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기적의 스킬 자판기 118화
"성 밖으로 나가서 이전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으세요."
박정석의 마차를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도록 상단용 마차로 개조해 노예 경매장에서 구출해낸 자들을 전부 타게 한 뒤 용후가 박정석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박정석이 마차를 출발시켰고, 용후는 내성으로 향했다. 내성에서 가장 높은 첨탑의 꼭대기 안에 있는 벨베른의 오브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부르간 자작, 또는 그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나 마법사가 벨베른의 오브를 주워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오브가 셋이 방에서 탈출할 때까지 언데드들을 계속 쏟아냈을 테니 셋 중 누구도 그럴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상태창이 다 보여."
내성 안으로 들어가 상태창 스킬을 새로 쓰고 가장 높은 첨탑을 보자, 첨탑 안에 많은 상태창들이 떠올랐다. 꼭대기 층의 방 안엔 아무도 없었지만, 계단엔 거의 똑같은 수의 병사와 기사들이 그대로 있었다.
"스모크!"
첨탑 안으로 들어간 용후가 몸을 연기로 만들어 빠르게 위로 향했다. 이번에도 계단에 모여 있는 병사와 기사들은 연기로 변한 용후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 올랐을 때와 달리 문 바로 앞에도 한 무리의 병사와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상관없어.'
용후가 스모크 상태를 계속 유지한 채로 병사와 기사들 사이사이로 이동해 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문 바닥의 틈새로 연기를 밀어 넣었다. 견고한 문이기에 빠르게 훅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지만, 절대 안 열려 스킬은 문에 실드를 두르는 게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연기는 틈새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연기야?"
"누가 담배 피웠어?"
"마법 아니야?"
꽤 많은 양의 연기가 갑자기 바닥에 깔려 있는 게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담배를 피운다 해도 이 정도로 짙은 연기가 깔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이라면 몸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와야 하는데 어떤 이상 현상도 생기지 않았다.
그사이 연기는 문틈 안으로 전부 들어가 버렸다.
사람이 연기로 변했단 생각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연기에 대한 생각이 병사와 기사들의 머릿속에서 이내 사라졌다.
방 안은 사방에 튄 핏줄기들과 바닥에 흩어져 있는 내장과 살점, 신체 일부들로 괴기스럽다 못해 그로테스크했지만, 언데드는 단 한 마리도 없이 조용했다.
용후가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벨베른의 오브 쪽으로 가 오브를 연기로 휘감았다.
그러자 즉시 오브가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용후가 연기를 깨진 창문 쪽으로 이동시켰다. 난간을 넘어 허공으로 나가자 연기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닥에 도착한 용후는 그 상태로 한참 더 이동한 뒤 스모크 상태를 풀었다.
그러나 용후를 알아보고 손으로 가리키는 자들은 있어도 공격을 하는 유저는 없었다. 병사들도 어딘가로 급히 달려갈 뿐 공격은 하지 않았다.
용후가 픽 웃었다.
'퀘스트를 풀었구나.'
그렇다면 확실하다. 이미 부르간 자작은 몸을 잠식한 암흑마력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자신, 김용후뿐이라 판단한 것이다.
부르간 자작의 상태창은 아직도 교회 안에 있었지만, 용후는 교회를 지나쳐 동쪽 성문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일단 구출한 엘프와 드워프, 수인족들을 그들의 마을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부르간 자작의 애가 바짝 타야 이야기도 쉬워질 테니.'
잠시 뒤 부르간 성을 나간 용후가 들판을 좀 달려 대기 중인 박정석의 마차에 탔다.
"소로브 산맥으로 갑시다."
"예!"
그 즉시 박정석의 마차가 출발했다.
* * *
"여기서부턴 알아서 가겠습니다."
"보답으로 드릴 게 없어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
"꼭 팔켄 마을에 들려 받은 은혜를 갚겠습니다."
박정석의 마차가 소로브 산맥의 초입에서 멈추자, 수인족들이 마차에서 내려 용후에게 다가와 말했다.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고, 또 미안해하고 있단 걸 자신을 보는 눈빛만 봐도 용후는 알 수 있었다.
