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기적의 스킬 자판기 091화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트린이 용후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듯 달렸다. 그런데 트린이 지나간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트린이 흘린 피 때문이었다. 왼쪽 어깨였다. 견갑이 찌그러져 있고, 가운데 부분은 검게 그을려 동그랗게 뚫려 있었다. 총알에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트린은 계속 움직였고, 다시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강기를 줄기줄기 피어 올렸다.
그러자 견갑 구멍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멎었다. 상처가 재생된 건 아니었다.
강기를 사용해 출혈 부위를 막은 것이었다. 능숙한 익스퍼트 기사기에 가능한 기술!
그때, 트린이 지면을 박찼다. 검날에 오러 블레이드가 휘감기고, 검 길이보다 10㎝ 이상 길어지며 찰나에 검의 형상을 완전히 갖췄다. 그 오러 블레이드가 용후의 가슴으로 휘둘러졌다.
캉!
용후의 몸이 정확히 타이밍을 맞춰 트린의 베기 공격을 옆으로 흘리고, 순간 중심이 조금 흐트러진 트린을 향해 반격까지 날렸다. 트린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렸다.
카앙!
"……큭!"
빛의 검이 오러가 둘러진 방패 표면을 깊게 패고 긴 자국을 만들며 오른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러곤 그 즉시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캉!
이번에도 방패였다. 그러나 이번엔 트린이 막아낸 게 아니었다. 용후의 몸이 일부러 방패를 향해 빛의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트린의 어깨에서 다시 피가 새어 나왔다. 제대로 막아냈다면 상처를 틀어막고 있던 강기가 흐트러지지 않았겠지만, 방패에 둘린 오러가 터져나가고 왼팔이 옆으로 크게 젖혀지며 특히 왼팔에 둘린 강기가 크게 요동을 친 것!
"……크으윽!"
트린의 입에서 신음이 연거푸 새어 나왔다. 찔리고 베인 정도가 아니라 어깨가 동그랗게 구멍이 났기에 출혈량과 통증이 상당했다.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악물린 이가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트린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다.
김용후의 공격이 쉴 틈 없이 퍼부어졌다. 빠르고 공격 하나하나에 큰 힘이 실려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검술의 움직임!
그때였다.
"빌어먹을……!"
권총의 탄창이 열리더니 김용후의 주위를 돌던 총알들이 이번에도 저절로 움직여 탄창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발이 다 들어가는데 4~5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속 검을 휘두르며 몸이 격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데도.
"이번에도 피해 봐라!"
"하하! 기사단장이란 놈도 별거 아니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유저 용병들의 도발에 트린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깨의 출혈을 다시 막긴 했지만 이미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쉽게는 안 당한다!'
첫 전투 때, 기사들이 그리고 파므리엘이 김용후의 권총에 어떻게 당했는지 자세히 보지 못했다. 둘은 부지불식간에 당했고, 파므리엘은 거리가 멀고 유저들에 모습이 가려졌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직접 보고 겼었다. 날아오는 총알을 눈으로 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파훼법이 좀 더 감이 잡혔다.
트린이 방패를 옆으로 내던졌다. 부상을 입은 왼팔로 방패를 들고 있어 봐야 약점이 될 뿐이란 생각이었다.
또, 방패를 버리면 몸이 훨씬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운 동작이 가능하다.
트린이 총구가 정면으로 오지 않게 하면서 슬금슬금 움직였다. 김용후가 총구를 움직이면, 그 총구를 따라 함께 움직여 계속 총구가 정면을 향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할 수 있다!'
트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김용후의 총구가 휙 빠르게 움직였다.
트린이 옆으로 몸을 날리며 낙법으로 바닥을 회전했다. 직후 총성이 울렸다.
투앙!
총알은 바닥에 박히고, 트린은 회전과 동시에 몸을 일으켜 조금 전의 그 각도를 만들었다.
투앙!
이번에도 총알은 빗나갔다. 트린은 한 발 더 김용후가 총알을 쏘도록 유인했다. 김용후의 총구가 쫓아왔다.
투앙!
또 한 발을 쏘게 만든 트린이 방향을 홱 크게 틀었다. 그러곤 돌진! 트린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강기가 불꽃처럼 변해 치솟았다.
직후, 권총의 총구가 굉음을 토하며 불을 뿜었다.
