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기적의 스킬 자판기 097화
박정석의 마차는 남쪽 성문 근처의 마차 대기소에 있었다. 시켄들 상단에서 멀지 않았다.
그리고 용후와 드워프 마이만이 대화를 한 주택가는 시켄들 상단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랬기에 용후와 마이만은 금방 남쪽 성문의 마차 대기소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박정석이 마차를 출발시켜 남쪽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들판으로 나와선 전속력으로 달렸다.
용후는 말들에게 리커버리 마법까지 걸었다. 그렇게 박정석의 마차는 부르간 성을 출발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소로브 산맥에 도착했다.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부르간 성으로 돌아가 있으세요."
원래 시켄들 상단의 목적은 소로브 산맥에 사는 드워프들에게 식량 문제를 일으켜 병장기 거래를 하도록 만들고, 드워프들도 납치해 노예로 팔 생각이었을 터.
그런데 그런 속내와 상단의 비밀까지도 아는 듯한 자신으로 인해 일이 그르칠 수 있다 판단할 테니, 드워프들과의 거래는 포기하고 자신을 잡고 마이만 한 명이라도 노예로 만들어 드워프 경매를 하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분명 추격대를 보냈을 터다.
"소로브 산맥으로 오는 무리와 마주치면 안 됩니다.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가지 말고 돌아서 가세요."
소로브 산맥 방향에서 오는 박정석을 본다면 자신의 마부인 걸 눈치채고 붙잡아 이용하려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성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정석이 마차를 돌려 떠났고, 용후와 마이만은 산맥으로 들어갔다.
소로브 산맥을 잘 아는 마이만이 앞장을 서 길을 헤맬 일은 없었고, 몬스터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초입을 지나 3시간,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했고 반대로 나무와 수풀은 훨씬 우거졌다.
마이만이 속도를 줄였다. 산맥 중턱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 용후의 눈에 무리를 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는 칼날 멧돼지 떼가 보였다. 전부 등에 호랑이 같은 줄무늬를 갖고 있었다.
"소로브 산맥에 서식하는 모든 줄무늬 칼날 멧돼지들이 독을 갖게 된 건 아니지만 거의 90%는 갖고 있습니다. 몸속에 독을 갖고 있는 줄무늬 칼날 멧돼지들은 저렇게 위로 솟은 송곳니가 녹색을 띠게 됩니다. ……정말 독을 전부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시켄들 상단이 드워프들을 꿰어내기 위해 소로브 산맥의 줄무늬 칼날 멧돼지들에게 독을 주입한 건 틀림없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독이 아니라, 주입된 독에 의한 현상이니 그건 일종에 상태 이상.
그렇다면 심장에 새겨진 저주도 고치는 쓰다듬으면 다 고쳐 스킬로 치료할 수 있다.
혹 쓰다듬으면 다 고쳐 스킬로 해독되지 않는다면, 시켄들 상단을 통해 해독제나 해독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방법도 있다.
정상적인 상단이 아니니 협조하도록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니.
스릉!
단검을 뽑아 든 용후가 줄무늬 칼날 멧돼지 무리를 향해 달렸다.
소로브 산맥은 100레벨이 넘는 몬스터들도 많이 서식하는 고렙 사냥터, 그런 만큼 고작 멧돼지 계열의 몬스터인 데도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레벨은 40이 넘었다.
그러니 자동사냥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노멀 등급의 단검으로 한 번 찌르거나 베는 정도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부상만 입힌 뒤, 쓰다듬으면 다 고쳐 스킬을 쓰면 상처도 치료할 수 있고 몸속의 독도 해독할 수 있다.
-쿠헤에에에엑!
한 칼날 멧돼지의 엉덩이 부분에 용후가 단검을 찔러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줄무늬 칼날 멧돼지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거의 죽기 직전. 그사이 다른 줄무늬 칼날 멧돼지들은 다 도망갔고, 용후는 잡은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엉덩이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용후가 다가온 마이만을 올려다보며 말하곤, 경련을 일으키며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는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옆구리에 오른손을 올렸다.
'쓰다듬으면 다 고쳐.'
용후의 손에 은은한 빛이 맺혔다. 그 빛이 점점 커지며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몸을 감쌌다.
마이만의 눈이 커졌다. 상처가 재생되는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그때 줄무늬 칼날 멧돼지가 다시 활기를 되찾곤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뒷덜미를 꽉 붙잡은 용후가 무릎으로 등을 내리눌러 단단히 제압했다.
마이만이 얼른 머리 쪽으로 돌아가 송곳니를 살폈다.
