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기적의 스킬 자판기 089화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예, 완전히 멈췄습니다."
대체 왜……?
홀더러스 남작의 병력이 트넬 들판에서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단 보고에 베킨 남작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병력을 모아 트넬 들판으로 갔다는 건 빌로도 남작을 도우려는 거였다. 당연한 일. 김용후에게 빌로도 남작의 기사들이 잡히며 상황이 좀 안 좋게 돌아가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병력이 빌로도 성에 도착하면 충분히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기사 셋이 잡혔다 해도 기사단장 트린이 건재한 이상 빌로도 성이 금방 함락되는 일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전령을 주고받으며 전략을 잘 짠다면 오히려 김용후의 부대를 독 안에 든 쥐꼴로 만들어 일망타진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고 나면 파칼 숲만이 아니라 팔켄 마을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홀더러스 남작의 병력이 아직도 트넬 들판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다는 건, 홀더러스 남작과 김용후 사이에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봐야 했다.
홀더러스 남작이 다른 생각을 하며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광산을 손에 넣는 것보다 더 혹할 수 있는 제안이 있을 리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김용후를 돕는다 해서 광산의 지분 일부라 홀더러스에게 떨어질 리도 만무.
그런 말에 놀아날 정도로 홀더러스 남작은 어리숙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걱정과 경계심이 많은 자인만큼 자신, 그리고 빌로도 남작 이상으로 꿰어내기 어려운 자였다.
"혹, 김용후가 딸을 치료해주겠단 말을 한 건 아닐는지요."
가신 중 한 명이 그런 말을 했다. 베킨 남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마 그게 가장 가능성이 있었다.
김용후가 부상자들을 치료했단 보고가 있었으니.
그러나 힐로는 질병이나 상태 이상은 치료할 수 없다. 게다가 홀더러스 남작의 딸에게 걸려 있는 저주는 심장에 새겨진 저주.
교황청의 대사제, 마탑의 마탑주도 풀지 못하는 저주를 스킬 따위로 풀 수 있을 리가. 제아무리 김용후가 특별한 스킬을 쓴다 해도.
애초에, 김용후가 대사제의 권능과 마탑주의 마법을 능가하는 치료 스킬을 갖고 있었다면, 그 스킬에 대한 이야기가 S등급 퀘스트를 3개나 수행하는 동안 전혀 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딸 피엔느의 치료를 들먹이며 하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해도, 홀더러스 그자가 이 정도 생각도 못 했을 리 없을 텐데."
홀더러스 남작에게 딸이 피엔느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홀더러스 남작가는 손이 귀한 가문이긴 하나 자식이 한 명 더 있고, 아주 건강했다.
그랬기에 더욱 베킨 남작은 홀더러스 남작이 딸을 고쳐줄 수 있단 말에 홀릴 리 없다 생각했다.
아픈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을 모르기에 하는 생각이었다. 무려 10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의 무게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소심하고 안위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홀더러스 남작이 남부의 2인자인 비리마 남작을 상태로 두 남작과 연맹을 맺고 광산을 빼앗으려 한 이유도, 아들에게 더 부강한 영지를 물려주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딸 피엔느를 고치고자 하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
홀더러스 남작은 연금술사 길드에 큰돈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현자의 돌을 가장 깊이 연구하는 연금술사 길드에 그나마 피엔느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서였다.
또한, 신비한 물건들이 건너오는 동쪽 대륙에서도 방법을 찾고자 했다.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나날이 명성을 드높이며 기적이라 불리는 스킬들을 쓰는 자의 제안,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깊은 속내까지 베킨 남작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결국 베킨 남작이 결정을 내렸다.
"병력을 애드란 들판에 멈춰 세워라. 홀더러스의 병력이 빌로도 남작령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부대와 홀더러스 남작의 부대가 함께 빌로도 성에 도착해야 한다.
자신의 부대만 도착해도 김용후의 용병 부대를 상대로 밀리지 않을 테고 쫓아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김용후는 기사를 셋이나 잡았다.