"언제든 들리세요. 환영입니다. 제 영지 안에선 시켄들 상단 같은 자들이 활개 치고 다닐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
찾아와 보답을 꼭 하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엘프와 드워프들 못지않게 보는 게 쉽지 않은 게 수인족들.
그런 수인족들이 자신의 영지 안에, 팔켄 마을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영지의 가치는 더 오르게 될 것이다.
또한, 숲과 산맥을 엘프보다 드워프들보다 더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수인족들은 약초에 빠삭했고, 그런 만큼 귀한, 보물과도 같은 약초와 영초를 많이 갖고 있다.
그걸 보답으로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잘하면 거래까지도 하게 될 수도 있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인족들이 떠났고, 이어 드워프 셋이 용후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소로브 산맥의 드워프들이 아니었다.
비클겔 산맥에서 살던 자들. 그런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했다. 정확히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노예 각인이 새겨져 노예 경매장으로까지 끌려갔던 저희들입니다. 함정에 빠졌던 것이라 해도, 그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지요. 고향에 있는 형제들은 저흴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그럼 소로브 산맥에 있는 드워프 마을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들과 친분이 있습니다. 제가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 또한 저희를 같은 드워프로 인정해주지 않을 겁니다. 고향의 드워프들이, 이 산맥의 드워프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드워프들의 높은 자긍심이 허락하지 못하는 겁니다."
자신들도 드워프기에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단 말을 덧붙인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드워프가, 잠시 주저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용후 님, 저흴 데려가 주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용후는 놀랐다. 드워프들은 인간을 경계하다 못해 배척하는 자들.
그런 드워프들이 인간인 자신을 따르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십니까?"
용후로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 소로브 산맥 드워프들과 병장기 거래를 성사시켰기에 매달 드워프들의 병장기를 가져다 팔 수 있지만, 이 세 명의 드워프들이 자신의 대장장이가 되어 준다면 더 많은 병장기를 팔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드워프들은 그저 대장장이가 아니라 뛰어난 기술자들이기도 하니.
"진심입니다."
"용후 님이 아니었다면 죽는 게 나을 치욕적인 일들을 죽을 때까지 겪으며 고통받았을 겁니다. 용후 님께 받은 은혜를 꼭 갚고 싶습니다."
"부디 저흴 거둬주십시오!"
드워프들이 용후 앞에서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드워프 왕에게나 하는 행동!
"좋습니다. 그럼 여러분을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드워프 셋은 고용의 뜻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여러분의 노동력을 빌리겠단 뜻입니다."
드워프들이 평생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향이 그리워지는 날이, 드워프들의 동굴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랬기에 용후는 고용 관계가 낫다 생각했다.
자신을 도우며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면, 이 셋은 바닥으로 추락한 드워프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다시 세울 수 있을 테고, 그럼 마을로 돌아갈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용후는 철저히 이해득실을 따져 움직이지만, 마음에 온기를 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갈 곳이 생겼단 것만으로도 세 드워프들은 기쁜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5,000 오릅니다
"이 산맥 안에 있는 엘프 마을에 들려야 합니다. 이 마부와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엘프 분들은 소로브 산맥에서의 일이 끝나면 비클겔 산맥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엘프 5명의 레벨은 전부 80 이상, 그러니 자신까지 갈 필요 없이 박정석의 마차만 빌려주면 될 것이다.
원래는 마차에서 말 한 필을 풀어 그걸 타고 부르간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일행으로 드워프가 셋이나 생겼으니 말을 타고 가는 건 힘들다.
하지만 급할 게 없다. 어차피 충분히 시간을 끌어 부르간 자작의 애를 바짝 태울 작정이었으니.
"가시죠."
용후가 엘로이스를 데리고 산맥을 올랐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엘프 마을에 도착해 장로 카헨을 만나자, 용후의 눈앞에 바로 퀘스트 클리어창이 떠올랐다.
