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기적의 스킬 자판기 092화
"베킨 남작령의 피젠 들판과 맨드칸 숲, 졸치센 마을과 쿨랑 마을이 김용후에게 넘어갔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헨슬런 백작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빌로도 남작령이 통째로 김용후의 손에 넘어갔고, 보름도 지나지 않아 베킨 남작령의 1/10이 김용후의 손에 추가로 들어갔다.
게다가 홀더러스 남작은 아예 김용후 쪽으로 붙어버린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김용후가 홀더러스 남작령을 파칼 숲 인근의 저클 들판만을 먹고 물러날 리 없으니.
저클 들판 동쪽 일대는 밀 농사도 하고 있는 아주 기름진 땅이지만, 그렇다 해도 홀더러스 영지의 1/100 정도밖에 안 되는 넓이, 홀더러스 남작과 김용후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봐야 했다.
헨슬런 백작이 홀더러스 남작의 아픈 딸이 완치됐단 보고를 들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심장에 새겨진 저주라 하지 않았던가?"
"맞습니다. 교황청의 대사제들도 루물 마탑의 마탑주도 풀지 못해 10년을 앓던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김용후가 풀었다?"
"그렇게 추정됩니다. 빌로도 남작과의 영지전 도중 김용후와 홀더러스 남작이 만났고, 이후 딸이 성을 떠났던 것도 확인됐습니다."
"교황청도 루물 마탑도 풀지 못한 저주를 풀었다……? 정말 호전이 아닌 완치란 말이지?"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던 홀더러스 남작의 딸이 다 보고 다 듣고 스스로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완치가 되지 않았다면 한 달 가까이 돼 가는 지금까지 그렇게 멀쩡할 순 없을 것입니다."
교황청과 루물 마탑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스킬이라니. 레전드리라 불리는 스킬 중에도 그런 스킬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없었다 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할 순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한히 부활하는 몬스터들이 생겨나고, 레벨업이니 스킬이니 하는 정체불명의 힘을 가진 이세계인들이 넘어오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됐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김용후는 기적의 스킬들을 계속 새로 얻을 수 있는 듯하군."
헨슬런 백작의 그 말에 비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단 증거는 없었다.
말을 삼가는 게 좋았다. 그러나 비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다. 운이 좋은 것도 한두 번이다.
그런 스킬들만 얻을 수 있는, 김용후만이 아는 방법이나 얻는 루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스킬만 믿고 날뛰는 놈이 아니야."
머리가 비상했다. 헨슬런 백작은 김용후가 베킨 남작령까지도 통째로 삼키거나, 삼키려 들길 바랬다.
그래야 더 많은 주목을 끌 테고, 그의 비정상적인 강함과 폭주하듯 날뛰는 행동에 많은 귀족이 경계를 하고 공포를 느끼게 될 테니.
그러나 김용후는 명분이 확실한 빌로도 남작령만 전부 삼키고 베킨 남작령은 딱 탈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삼켰다.
그 양이 참 절묘했다. 더구나 빌로도 남작의 가족들을 살려 보내주는, 그동안 쌓은 영웅의 이미지에 걸맞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거기에 적이었던 홀더러스 남작의 딸까지도 치료해 줬다.
지금, 김용후의 영지 전쟁을 두고 그를 비난하거나 자격 운운이나 과하단 말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김용후의 귀족으로서의 입지는 확실히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비리마가 아니다."
자신의, 남부의 패자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자는. 지금 헨슬런 백작은 승작을 해 백작 작위를 손에 넣은 비리마보다 김용후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 승작조차 김용후가 만들어준 게 아니던가.
'일단, 김용후가 가진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
갖고 있는 스킬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그 스킬들을 어떻게 얻었고 또 어떻게 새롭게 얻고 있는지.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면, 김용후에게 밀려날 수도 있겠단 위기감이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비리마 영지에서 활동하는 1급 정보원들이 총 몇 명이지?"
"12명입니다."
"그중 6명…… 아니 8명을 김용후의 영지로 보내라. 그리고 2급 3급 정보원들도 최대한 많이 넣어."
"첩자로도 넣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헨슬런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더 상황을 두고 보지."
마법사 알렉스가 첩자란 걸 알아낸 게 김용후다. 그것도 고작 두세 번 비리마 성에 드나든 게 다인 데도. 분명 첩자를 알아낼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는 것일 터다.
"은밀히, 아주 조심히 행동하라 전해라. 발각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테니."
