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기적의 스킬 자판기 078화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악마의 제단 앞에 서 있는 벨베른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고,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제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제단에 마룡의 등뼈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벨베른의 아공간 속엔 마룡의 등뼈가 없었다. 원정대를 쫓아간 수하들도, 악마교의 신도들도 김용후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리마 성으로 수하들과 악마교 신도들을 보낼 수도 없는 일, 마룡의 등뼈를 찾을 방법은 이제 없다 봐야 했다.
마룡의 눈을 3개 다 제단에 바쳤다면 좀 더 나중에 마룡의 등뼈를 넣어도 됐겠지만, 마룡의 눈이 2개밖에 바쳐지지 않은 제단은 불안정했다.
"일단……."
거의 1시간을 제단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고민하던 벨베른이 결정을 내렸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단 반쪽짜리라 해도 중급 악마를 소환해 토벌대와 맞서 싸운다. 반쪽짜리 중급 악마라 해도 인간의 힘을 아득히 상회하는 괴물이다.
소드마스터들과 4서클 5서클 마법사들, 주교급 이상의 고위 사제들이 파티를 짜 잡으러 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비리마 성의 병력과 교황청이 아닌 그저 교회, 그리고 유저들을 섞어 만든 토벌대론 절대 잡을 수 없다.
게다가 산맥에 풀어놓은 언데드들과 악마교의 신도들은 전부 암흑마력을 쓸 수 있고, 악마가 소환되면 그들이 가진 암흑마력의 힘은 더욱 증폭된다.
결계까지 오기도 전에 전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벨베른은 비리마 성의 토벌대에 토벌을 당할지 모른단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막대한 돈과 공을 들인 제단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도 완성하지 못하게 된 게 분하고 억울한 것이었다.
마룡의 등뼈을 김용후에게 빼앗기고, 그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스킬에 의해 마룡의 눈이 버젓이 아공간에 있음에도 쓰지 못하는 상황, 벨베른의 분노는 온통 용후에게 쏠려 있었다.
"김용후…… 네놈은 그저 죽이는 걸로 끝내지 않는다. 제물로도 쓰지 않는다. 지옥을 보여주마. 제발 죽여 달라 애원하게 만들어주마."
다른 자들의 영혼은 전부 영혼 창고 안에 가둘 것이다. 유저의 영혼도, 사제들의 영혼도 가둘 수 있었다.
신을 섬기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영혼은 특히 귀했다. 많이 모을 수 있을 테니, 다른 장소에서 새 악마의 제단을 만들 땐 훨씬 빠르게 제단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리 나쁘진 않아."
새 제단을 만들 때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영혼 덕분에 제물로 바쳐야 하는 영혼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 테고, 김용후를 잡으면 마룡의 등뼈를 구할 필요도 없으며, 마룡의 눈은 2개만 더 구하면 된다.
그리고 비리마 남작의 기사들은 훌륭한 듀라한과 데스나이트가 되어줄 터.
벨베른이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재료 몇 개를 제단 중앙에서 타오르고 있는 푸른 불꽃 속으로 던져 넣었다.
푸른 불꽃이 몇 배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때, 제단 밑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되었다……! 드디어!"
제단 위 허공에,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과 똑같은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마법진이 완성되자 그 안에서 갑각으로 둘러싸인 비정상적으로 긴 팔이 올라왔다.
이어 8개나 되는 다른 팔들이 빠져나오고, 그 팔들이 마법진을 붙잡으며 몸을 끄집어 올렸다.
그러나 곧 벨베른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역시, 반쪽짜리인 중급 악마를 악마교의 신으로 세울 순 없다.
고작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신으론, 악마교를 세히브교를 능가하는 교로 만들 순 없다. 그리고 그 정도론, 자신의 연구 자금을 대는 데는 턱도 없었다.
중급 악마를 소환해 그 악마를 악마교의 신으로 앉히려는 건 과정일 뿐, 벨베른의 목적은 리치가 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을 연구하는 거였다. 최종적으론 리치를 넘어 하이리치가 되어, 자신이 불멸자이자 신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벨베른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악마를 올려다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과연이었다!
자신이 바라던 신은 될 수 없으나, 토벌대는 간단히 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암흑마력에 오염된 양질의 영혼들을 영혼 창고에 잔뜩 쓸어 담을 수 있다.