"……어!"
"어떻습니까?"
"벼, 변했습니다! 흰색으로 돌아왔어요!"
"몸속의 살과 피도 확인해 보죠."
독을 갖게 된 줄무늬 칼날 멧돼지들은 살과 피도 녹색으로 변했다 했다.
그러니 독이 완전히 해독됐다면 살과 피도 선홍빛이나 붉은색으로 돌아왔을 터.
"제가 하겠습니다."
마이만이 로브 속에서 도끼를 꺼냈다. 그리고 그 도끼의 자루를 양손으로 쥐곤 단숨에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목으로 휘둘렀다.
써걱!
깔끔히 줄무늬 칼날 멧돼지의 목이 잘렸고,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반 바퀴를 굴렀다.
마이만의 눈에도 용후의 눈에도 잘 보였다. 머리의 절단면이 녹색이 아닌 붉은색이었다.
"하하! 됐습니다! 독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 스킬은 계속 쓸 수 있습니다. 드워프 분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줄무늬 칼날 멧돼지들을 잡아 온다면, 해독 작업은 금방 끝날 겁니다. 그러고 나면 물론 새끼들에게 독이 전이되는 일도 없을 거고요."
그리고 시켄들 상단도 독을 쓰는 게 소용없어졌단 걸 알면 더 이 짓을 해오지 않을 것이다.
새끼한테까지 전이되는, 특별한 재료와 제작법이 사용됐을 게 분명한 이런 독을 쓰려면 돈이 엄청 깨져나갈 테니.
"해독 작업이 다 끝나면 그땐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보단 장로님들이 더 마도 마법 인형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실 겁니다. 장로님들께 용후 님을 소개시켜 드리죠."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함정에 빠질 뻔한 저희를 도와주시고 식량 문제도 해결해 주셨으니, 분명 도움을 주실 겁니다. 그럼 저희 드워프 마을이 있는 동굴로 가시죠."
마이만이 앞장을 섰고 용후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로부터 1시간 뒤, 추격자를 의식해 틈틈이 상태창이 다 보여 스킬을 쓰며 뒤를 보던 용후의 눈에 10개 정도 되는 상태창이 들어왔다.
정확히 자신들과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헤이스트 계열의 마법을 쓰고 있는지 자신들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시켄들 상단이 보낸 추격자가 틀림없었다. 곧 따라잡힐 듯했다.
"역시 추격자가 붙었습니다. 처리하고 가죠."
용후가 마이만을 향해 말하곤 멈춰 섰다. 그러곤 성검 벨도른과 리볼버(+4)를 꺼내 들었다.
"청룡 길드라."
총 12명이었다. 그 12명의 상태창에 전부 그 길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어? 멈췄습니다!"
"눈치챘네요."
"드워프 레벨은 105~110 정도, 유저 레벨은 100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유저의 레벨이 100도 안 된단 말에 청룡 길드의 3파티장 한성태는 유저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렇게 아홉은 드워프 잡고, 그렇게 셋은 유저 잡아."
99레벨과 100레벨은 단 1레벨 차이라 해도 그 격차가 아득히 벌어진다.
그러니 제아무리 대단한 장비로 무장하고 유니크 에픽 등급 스킬을 쓴다 해도, 잡는 데 애를 먹을 일은 없었다.
자신은 물론 파티원들의 레벨도 다 100이 넘고, 게다가 전부 유니크 에픽 등급 스킬을 한두 개씩 갖고 있다. 그러니 파티원 3명만 붙여도 저 유저는 도망조차 치지 못할 것이다.
"드워프한테 디버프 다 걸고 완전히 포위한 뒤에 공격한다. 좀 다치게 하는 건 괜찮아도 팔다리, 그리고 손가락도 절단시키면 안 돼."
드워프들의 도끼술은 유명했다. 기사들의 검술에 뒤지지 않는, 그 이상의 깊이를 담고 있는 게 드워프들의 도끼술이었다.
부족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어도 다 그랬다.
그러니 느껴지는 기운의 양과 질을 통해 가늠한 레벨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었다.
"파이어볼!"
유저 쪽으로 달려가던 세 유저 중 한 명, 마법사 고창욱이 유저를 향해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불꽃을 날렸다.
과연 3서클링으로 만들어낸 8레벨의 파이어볼! 크기도 크기지만 날아가는 속도가 화살 같았다.
