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기적의 스킬 자판기 040화
마법사 일레그의 연구실은 창날 첨탑 꼭대기에 있었다.
이름처럼 창날 모양의 첨탑이라 위로 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는 구조. 그래서 꼭대기엔 딱 방 하나만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문은 다른 방들의 문과 달리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두께도 상당할 듯했다. 노크론 안에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때였다.
갈렉스가 문 옆의 벽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손바닥이 닿아 있는 벽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벨소리 기능을 하는 듯, 몇 초 뒤 철문이 열리고, 푸른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나왔다.
흰머리가 조금씩 섞인 백발을 올백으로 넘겨 묶었고, 옆으로 길어 날카로운 느낌의 눈과 눈 밑과 입가에 특히 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신경질적인 인상까진 아니지만, 예민해 보이는 성격에 틈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인상.
그러나, 용후와 눈이 마주치자 마법사 일레그는 꽤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법사 일레그입니다."
"유저 김용후입니다."
"반갑습니다. 비리마의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더 미소를 키우며 말한 일레그가 옆으로 조금 물러서며 손으로 들어오란 제스처를 취했다.
"그럼 전 이만."
갈렉스가 일레그와 용후에게 눈인사를 하곤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고, 용후는 마법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추하지만 이쪽으로."
일레그가 아무 장식 없는 테이블 앞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용후가 그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 일레그가 차를 타 와 용후의 앞에, 그리고 자신이 앉을 의자 앞 테이블에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강화석에 관심이 많으시다 전해 들었습니다."
영웅을 만나 영광이라 했지만, 자커스 도적단 소탕에 대해선 일절 말을 꺼내지 않고 일레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럴 것이다.
3서클 마법사인 일레그에겐 자커스 도적단이 있든 없든 별 관계가 없을 테니.
아무리 영주가 자커스 도적단으로 인한 피해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해도, 기사들의 봉급을 줄이면 줄였지 고용된 마법사의 봉급이나 연봉을 줄일 수는 없었다.
갈렉스처럼 작위를 받아 귀족의 가신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3서클 마법사쯤 되면 자신을 고용하게 하지 종속될 필요가 없었다.
얼마를 들이든 3서클 마법사를 쓰려는 자들은 많으니.
그런 만큼 용후는 일레그로부터 강화석 제조법을 알아내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영주의 허락을 받을 것도 없이 자신이 팔고 싶으면 팔 수 있으니.
소속 마탑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아닌 지까진 모르겠지만, 혹 허가가 필요하다 해도 군침 도는 제안을 한다면 허가를 받아 내거나 몰래라도, 규칙을 어겨서라도 알려줄 것이었다.
"강화석의 제조법을 알고 싶습니다. 알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일레그가 바로 본론을 꺼냈으니 말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재료가 다 있다 하더라도요."
"알고 있습니다. 강화석을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제조법을,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레그 님이 알고 계신 강화석에 대한 지식들을 알려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마법사도 고대 마도 시대의 강화석은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화판 현자의 돌의 파편을 사용해 만드는 가짜 강화석조차도요."
강화석의 제조법을 알고자 하는 자신이 그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진 않을 것이다.
현 상황이 그런데, 그런 강화석의 제조법을 왜 알려 하는지, 그리고 만들어낼 방법이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분들도 만들지 못하는 강화석을 제가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용후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자신은 만들어낼 수 있단 이야길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고대 마도 시대의 이야기에 흥미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자의 돌과 강화석에 특히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어떤 재료들로 어떻게 강화석이 만들어졌는지를 순수한 호기심으로 알고 싶습니다."
"……그러시군요."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정말 자신에게 강화석을 만들어낼 방법이 있다곤 생각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기묘한 스킬을 쓰는 영웅으로 불리고 있지만.
"알려주신다면 물론 그에 맞는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이쪽을 원하신다면, 돈을 주고 살 의향도 있습니다."
용후가 금화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아니면 뭔가를 고쳐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든지요. 로브와 아티팩트도요. 뭐든 완벽히 하나를 고쳐드리겠습니다."
거의 연구실 안에서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레그지만 식당도 가고 주점도 갔다.
그랬기에 그도 뭐든 다 고쳐낸다는 용후 대장간에 대한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레그의 소지품 중 수리가 필요한 물건 중에 병장기는 없었다.
고칠 필요가 있는 건 로브나 아티팩트들이었다.
대장간 아닌가. 그랬기에 일레그는 뭐든지라는 말 안에 로브와 아티팩트까지 포함이 된다곤 생각지 않았다.
