨었다. 악마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국 거리였다. 간판과 도로의 자동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건 틀림없다. 그러나 풍경은 한국이지만 한국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야.'
폐허로 변해 있었지만, 폭탄이 떨어지거나 전투가 벌어져 뒤집힌 풍경이 아니었다. 부서지거나 불에 그을린 자국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저 전투가 벌어졌거나 폭탄이 떨어진 것이라면 있을 리 없는 모습들도 곳곳에 보였다.
살아 움직이는 식물들과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벌레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 곳곳에 있었다.
"정말 지구라고?"
-지구다.
몇 번을 물어도 악마는 그 말만 했다.
스킬로 소환해낸 악마다. 그러니 계약을 맺지 않았어도 테이밍 된 펫처럼 부릴 수 있었다. 그런 악마가 자신을 속일 순 없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지구가 이 처절한 강자존의 야만적인 세계보다 더 살벌한, 아니 아예 지옥처럼 변해 버렸다니.
-키헤에엑!
-케헥, 키힉!
시체를 뜯어 먹는 살아 움직이는 식물과 괴상한 생김새의 벌레들뿐 아니라, 몬스터로 보이는 괴생물체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니, 몬스터가 아니야.'
100레벨 넘게 레벨을 올리는 동안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몬스터를 사냥했지만 저런 생김새의 몬스터는 본 적이 없다.
생김새만 다른 게 아니다. 언데드들 이상의 암흑마력이 느껴졌다.
"대체 뭐야……."
게이트를 통해 보이는 저 거리만 저렇게 변해 버렸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기 중에서도 자신조차도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농후한 암흑마력이 떠돌고 있는 만큼 전 세계가 저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지구로 돌아가 봐야 무슨 소용이야.'
길태현의 표정이 절망스럽게 변했다.
"들어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나?"
길태현이 뼈 위에 검고 거친 가죽만 둘러진 모습으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는 외뿔의 악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면…….
길태현이 게이트로부터 몇 걸음 물러섰다. 차라리 이곳이 낫다. 교황청도 왕도의 경비대도 자신을 계속 쫓진 않을 것이다. 한 몇 년 조용히 잠적해 지내면 잊혀지리라.
하지만 김용후는 걸렸다. 이곳은 남부도 아닌 동부, 작정하고 숨는다면 그게 누구든 자신을 찾지 못하겠지만 김용후는 또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S등급 퀘스트들을 연달아 완벽히 클리어해낸 그 저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
'다른 나라로 가자.'
다른 왕국으로 간다면 김용후라도 자신을 쫓아오진 못할 것이다.
지명수배가 왕국 전역으로 퍼졌을 테니 국경을 넘는 게 쉽지 않겠지만, 단단히 준비를 하면 못 할 건 없다.
"게이트를 없애라."
-없앨 수 없다."
"뭐?"
재밌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악마가 말을 이었다.
-이 게이트 너머 세상에 퍼져 있는 암흑마력이 전부 소실되기 전까지 이 게이트는 닫히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악마의 미소가 더 커졌다.
"그럼 혹시 게이트 너머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수는? 그럴 수도 있어?"
-가능하다.
길태현이 게이트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괴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어딘가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이 게이트를 발견하진 못했지만, 발견한다면 게이트로 들어오는 괴물이 없으란 법이 없었다.
"닫아!"
게이트 너머의 괴물들을 부릴 수 있다면 모를까, 저 괴물들이 이곳으로 넘어온다 생각하자 길태현은 엄청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소름까지 돋았다.
-한 번 연 게이트는 닫히지 않는다
"이런 미친!"
그때였다. 결계 일대에 펼쳐둔 알림 마법진이 침입자가 들어왔음을 알려왔다. 많았다. 파티가 아닌 길드 단위!
"김용후!"
바로 김용후가 떠올랐다. 김용후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이다! 어떻게 찾아왔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심 김용후라면 그 기적의 스킬이란 걸 써서 자신의 결계를 찾아올 수도 있단 생각을 했기에.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길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결계의 열쇠가 없으면 이 결계는 뚫을 수 없어."
잠시 뒤, 결계 밖으로 완전무장을 한 기사와 마법사, 사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김용후의 모습도 보였다.
병력을 멈춰 세운 김용후가 결계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와서 서더니 갑자기 대포를 꺼냈다.
길태현이 헉 소리를 냈다.
"저건……!"
대포의 표면 곳곳에 복잡기괴한 마법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길태현이 언데드 부대의 절반을 날려버렸던 광선포를 떠올린 직후, 김용후가 대포 앞에 블루 마석들을 와르르르 쏟아냈다.
직후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생긴 삐까번쩍한 장비로 무장한 여기사 둘이 어울리지 않게 삽을 꺼내 들고선 블루 마석을 푹푹 퍼선 대포 안에 번갈아가며 넣기 시작했다. 대포가 차츰 빛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