트린이 바닥을 굴러 회전했다. 6발을 전부 쐈다면 전부 피하기 어려웠겠지만, 3발을 소모시켜 놨기에 연달아 날아온 총알은 3발.
총알에 스치지도 않은 트린이 마저 거리를 좁히며 오러 블레이드가 불꽃처럼 치솟는 검을 휘둘렀다.
카앙!
오러 블레이드와 빛의 검이 충돌했다. 그런데 그 직후, 트린의 오러 블레이드가 위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어어!"
빗겨 막아낸 것이었다.
허!
'당했다!'
권총에 정신이 온통 쏠려 있어 김용후의 검술엔 신경이 크게 미치지 못한 것.
그렇다. 김용후는 기사 같은 검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자신보다 위거나 버금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완벽한 타이밍에 경악스러울 정도로 절묘한 힘 조절이 들어간 빗겨 막기였다.
무려 3번의 강화가 이루어진 자동사냥(+3) 스킬, 스킬 레벨이 오를 때마다 강화가 이루어질 때마다 검술의 수준도 올라갔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학습까지도 했다. 파므리엘과 트린이 익힌 검술은 같았다.
그랬기에 자동사냥 스킬은 상대가 더 강적임에도 파므리엘 때보다 더 빨리 이 회심의 한 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트린의 오른팔이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고, 용후의 몸이 전광석화의 속도로 빛의 검을 휘둘렀다.
촥!
"……컥!"
트린의 목과 오른팔이 함께 잘려나갔다.
팔은 검을 쥔 상태로 바닥으로 떨어져 검이 푹 바닥에 꽂혔고, 머리는 빌로도 진형으로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져 먼지를 일으키며 데굴데굴 굴렀다.
잠시 정적.
3초 뒤 용후의 부대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 잡았어!"
"진짜 기사단장을 잡았어!"
"그것도 총이 아니라 검이야!"
"이겼다! 귀족을 상대로 이겼어!"
그런데 유저 용병 중 반은 함성을 내지 않고 놀란 표정만 짓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었다면 기사전을 받아줬을 리 만무.
김용후가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무려 귀족의 기사단장. 익스퍼트급이란 말도 들려왔다.
그런 기사를 유저가 잡아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용후의 눈앞엔 알림창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2,800 오릅니다
-소드 익스퍼트 기사를 이긴 자 칭호를 얻었습니다
-전 신체 스탯이 5 오릅니다
-통솔 스탯이 20 오릅니다
-카리스마 스탯이 15 오릅니다
-품위 스탯이 10 오릅니다
-위엄 스탯이 30 오릅니다
유저 용병들의 함성이 점점 커져 갔다. 반면 빌로도 성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기사 트린의 시체가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소멸해 갔다.
* * *
"……죽었어?"
"주, 죽었습니다……!"
"트린이, 죽었다고?"
"죽었습니다."
빌로도 성의 가장 높은 첨탑 안. 그 첨탑의 창문 앞에 선 빌로도 남작은 기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고, 손엔 망원경까지 들고 있었다.
빌로도 남작이 그 망원경을 다시 오른쪽 눈에 가져다 댔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트린의 몸이 피 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그럼에도 빌로도 남작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빌로도 남작의 옆에서 함께 기사전을 본 책사도 마찬가지였다. 10여 분 만에 끝이 났고, 일방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완벽한 김용후의 승리. 권총을 썼다지만, 승패를 가른 건 김용후의 검, 그리고 검술이었다.
트린보다 경지가 낮은 검술이었다면 아무리 권총으로 정신을 빼놨다 해도 저런 식의 결판이 날 순 없었다.
"유저가…… 저런 경지의 검술을 쓰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합니다."
검술 스킬이란 건 듣도 보도 못했고, 혹 검술 스킬이 있다 해도 수십 년 검술을 수련하고 연마한 오러 기사의 검술 수준을 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이해 불가.
지금 여기서 김용후가 쓰는 검술의 비밀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밝혀내는 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미X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네놈은 모가지야! 목숨을 부지해볼 생각은 하지도 마!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도 시원치 않아!"
살기를 담은 눈으로 말을 쏟아낸 빌로도 남작이 문 앞에 서 있는 기사 쪽으로 홱 돌아섰다.
"항복이다! 지금 당장 성문 위로 달려가 항복 깃발 흔들어!"