"저는 유저, 스킬을 사용해 고치는 만큼 로브와 아티팩트도 아이템인 이상 고칠 수 있습니다."
유저 대장장이들의 수리 스킬이라 해도 로브나 아티팩트를 고칠 순 없다.
마법사들의 로브를 고칠 수 있는 건 엘프나 마탑, 아티팩트를 고칠 수 있는 건 드워프나 마탑이었다.
그러나 스킬로 고치는 것이기에 아이템인 이상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유저들의 스킬에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힘이 깃들어 있다지만……그런 스킬까지 있다니 정말 놀랍군요."
꼭 고치고 싶은 게 있었다.
스승의 유품인 고대 마도 시대의 마법 반지.
부서진 게 아니라 워낙 오래된 물건이다 보니 시간에 풍화되어 2년 전 내구력이 0이 돼 버린 상태, 드워프가 아니면 수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드워프는 인간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만나기가 힘들고, 드워프라 해서 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티팩트는.
또 고칠 수 있는 드워프라 해도 수리 중에 총내구력이 깎일 수 있는 위험은 똑같이 있었다.
그러나 김용후의 수리 스킬은 총내구력이 1도 깎이지 않는다 했다. 게다가 옵션까지 붙는다던가.
"고대 마도 시대의 마법 반지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뭐든지요."
용후가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
그야말로 자신만만.
고치긴 힘들 물건. 드워프들은 인간과 사이가 안 좋고 인간 마법사들은 특히 더 싫어한다. 지금이 아니면 이 반지를 고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레그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고쳐드린다면 강화석의 제조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완벽히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됐다. 단 1골드도 쓰지 않고.
일레그가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빽빽이 새겨져 있는 실버링을 용후에게 건넸다.
용후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망치를 꺼내 수리하는 척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만지면 다 고쳐 스킬을 썼다. 반지가 옅은 빛에 휩싸였다.
* * *
-명성이 100 오릅니다
-무기 강화석 제조법이 적힌 양피지를 얻었습니다
-현자의 강화석 제조법이 적힌 양피지를 얻었습니다
무기 강화석 제조법은 열화판 현자의 돌의 파편을 사용해 만드는 가짜 강화석이고, 현자의 강화석은 현자의 돌의 파편을 사용해 만드는 진짜였다.
그리고 현자의 돌의 파편으로 만든 진짜 강화석으론 스킬 강화도 가능할 것이다. 스킬 자판기에서 산 스킬도, 그리고 어쩌면 스킬 자판기까지도.
"……놀랍군요. 어떻게 이런 스킬이."
돌려받은 실버링의 상태창을 보며 일레그가 거듭 그 말을 하며 감탄했다.
일레그가 수리한 고대 마도 시대 반지의 이름은 '마력의 숨결이 머무는 반지'.
마력 증폭과 항마력 상승 옵션이 붙어 있었다.
등급은 유니크지만, 마력 증폭 효과와 항마력 옵션이 함께 붙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아 가치가 에픽템 못지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일레그가 반지를 용후 쪽으로 내밀었다.
"이 반지를 빌려드릴까 합니다. 착용하면 항마력이 생겨나고, 이미 항마력을 갖고 있다면 항마력 수치가 더 오를 겁니다. 고대 유적지 소세토로 가실 생각이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일레그가 양피지에 강화석 제조법을 적는 동안, 용후는 일레그에게 열화판 현자의 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일레그가 알려준 곳이 고대 유적지 소세토였다. 헨슬런 백작령에 위치한 포리칸 숲 안에 있었다.
헨슬런 백작령은 비리마 남작령의 동쪽에 인접한 영지로, 산이나 산맥을 넘을 필요가 없어,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가면 포리칸 숲까지 일주일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1년도 더 전에 발견됐고, 또 많이 알려져 수많은 NPC 모험가들과 유저들이 모여들어 유적지를 공략하고 있으나, 일레그는 소세토 유적지가 아직 절반도 공략되지 않았을 거라 했다.
그런 소세토 유적지에서 아주 간간이 열화판 현자의 돌이 나온다는 것.
아직 정체불명의 연금술사를 제외하곤, 공식적으론 어떤 마법사도 어떤 마탑도 강화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미 무기 강화석을 만들어낸 자가 있는 만큼 언젠간 제조법이 완성될 거란 생각들을 하는지 열화판 현자의 돌의 파편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이라 했다.
그래서 유적지를 공략하며 직접 구하지 않는 한 구하기 힘든 상황.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해도 용후는 소세토 유적지로 갈 생각이었다. 끝 층에 있다는 현자의 돌의 파편도 얻어야 하니.