-레벨이 1 오릅니다
-생명력이 50 오릅니다
-정령 친화력이 50 오릅니다
-엘프 카헨으로부터 매달 100개의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살 수 있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용후에게 인사를 한 카헨이 엘로이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주륵 흘렸다.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엘로이스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용후 쪽으로 돌아서 또 감사하단 인사를 했다.
-카헨의 호감도가 500 오릅니다
-엘로이스의 호감도가 700 오릅니다
용후가 그 알림창과 두 부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 * *
"저 드워프들 낯이 익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노예 각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부르간 성 광장. 김용후가 있다는 주점 안으로 들어간 기사 골디힌과 마법사 카르스가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 붉은 눈의 드워프는 틀림없이 시켄들 상단이 붙잡아 노예 각인을 새겼던 그 드워프입니다. 혹 김용후가 노예 각인을 없애버린 것은 아닌지……."
"시켄들 상단의 노예 각인은 마법도 주술도 아닌 연금술을 사용해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 노예 각인을 지울 수 있을 리가요……."
그러나 카르스는 자신이 한 말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김용후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기에. 자신이 가진 상식으로 판단하려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저 드워프들이 경매장의 그 드워프들이 맞다면 차라리 그게 더 잘된 일이다. 김용후의 치료 스킬이 그 정도로 대단하단 뜻이니.
소곤대는 대화를 멈춘 골디힌과 카르스가 용후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자신들을 봤음에도 김용후가 계속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건 자신들이 온 이유를 알고 있단 뜻.
역시 김용후는 영주님을 치료할 목적으로, 치료비를 뜯어낼 작정으로 그 오브를 쓴 것이다. 빌어먹을 놈. 얼마를 처먹으려는 속셈일까.
골디힌과 카르스가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됐다.
"부르간 자작님을 모시고 있는 기사단장 골디힌이라고 합니다. 부탁이 있어 김용후 님을 찾아왔습니다."
대꾸하지 않고 용후가 맥주를 계속 마시고 파스타를 후르륵거리며 먹었다. 드워프 셋도 두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곤 왁자하게 떠들며 맥주를 마시고 튀긴 닭 다리를 뜯어댔다.
"괴한이 던진, 사이한 흑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로 인해 영주님께서 큰 상처를 입고 추악한 술법에 걸리셨습니다."
감정이 듬뿍 담긴 카르스의 말에 용후가 입가에 픽 웃음을 흘렸다.
"어찌나 사이하고 사악한지 교회의 주교도 치료를 해내지 못했습니다. 홀더러스 남작님의 따님을 치료하셨다 들었습니다.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영주님께서 치료비는 원하시는 만큼을 지불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제야 용후가 먹는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의 술법이라면 완치할 수 있단 확신은 못 합니다."
대꾸를 해주자 살았단 표정을 지으며 카르스가 얼른 말을 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영주님은 지금 교회에 계십니다. 일단, 저희와 함께 가셔서 상처를 봐주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흑마법에 당한 거라면 완치할 수 있단 보장은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바쁜 시간을 할애하고 생명력과 큰 심력을 소모해 치료했는데 완치가 안 됐다고 치료비를 돌려달라거나 하면 곤란합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절대 섭섭지 않은 치료비를 드릴 것입니다."
"홀더러스 남작님의 따님이 치료된 이야길 들어 알고 있다면, 홀더러스 남작님이 치료비로 뭘 줬는지도 않고 있겠군요."
"……."
카르스와 골디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고 있다. 홀더러스 남작이 딸을 치료한 대가로 김용후에게 내놓은 건 무랴 영지의 땅 일부였다.
영주님은 김용후를 죽이려 했다. 그러니 홀더러스 남작보다 더 요구하면 했지 덜 하진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가시지요."
일단 영주를 치료하고 자신들도 치료되고 봐야 한다. 방법을 찾는 건 그 뒤다.
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부하처럼 김용후를 뒤따르는 드워프 셋의 모습에 골디힌과 카르스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