"빨리 오너라."
벨베른이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 * *
정말 오랜만에 박경일이 비리마 성으로 돌아왔다. 거리는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그리고 거리의 분위기도 비리마 성을 떠날 때와 같았다.
유저들이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대박 퀘스트라느니 한 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느니 하는 대화가 어디서든 들렸다.
그리고 그 대화들 속엔 항상 김용후의 이름이 들렸다.
퀘스트를 만든 건 비리마 남작이었고, 등급은 S, 그리고 황당하게도 이 단체 퀘스트의 총지휘관도 김용후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저 용병 부대의 지휘관을 맡은 게 아니라 토벌대의 총지휘관이었다.
"하…… S등급 단체 퀘스트를 또 지휘관으로?"
힘이 쫙 빠졌다. 정말 열심히 퀘스트를 하고 사냥을 해 레벨을 5나 올리고 방패를 새로 사고, 검도 에픽 등급으로 바꿨다.
게다가 생명력을 30이나 올려주는 액세서리템도 얻었다. 던전을 돌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젠 방패로 막으면 총알 한 방에 죽거나 전투 불능에 빠지진 않을 것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권총을 가진 김용후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파티원들은 박살 낼 수 있단 자신이 있었고, 파티를 다시 장악하고 나면 파티원들을 동원해 김용후를 잡는 게 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말도 안 돼."
먼발치였지만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김용후의 레벨이 말도 안 되게 많이 올라 있었다.
거의 80레벨대. 자신과 20레벨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권총까지.
혼자 있는 김용후를 슬레이어즈 파티가 덮친다 해도 잡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빌어먹을."
분노와 분함이 아닌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박경일의 머릿속에, 문득 예전 한 NPC에게 받은 명함이 떠올랐다.
찌라시라도 돌리듯 명함을 돌리곤 다음 날 성에서 사라진 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명함이었다. 그게 아직 인벤토리 안에 있었다.
박경일이 그 명함을 꺼냈다.
그러나 명함엔 이름이나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데런의 빵집 벽에 본인의 이름을 적고, 정오에 광장 벤치에 앉아 있으란 내용이 전부.
그렇게 하자, 정말 누군가가 다가왔다.
"암살 의뢰하셨죠? 절 따라오시죠."
박경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토벌대에 1급 암살자가 끼게 된 것이었다.
* * *
용후는 암살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용후의 신경은 온통 귀족들의 첩자들에게 가 있었다.
"……귀족들의 첩자들이 왜?"
용후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헨슬런 백작의 또 다른 첩자라면 이해가 되지만, 세 귀족은 비리마 남작이 하고자 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재력으로도 병력으로도 비리마 남작을 어찌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셋이 힘을 합친다 해도.
비리마 남작령 인근의 영지들이니 비리마 남작의 주위에 첩자나 성안에 정보원을 뒀을 수는 있다.
비리마 남작이 영지를 어떻게 운영하냐에 따라 자신들의 영지에 득이 되기도 해가 되기도 할 테니.
하지만 그 첩자가, 또는 정보원이 왜 벨베른과 악마교 토벌 퀘스트에 참가한 걸까.
그것도 세 귀족의 첩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뭔가 분명 있는데."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닌, 다른 목적이.
그러나 그게 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토벌대에 참가한다 해서 비리마 남작에 대한 대단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리마 성의 많은 병력이 참가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전 병력이 참가한 건 아니고 비리마 남작이 토벌대를 이끄는 것도 아니니.
심지어 기사단장이나 책사도 아닌, 유저인 자신이 총지휘관. 그런 토벌대에 참가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뭐가 있겠는가.
토벌대의 성공을 막으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세 첩자는 다 NPC들이지만, 레벨은 두 명은 70레벨대, 한 명은 60레벨대밖에 되지 않는다.
유저가 아니니 스킬도 갖고 있지 않고, 마법사들도 아니었다. 인벤토리 속에도 위험하거나 특별한 아티팩트는 갖고 있지 않았다.
즉, 토벌대를 방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나인가."
내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이 토벌 퀘스트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 벨베른도 악마교도 막강하다. 그런 만큼 자신은 갖고 있는 패들을 감춰두고 있을 수 없다.