기사가 튀어나갔고, 빌로도 남작은 다시 창문으로 가 밖을 내려다봤다. 김용후의 부대가 함성을 지르며 성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성이 함락되기 전에 항복 깃발을 흔들면 목숨을 보존하고 성을 빼앗기진 않겠지만, 전쟁 배상금으로 막대한 돈과 땅 맛을 본 김용후라면 땅도 요구해올 터다. 그러나 죽는 것보단 나았다.
그런데…….
"뭐야! 멈춰! 항복 깃발을 흔들고 있다고!"
지금 이 거리라면 김용후의 눈에 흰 깃발이 안 보일 리 만무. 그런데도 진격 속도를 늦추고 있지 않았다.
저건 공격을 하겠단 거였다! 공성전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정신 나간 놈! 영지전에서 항복을 한 귀족을 계속 공격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빌로도 남작의 그 외침은 당연히 용후에게 닿지 않았다.
유저 용병 부대가 충차와 마법으로 성문을 두드려대고, 성벽에 사다리를 대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공성전이 시작됐다. 아주 일방적인.
* * *
당연히 용후는 빌로도 성의 성문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흰 깃발을 봤다.
깃발도 컸고, 병사 둘이서 좌우로 크게 크게 흔들고 있는데 그걸 못 볼 순 없었다.
그러나 용후는 공성전을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명분과 증거가 확실했다. 게다가 홀더러스 남작이 갖고 있는 증거들도 있었다.
매사에 걱정과 불안이 많은 자답게 그동안 두 남작과 주고받은 편지와 문서를 전부 모아놓고 있었다.
그걸 필요하다면 주겠단 약속까지 받은 상태. 아주 정당한, 끝까지 갈 수 있는 영지전이었다.
"명성도 엄청 오를 거야."
명성은 그저 악명을 가진 자를 잡을 때만 오르는 게 아니었다. 기부를 통한 선행으로도 명성이 올랐듯, 자신의 이름이나 가치가 오르는 일을 해도 오른다.
영지전에서 승리하고, 남작령을 통째로 먹는 일이다. S등급 퀘스트를 클리어한 것 못지않은, 그 이상의 명성이 오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빌로도 남작은 악명 스탯도 갖고 있었다. 자커스 도적단의 두목보다 더 높은 수치였다.
짐작이 갔다. 영지민들을 쥐어짜고, 영지 안에서 왕처럼, 그것도 폭군처럼 군림했을 터다.
아무 죄 없는 자를 죽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영주의 가족은 죽이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항복하는 병사와 기사들도 죽이지 말고 생포하십시오.'
용후가 퀘스트창의 귓속말 기능을 통해 유저 용병들에게 단체 귓속말을 보냈다.
모든 퀘스트에 생기는 기능은 아니지만, A등급 이상의 단체 퀘스트엔 생겨나는 기능이 용후가 만들어낸 퀘스트에도 있었다.
지금, 용후가 마음속으로 한 말이 유저들의 머릿속으로, 그리고 알림창으로도 떴을 것이다.
빌로도 남작의 가족들을 죽이지 말라 한 건, 빌로도 영지를 차지하는데 굳이 그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까지 죽인다면 오히려 명성이 떨어지고 악명이 쌓이게 될 것이다. 그저 영지에서 쫓아내기로 했다.
복수를 해올 수도 있지만, 그게 성공할 리 만무. 혹여 해 온다면, 그땐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이겼다!"
"와, 보상 대박!"
"S등급 단체 퀘스트 3개에 A등급 단체 퀘스트까지, 하하! 김용후 만세다!"
성안에서 싸우는 상대라 해도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까지 잃고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병사들을 두 배 더 많은 병력이 제압하는 건 금방이었다.
반나절 만에 빌로도 성이 함락됐고, 빌로도 남작은 한 유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10,000 오릅니다
-빌로도 남작령을 얻었습니다
-병사 327명을 얻었습니다
-기사 15명을 얻었습니다
빌로도 남작령을 완전히 차지하는 데 성공한 용후는 홀더러스 남작에게 받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바로 홀더러스 성으로 향했다.
퀘스트를 클리어해 보상으로 땅을 받으면, 그곳을 통해 이번엔 베킨 남작령으로 공격해 들어갈 생각이었다.
베킨 남작은 자신이 홀더러스 남작의 딸을 치료해 준 대가로 땅을 약속받은 걸 전혀 모르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