비서가 집무실을 나갔고, 헨슬런 백작은 의자에 그대로 앉은 채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남부의 패자 자리를 20년간 지켜왔다. 기회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오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 * *
영지 전쟁을 끝내고 팔켄 마을로 돌아온 용후는 먼저 교회부터 들렸다.
트리던 주교로부터 대축복을 받아 스킬 자판기에서 스킬을 사기 위해서였다.
현재 용후는 벨베른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얻은 신성력 스탯과 1급 성검에 붙어 있는 신성력 옵션으로 상당한 수치의 신성력 스탯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트리던의 신성력이 이전과 같다 해도, 대축복으로 얻게 되는 행운 효과는 훨씬 클 것이었다.
금화를 기부하고 트리던으로부터 대축복을 받은 용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한 대로 행운 효과가 이전보다 2배 이상, 3배 가까이 올라 있었다.
이 수치면 스킬 자판기에서 두 번 더는 힘들어도 한 번 더에 당첨될 확률은 엄청 높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트리던과 이런저런 대화를 충분히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겠지만, 용후는 대축복을 받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500골드를 기부하며 트리던의 호감도를 200 이상 올리기도 했고, 사실 이젠 굳이 트리던의 호감을 더 사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비리마 성의 대주교의 호감도도 트리던 못지않게 올려놨고, 이젠 용후가 애를 쓰지 않아도 사제들이 먼저 그와 친해지고자 알아서들 접근해올 것이었다.
"짧았지만…… 오랜만에 용후 형제님과 차를 함께 마시며 대화를 나눠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이젠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된 듯합니다."
트리던이 이전보다 확 짧아진 담소에 섭섭함을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교회 정문까지 깍듯한 태도로 용후를 배웅했다.
"저 또한 트리던 주교님과의 대화는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또 들르겠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변명 없이 가볍게 대꾸를 한 용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갔다.
신성술 버튼까진 무리일 수 있지만, 다른 버튼들은 다 누를 수 있을 것이었다.
"자판기야 내가 왔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인벤토리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낸 용후가, 저절로 열린 대량 투입구에 금화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 금화를 쏟아부었다.
촤르르르르르륵!
* * *
1천 골드가 든 금화 주머니를 한 번 더 쏟아붓자 금화 투입구가 저절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버튼들이 더 밝은 빛을 냈다. 그러나 신성술 버튼만은 빛이 나지 않았다.
금화는 충분했다. 명성이 부족했다. 영지 전쟁을 통해 벨베른 퀘스트와 악마교 퀘스트를 클리어했을 때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는데도. 신성술 버튼의 가격이 이전보다 1.5배가량 더 올랐기 때문이었다.
"치료 스킬은 쓰다듬으면 다 고쳐 스킬이면 돼."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어떤 상처든 고칠 수 있고, 교황청도 마탑도 풀지 못한 상태 이상도 풀어냈다.
스킬 레벨이 이제 5레벨일 뿐인 데도. 분명 지금보다 스킬 레벨이 더 오르고나 맥스를 찍으면 질병 치료도 가능해질 것이다.
현자의 강화석을 통한 강화까지 이루어진다면, 그 이상도 해낼 터. 충분히 만능 치료술이 될 수 있다.
용후가 손을 뻗었다가 다시 되돌리고 다시 뻗고 되돌리고를 반복했다. 뭐든 다 누르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전투 관련 스킬들이 더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랜덤 버튼이었다. 용후는 랜덤 버튼이 가장 기대되고 또 즐거웠다.
가장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스킬이 나오는 게 랜덤 버튼이었다. 그러면서도 효과는 사기적! 이번에도 분명 그런 스킬이 나와 줄 것이다.
확실히 결정을 내린 용후가 랜덤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덜컹덜컹!
배출구로 캡슐이 떨어졌다. 용후가 상체를 숙여 캡슐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돌렸다.
캡슐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용후의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을 얻었습니다.
"……뭐?"
기상천외한 스킬이 나올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랬음에도 허를 찔린 기분. 그래도 지금 자신에게 꼭 필요한 스킬일 것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용후가 무럭무럭 자라라 스킬의 상태창을 열었다.
"하하! 딱 좋네!"
역시나! 전투 스킬도, 육체를 강인하게 만들어주는 스킬도 아니었지만 용후는 완전히 만족했다.
어떤 작물이든 무럭무럭 자라도록 해주는, 풍년을 만들어주는 스킬이었다.