"그럼 거절하지 않고 잠시 빌리겠습니다. 그리고 돌려드릴 땐 다시 완벽히 수리해 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퀘스트로 얻은, 고대 마법사의 로브를 입으면 항마력 스탯이 10 생긴다. 그리고 이 반지를 끼면 항마력이 12 더 올라 22가 된다.
이 정도 수치면 소세토 유적지에서 마법을 쓰는 몬스터가 나온다 해도 리볼버와 자동사냥 스킬을 사용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용후는 유적지로 출발하기 전에 레벨을 더 올리고, 사제도 한 명 구할 생각이었다. 트리던 주교를 통하면 어렵지 않게 사제를 소개받아 데리고 갈 수 있을 테니.
물론, 스킬 자판기에서 스킬도 하나 더 얻어서.
"대신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일레그가 용후의 손바닥에 올린 반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강화석을 혹 구하게 되시면, 그 강화석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열화판 현자의 돌의 파편이 아닌, 강화석.
재료들을 다 모았다 해도 강화석을 만들어낼 순 없다 생각하면서도 혹 모른단 생각을 하며 한 발을 걸쳐보는 것이었다.
용후는 속으로 여유 있게 웃었다.
뭐 그 정도쯤이야.
3서클 마법사의 호감도를 올리고 더 친해질 수 있다면 강화석을 며칠 빌려주는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진짜인 현자의 강화석이 아닌 열화판인 무기 강화석만 보여줄 테니.
용후는 그 2개를 다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약속하죠. 하루 이틀 정도라면요."
"그 정도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딱 맞게 찻잔을 비운 용후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레그가 적당히, 대화가 아주 유익하고 즐거웠고 더 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식으로 말하며 용후를 따라 일어났다.
"그럼 또 뵙죠."
"용후 님의 소세토 유적지 행이 무탈하길, 그리고 원하시는 걸 구해서 나오길 빌겠습니다."
용후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마차를 구해 팔켄 마을로 향했다.
* * *
팔켄 마을로 가는 마차 안에서 용후는 일레그가 준 소세토 유적지 관련 내용이 실린 루물 마탑의 마탑지들을 다 읽어봤다.
유적지가 발견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 층까지 공략되지 못한 건 워낙 깊이가 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하로 내려갈수록 면적이 넓어지는 구조. 구조만 놓고 보면 거의 미궁급이었다.
그 탓에 도중에 식량이 다 떨어져, 몬스터 때문이 아니라 굶어 죽게 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아공간은 딱 하나뿐.
그리고 작은 방 크기인 하급 아공간은 돈만 있다면 마법 상점에서 바로 살 수 있지만, 중급 아공간부턴 달랐다.
또, 아공간이라 해서 식재료와 음식이 변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100레벨이 넘는 초고렙 유저라면 더 쭉쭉 빠르게 층들을 공략할 수 있을 테니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맨 끝 층에 도착해 보상을 챙기고 무사히 올라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더 돈이 되는 유적지들을 돌기 바쁘지 가장 값나가는 아이템이 열화판 현자의 돌의 파편으로, 아주 희박한 확률로 나오는 소세토 유적지를 공략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 스킬 자판기에서 스킬을 사면, 소세토 유적지를 공략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이 나와 줄 거야.'
용후는 갖고 싶은 스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건 소세토 유적지 공략이고, 가장 얻고 싶은 건 현자의 강화석이었다.
그때였다.
"유저님, 팔켄 마을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말했다.
용후가 마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봤다.
들판에서 짐승형 몬스터들을 잡고 있는 초보 유저들이 보였고, 좀 더 달리자 팔켄 마을이 보였다.
"마을 관리창."
용후의 눈앞으로 마치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인터페이스로 구성된 홀로그램창이 떠올랐다.
마을의 주인이 됐고, 팔켄 마을이 자유 마을이 됐기에 얻게 된 기능.
용후는 버거튼을 경비대에 넘길 생각이 없었다.
백재현에게 빼앗은 버거튼의 계약서엔 이 계약서가 암살 의뢰 계약서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확실한 단어나 문장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계약서 한 장만으론 버거튼을 살인교사로 재판장에 세우긴 힘들 것이다.
용후는 직접 보복을 하기로 했다.
일단 마을 관리창을 사용해 버거튼의 대장간에만 세금을 왕창 부가했다. 세금 폭탄 정도가 아니라 핵폭탄. 먼저 피를 바짝 말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