모든 패를 꺼내서 싸워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정보를 캐내려 한다면 이 퀘스트만 한 게 없었다.
'하지만 왜 날?'
자신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면 자신의 정보를 캐내 그걸로 약점을 찾아내려 할 수도 있겠지만, 빌로도, 베킨, 홀더러스 이 세 귀족들은 자신과 전혀 접점이 없다.
비리마 남작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은 비리마 남작의 수하도 가신도 아니다.
자신을 잡는다 해서 비리마 남작이 받는 피해는 없다. 좋은 해결사를 잃게 된 정도는 되겠지만, 비리마 남작을 도모하는 데 자신이 큰 방해물이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다른 귀족들이 자신을 높게 보고 있진 않을 것이었다.
자커스 도적단 퀘스트를 훌륭히 클리어해냈지만, 달리 보면 이제 고작 그거 하나.
팔켄 마을을 노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팔켄 마을을 노리는 거라면 첩자를 붙여 자신의 정보를 알아내려 할 것도 없이 바로 시비를 걸고 전쟁을 걸면 되니까.
자경단조차 없는 마을을 빼앗는 건 일도 아닐 테니. 물론, 비리마 남작이 보상으로 준 마을이니 쉽게 그렇게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마을을 차지하려는 속셈이라면, 굳이 자신의 정보를 모을 필요는 없었다.
거기서 용후가 생각을 멈췄다.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생각을 바꿔, 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한 명을 잡아 족치기로 했다. 마침 아주 편리한 아이템을 얻었지 않나. 스마트폰 말이다.
귀족의 첩자들이다. 죽이거나 가둬 연락을 끊어버리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겠지만, 이중첩자로 만들면 당장 세 귀족과 충돌할 일은 생기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간단히, 그리고 확실히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거기 당신."
용후가 첩자 한 명을 불렀다. 이름은 돈슨, 베킨 남작의 첩자였다. 그냥 적당히 한 명을 고른 게 아니었다.
'빛나는 증표'를 갖고 있었다. 신분을 복잡한 절차 없이 빠르게 증명할 수 있게 해주는 아티팩트였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신분 증명이 어려운 자들, 예를 들면 암살자나 첩자들이 주로 썼다.
"……예? 부르셨습니까?"
"따라와."
퀘스트에 참가한 이상 토벌대 총지휘관의 말은 절대적. 용후는 근처에 있던 NPC 암살자도 불러 따라오게 하곤 연병장을 나와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갔다.
NPC 암살자 필터와 첩자 돈슨이 용후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다고 돈슨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필터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용후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떻게 할까. 둘이 망설이던 그때였다. 용후가 멈췄다.
골목길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돌아선 용후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허공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온 손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 템 내 거."
투앙!
"……컥!"
NPC 암살자 필터를 리볼버(+4)로 한 방에 쏴죽인 용후가 리볼버(+4)의 총구를 돈슨의 얼굴로 겨눴다.
-박경일의 계약서를 얻었습니다
"……히익!"
"아공간에서 빛나는 증표 꺼내. 그거 들고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내 이야긴 많이 들었을 거야. 거짓말하면 바로 방아쇠 당긴다."
그 말 대로, 비리마의 영웅 김용후의 말은 정말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특별한 스킬들에 대해서도. 또, 적에겐 일말의 자비도 없다는 말도.
돈슨이 아공간에서 빛나는 증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빛나는 증표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냈다.
그 마법진 안엔 베킨 남작가의 문장도 새겨져 있었다.
빛나는 증표를 갖고 있단 것만으로 자신이 첩자 일을 하고 있단 증거가 되는 건 아니지만, 빛나는 증표를 갖고 있단 걸 알고 있다면 김용후가 자신이 누군지 다 알고 있다 봐야 했다.
망했다.
돈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목적 말해."
스마트폰을 꺼내 왼손에 들고 카메라를 작동시킨 용후가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시간도 끌지 마. 머리 굴리지 마. 거짓말하면 그 즉시 죽는다 생각해. 너 말고도 첩자는 둘이나 더 있으니."
결국 돈슨이 입을 열었다.
"파칼 숲에 광산이 있습니다. 당신이 퀘스트를 성공해 보상으로 파칼 숲을 얻으면, 숲을 빼앗으려는 겁니다. 그게 세 귀족의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