게다가 그 셋 중 한 명은 부기사단장 파므리엘. 자신의 기사들도 잡히지 말란 법이 없다.
홀더러스 남작의 병력과 함께 쳐야 기사들이 잡힐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었다.
또 하나.
혹, 딸을 치료해 주겠단 김용후의 말에 놀아난 게 아니라, 빌로도 남작과 자신의 병력을 약화시켜 빼앗은 광산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다.
"홀더러스 성과 트넬 들판으로 전령을 보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라!"
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전령이 성을 나가 각각 홀더러스 성과 홀더러스 남작의 지원군이 모여 있는 트넬 들판으로 달렸다.
그러는 사이, 홀더러스 남작은 용후와의 약속 장소인 파칼 숲의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 * *
천막 안.
용후는 혼자였고 홀더러스 남작은 기사 둘을 대동하고 있었다. 둘 다 오러 기사들. 한 명은 익스퍼트급 기사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홀더러스 남작은 김용후가 자신을 죽이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단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익스퍼트급 기사라 해도 권총을 막고 벨 순 없으니.
그럼에도 홀더러스 남작은 초조함이나 불안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저 애가 탔다.
"……정말 내 딸을 치료할 수 있나?"
"할 수 있습니다."
"내 딸이 앓고 있는 건 병이 아닐세. 저주, 그것도 심장에 새겨진 저주일세. ……정말 고칠 수 있다는 것인가?"
"예."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금 용후의 쓰다듬으면 다 고쳐 스킬의 스킬 레벨은 5.
5레벨이 되면서 외상 치료뿐만 아니라 상태 이상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질병 치료는 아직 되지 않았다.
질병 치료는 스킬 레벨이 더 올라야 했다.
급한 건 홀더러스 남작. 조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홀더러스 남작이 스스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다.
"내 딸을 고쳐주는 대가로 자네가 원하는 건 빌로도 성으로 내 병력을 보내지 않는 것일 테지? ……그리 하겠네. 단, 내가 정말 딸을 고칠 수 있단 확신을 갖도록 해줘야 할 것이네."
"심장에 저주를 새길 수 있는 주술사가 제겐 없습니다. 남작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니 증거나 확신을 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고칠 수 있습니다. 제 명성을 걸고 약속드리죠."
"……."
홀더러스 남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용후가 말을 이었다.
"믿든 안 믿든 그전 남작님의 자유입니다. 남작님께서 빌로도 성으로 병력을 몰고 간다 해도 전 이 전쟁에서 지지 않습니다. 남작님의 병력만 지원을 오지 못하도록 손을 썼을 것 같습니까?"
"……."
홀더러스 남작의 미간이 펴지고 대신 눈이 커졌다.
"베킨 남작님의 병력도 지금쯤이면 빌로도 남작령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서 있을 것입니다."
그 말 대로였다. 홀더러스 남작은 쭉 베킨 남작의 병력을 주시하고 있었다.
베킨 남작의 병력은 자신의 병력과 똑같이 빌로도 남작령으로 넘어가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
자신의 병력이 빌로도 남작령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서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김용후가 베킨 남작에게도 뭔가 달콤한 제안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상식을 깨는 일들을 해낸 김용후다. 그 많은 유저 용병들을 그 짧은 시간에 모을 거라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사들이 잡히고 심지어 부기사단장 파므리엘까지 잡혔다. 또, 사제들도 치료하지 못하는 상처를 치료해냈다.
김용후의 말이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좋네…… 믿겠네. 비리마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자. 아무리 적이 되어 싸우고 있다 해도 아픈 딸을 가지고 수작질을 하는 저열한 자라곤 생각되지 않으니. 비리마의 영웅이란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해주리라 믿네."
용후가 속으로 웃었다.
"지원군을 물리겠단 약속을 지키신다면 제가 약속을 어길 일은 없습니다. 단, 치료를 한다 해서 바로 완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아마…… 이 영지 전쟁이 끝나고 전쟁 배상까지도 전부 마무리된 뒤쯤에 완치가 될 것입니다."