스킬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풍년을 넘어 비정상적인 수준의 수확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말라죽은 식물을 살려낼 수도 있었다.
빌로도 남작령엔 많은 밀과 보리 재배지가 있다.
그리고 홀더러스 남작에게 받은 저클 들판엔 특히 아주 기름진 밀 재배지가 있고, 베킨 남작에게 빼앗은 땅들엔 과수원이 많았다.
그 작물 재배지와 과수원에 이 스킬을 쓰면, 두 배 세 배 이상의 수확을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수확한 밀과 보리, 과일들의 질도 훨씬 오를 터.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거기다 광산까지 개발하면.'
그리 머지않아 비리마 남작이나 헨슬런 백작 못지않은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한 번 더에 당첨됐습니다
"좋아."
활짝 웃은 용후가 재차 랜덤 버튼을 눌렀다. 랜덤 버튼이 다시 점멸하고 배출구로 캡슐이 떨어졌다.
방금 연 캡슐은 저절로 소멸이 된 상태, 용후가 상체를 숙여 배출구로 손을 넣어 캡슐을 꺼냈다.
-이쪽 스킬을 얻었습니다
"이쪽?"
스킬명이 중간에 짤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상태창을 열어보니 이번에도 아주 제대로 나온 스킬이었다.
찾고자 하는 상대, 또는 물건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려주는 스킬이었다.
거리는 무한대, 단 딱 방향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탐색 마법과 함께 쓴다면, 이 스킬로 찾아내지 못하는 건 없을 것이다.
마침 용후에겐 찾아야 될 사람이 둘 있었다. 버거튼과 드워프. 비리마 남작이 현상수배를 걸었지만 버거튼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스킬 자판기는 누구도 옮길 수 없고 버튼을 누를 수도 없지만, 그래도 스킬 자판기가 세상에 많이 알려져 좋을 게 없었다.
"이참에 버거튼을 찾아내 확실히 처리하자."
또 한 명, 드워프를 찾으려는 건 마도 마법 인형들을 더 잘 만들고 싶어서였다.
지금도 블루 마석이 있으면 뭐든 다 만들어 스킬로 마도 마법 인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소세토 유적지에 있던 마도 마법 인형들에 비하면 성능이 많이 떨어졌다.
명령도 기본적인 것만 수행할 수 있고, 전투력도 하급 병사 정도 수준.
소세토 유적지에 있던 마도 마법 인형 중엔 오러를 쓰던 마법 인형도 있었다.
설계도와 구동 원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소세토 유적지에 있던 마도 마법 인형 수준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마법 기계학은 드워프들의 기술, 드워프라면 마법사들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용후는 드워프들과 거래도 터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영지 안에서 드워프들의 무기와 방어구를 팔 수 있다면, 영지의 명성이 훨씬 더 오를 테고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을 테니.
"일단 버거튼부터."
그런데 어느 쪽 스킬을 쓰자 버거튼이 있는 곳과 루물 마탑의 방향이 같았다.
용후는 루물 마탑도 들를 생각이었다. 벨베른의 지하창고와 악마교의 금고에서 얻은 흑마법 재료들과 아이템들이 아직도 인벤토리에 많이 남아 있었다.
이 아이템들을 마탑에 팔고, 그린 마석과 블루 마석을 사야 했다. 그린 마석은 몇 발 남지 않은 총알을 만들기 위해, 블루 마석은 마도 마법 인형들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
빌로도 영지를 통째로 먹으며 꽤 많은 병사와 기사들을 흡수했지만, 그리고 이전에 고용한 용병들에 추가로 고용한 용병들도 있지만, 그 정도 수로 홀더러스 영지와 베킨 영지 일부까지 포함하게 된 영지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기엔 부족했다.
마도 마법 인형으로 부족한 일손과 치안 병력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군대까지도 만들 수 있다.
집에서 나온 용후가 마을의 북쪽 출구로 갔다. 그곳에 박정석의 마차가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용후가 박정석의 마차에 탔다.
"일단, 루물 마탑 방향으로 갑시다."
마석 광산을 갖고 있고 유적지 공략도 하는 초대형 마탑. 월간 모험책에서 본 적이 있다.
마침 이 시기엔 아이템 경매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좋은 행운템이 있다면 자신이 사서 쓰고, 마도 마법 인형들에게 무장시킬 유니크 등급 이상의 아이템도 사기로 했다.
박정석의 마차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