그걸 본 파티장 한성태는 세 파티원과 유저 쪽으론 더 이상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한성태가 더 속도를 냈다. 그리고 가장 선두로 치고 나가며 마이만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일단 자신이 드워프와 정면에서 맞붙으며 시간을 벌면, 파티원들이 드워프에게 디버프를 먹이고 둥글게 에워쌀 것이다.
거기에 유저를 잡은 파티원 셋까지 온다면, 드워프를 놓칠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투아앙!
갑자기 그런 소리가 들렸다. 마법이 터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총성 같은 소리!
한성태의 레벨은 132. 온갖 일을 다 겪으며 지금의 레벨을 올린 만큼, 권총을 쏘는 유저를 본 적이 있고 싸워본 적도 있었다.
그러니 권총의 총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리가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오싹해지는 불길함을 느낀 한성태가 홱 유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달리는 속도가 줄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유저는 멀쩡했다. 화상을 좀 입은 게 다였다. 오히려 고창욱이 바닥에 쓰러져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피를 쏟으며.
"차, 창욱이가 죽었습니다!"
"권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성태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단 표정. 아무리 권총에 맞았다 해도 유저와 고창욱 사이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고창욱이 입고 있는 로브는 고대의 유물인 미실로 짜 만든 로브. 방어력이 웬만한 에픽 등급 갑옷 못지않다.
거기다 만만한 상대라 해도 매사에 신중한 고창욱이 몸에 실드도 걸지 않고 공격을 했을 리 없다.
즉 80m 이상 되는 거리에서, 맥스 레벨의 실드를 뚫고, 미실 로브도 뚫고, 고창욱을 단 한 발로 즉사시킨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강화 권총!"
유저가 손에 들고 있는 권총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라면 한두 번이 아니라 그 이상 강화가 이루어졌단 뜻!
'빌어먹을…….'
잡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김명호, 채대현, 이수연! 유저 쪽으로 가서 도와!"
세 파티원이 방향을 틀어 용후 쪽으로 달렸다. 거의 동시에 다시 총성이 울렸다.
셋 중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져 피를 사방으로 뿌리며 비탈을 굴러 내려갔다.
몸에 완전히 힘이 빠져 있었다. 죽었단 뜻이었다. 한성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냥 적당히 셋을 불러 유저 쪽으로 보낸 게 아니다. 셋 다 스피드가 장기인 파티원들.
그런데 3발을 쏴서 2발을 명중시켰다. 그렇다면 다른 파티원들은 백발백중으로 명중시킬 수 있다 봐야 했다.
투아앙!
"크악!"
유저의 총을 잘 피하나 싶던 김명호도 결국 거리를 완전히 좁히지 못하고 총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한성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벨이 전부 100이 넘는 초고렙 유저들, 그것도 부르간 성에서 활동하는 길드 중 최강인 청룡 길드의 길드원들, 이렇게 간단히 잡힐 자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내가 잡는다. 너희들은 계속 드워프 공격해."
한성태가 용후를 향해 달렸다. 그의 직업은 쉐도우 어쌔신.
들판이었다면 스피드가 장기인 세 파티원을 전부 잡은 저 권총을 피하는 건 자신도 불가능하겠지만, 곳곳에 거목이 솟아 있는 숲, 나무를 엄폐물 삼아 달린다면 거리를 좁혀 근접전투로 몰고 가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투앙! 투앙투앙!
용후가 달려오는 한성태을 겨눠 리볼버(+4)를 몇 발 더 쐈다.
그러나 조금 전 잡은 셋보다 더 빨랐고, 나무를 이용해가며 거리를 좁혀오니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용후가 결국 사격을 멈췄다. 그때 한성태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가속 스킬이었다.
남은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한성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용후가 자동사냥 스킬을 썼다.
"잡았다!"
한성태가 외치며 검에 공격 스킬을 담아 용후의 허리를 향해 휘둘렀다. 검속이 대폭 증가하고, 움직임 보정까지 들어가는 에픽 등급 스킬! 거기다 연속기였다.
혹 첫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낸다 해도 검술 같은 움직임을 펼치며 3번의 공격이 더 이어질 테니 절대 다 피하고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카앙!
"……큭!"
검과 검이 부딪쳤다. 제대로 막은 것도 제대로 흘린 것도 아니었다.
'뭐야 이건!'
그 중간. 그래서였다. 한성태의 몸이 순간 균형을 잃었다. 직후 유저의 검이 허리로 휘둘러졌다.
아직 균형을 완전히 잡지 못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어!
촥!
"……큭!"
한성태의 허리가 절반 가까이 잘려나갔다. 그 공격에 결국 스킬도 풀렸다.
용후를 지나쳐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간 한성태의 옆구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