홀더러스 남작의 눈이 좁혀졌다. 완치되는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단 말처럼 들렸다.
허튼 생각을, 잔머리를 굴리지 말란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완치만 된다면 그 정도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까.
정말 피엔느가 걷고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그때였다.
"그럼, 치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그게 무슨 소리지?"
딸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겠다 했는데, 무슨 치료비?
"치료를 받고자 한다면 당연히 치료비를 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병력을 빌로도 성으로 보내지 않겠다 약속했네."
"그랬지요."
"……그런데?"
"병력을 빌로도 성으로 보내지 않으면 남작님의 따님을 치료해 주겠다 했습니다. 치료를 공짜로 해주겠단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억지란 말까진 하지 못했다.
김용후가 말을 이었다.
"10년 동안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병을, 심장에 새겨진 저주를 고작 지원군을 물리는 걸로 퉁 치겠단 말인가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남작님의 병력이 빌로도 성으로 간다 해도 조금 전쟁이 어려워지고 돈이 좀 더 들게 될 뿐, 전 이 영지 전쟁에서 지지 않습니다. 베킨 남작님의 병력은 절대 빌로도 성으로 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 빌로도 남작과의 이 전쟁을 적당히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
홀더러스 남작은 대꾸를 못 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허풍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김용후의 얼굴에 보이는 자신감이 대단했다.
베킨 남작이 김용후의 제안을 문다면, 지금 김용후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딸을 고칠 기회도 잃고 영지 전쟁에서 패배해 광산조차 얻지 못하게 될 수 있었다.
거기다 배상금까지. 그렇다고 시간을 좀 더 갖고 싶다 한 뒤 베킨 남작과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일.
"……치료비로 얼마를 원하나?"
그런데 갑자기 김용후가 허공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그걸 테이블 위에 펼쳤다.
지도였다. 남부 일대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 홀더러스 남작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왜 이걸? 김용후가 깃펜을 꺼내 지도 한 부분에 동그라미를 슥 그렸다. 이곳, 파칼 숲 끝자락과 인접해 있는 자신의 영지 안이었다.
"이만큼 주십시오."
"뭐라?!"
홀더러스 남작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무슨 1골드만 달라는 듯한 뉘앙스!
지도에 그려진 동그라미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실제 땅은 어마어마한 크기다! 팔켄 마을과 파칼 숲을 합친 것보다 더 컸다.
그런 광활한 땅을 치료비로 달라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10년이 넘도록 풀지 못한 저주가 아닙니까. 오직 저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과한 요구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안 하시면 됩니다. 아실 겁니다. 저는 악당들을 잡아 왔습니다. 제 스킬들을 좋은 일에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남작님의 따님을 치료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적이 됐다 해도, 기사와 병사들의 목숨을 잃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땅은 남작님이 가진 영지의 1/100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딸을 살리고 수백의 부하들을 살리는 대가로 그리 과한 요구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하…….
이런 뻔뻔스러운!
들려온 소문과는 많이 달랐다. S등급 퀘스트를 3개나 연달아 성공시키며 대악당들을 잡아낸 만큼 영웅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생각했던 이미지와 달리 아주 약은 자였다.
그렇다. 지금 자신에게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건 땅이다. 영지 전쟁이 아니라면, 아무리 돈이 넘쳐도 이렇게 드넓은 땅을 손에 넣을 순 없었다.
숙고했으나, 결국 홀더러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이 땅이 자네에게 넘어가는 건 딸이 완전히 완치된 다음일세."
"물론입니다. 퀘스트를 주십시오. 따님을 치료하는. 그럼 서로 계약을 어길 일은 절대 없으니."
홀더러스 남작이 동의했다. 퀘스트보다 더 확실한 계약서는 없었다.
용후의 눈앞에 2레벨 정도 할 수 있을 듯한 경험치와 신성력 스탯, 드넓은 땅이 보상으로 걸린 A등급 퀘스트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