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Ep.24 : 아르센 마르코 (3)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내려진 비엔 나의 거리를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민준이는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새겨 두고 싶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머물다 간 축복받은 도시.
모차르트의 단골 주점으로 향하던 차민준은 잠시 발길을 돌려 낯익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여기였지. 베토벤 선생님과 함께 머물렀던 저택.’
아직 마땅한 주인이 없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저택은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왠지 문을 두드리면 집사인 한스 아저씨가 허둥지둥 달려 나올 것만 같은데…….
베토벤 선생님이라면 아마 슬쩍 자신에게 눈길 한 번을 주고는 피식 코웃음을 치겠지.
그때 민준이의 등 뒤에서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당신. 혹시 이 저택에 관심 있나?”
까칠한 남성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시절의 베토벤이 서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손에 가죽장갑을 채우던 그는 입만 뻥긋거리는 민준이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아……!!”
“아, 혹시 벙어린가?”
“아닌데요…….”
“근데 왜 물고기처럼 입만 뻥긋거려?”
말로 사람을 때린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싶을 정도로 날을 잔뜩 세운 말투.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
‘저 목소리와 성격은 정말 타고나셨구나.’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베토벤 역시 빈을 방문해 모차르트를 만났다고 들었다. 아마 시기상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이 저택에 관심이 있다면 포기하도록 해. 조만간 내가 계약하러 올 테니까.”
“꽤 비싸 보이는 집인데? 괜찮겠어요?”
“걱정하지 마. 머지않아 비엔나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때 양손에 짐을 잔뜩 짊어진 한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
“헉헉. 주인님. 여긴가요? 우와~ 정말 기가 막히게 멋진 저택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여기서 뭐 하세요? 어서 들어가시지 않고?”
“아직 내 집이 아니거든. 우리가 당분간 묵을 숙소는 여기서 골목 쪽으로 더 들어가야 해.”
“네? 그럼 뭐 하러 마차를 여기 세우셨어요!?”
“그냥. 이 집이 마음에 들어서. 가까이서 보려고.”
“…….”
“그럼 마음에 드는 집은 점찍어 두었으니, 그만 가자. 한스.”
“자, 잠깐만요. 짐 좀 챙기고…….”
허둥지둥 다시 짐을 챙긴 한스가 그의 뒤를 따르자, 몇 걸음 앞서가던 베토벤이 휙하고 몸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군. 루트비히 판 베토벤. 기억해 두게. 뭐, 나중엔 싫어도 억지로 기억하게 될 테지만.”
“당신의 피아노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거예요.”
“물론이지.”
모자의 챙을 지그시 누르며 인사를 마친 베토벤은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자신의 하인이 쫒아오든 말든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베토벤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바람에 땅만 쳐다보며 쫓아오던 한스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뭐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니. 잠깐만… 아까 대로에서 만난 남자 말이야.”
“네. 그 사람이 왜요?”
“내가 음악을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라? 듣고 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빈은 워낙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 것치고는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것까지 정확히 알아냈단 말이지.”
“신기한 청년이군요.”
“특히나 그 녀석의 눈빛이 신경에 거슬린단 말이지.”
“다시 돌아가 볼까요?”
한스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베토벤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장시간 마차를 타고 왔더니. 피곤하군. 어서 숙소에 가서 쉬고 싶어.”
베토벤의 대답에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도 피아노를 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으음? 주인님이야말로 그 청년이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 그 녀석 분명 피아니스트의 손을 가지고 있었거든.”
&
베토벤이 떠나고 다시 홀로 남은 민준이는 오랜만의 재회에 여운을 즐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그가 들어간 좁은 골목을 따라 방향을 바꿔 주점 쪽으로 향하는 동안 그의 귓가에 아련하게 피아노소리가 들려왔다.
‘베토벤 선생님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1악장.’
Adagio sostenuto.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가능한 아주 천천히…….
완벽에 가까운 템포로 민준이의 발길을 이끄는 피아노 선율은 작은 골목을 거니는 시간마저 더디게 느껴지게 할 만큼 훌륭했다.
주점에 가까워질수록 크게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소리는 민준이가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히 잦아들었다.
가게 안은 마르코를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운터 안에서 손님들에게 호통치던 주인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어때? 이 정도면 나도 꽤나 훌륭하지 않은가?”
“물론이죠. 아르센 마르코 씨…….”
“그 이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왜 그동안 진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셨죠? 그랬다면 좀 더 빨리 피아노를 돌려드릴 수 있었는데.”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니까. 함께 피아노를 만든 동료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그래서 이곳에 숨은 건가요?”
“제법 적당한 표현이군.”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심사장으로 향하던 배가 폭풍에 가라앉아 버린 건 당신 탓이 아니잖아요.”
“모든 건 결과가 알려 주지 않았나? 결국 세상에 우리가 만든 피아노의 소리를 들려줄 수 없었으니까.”
아르센 마르코는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리며 또 다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인 비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피아노 선율은 오래된 피아노의 소리와 매우 닮아 있었다.
“미안하지만 틀렸어요. 마르코 씨.”
“뭐가 틀렸다는 말이지?”
“당신의 피아노는 이미 세상에 그 소리를 들려주었으니까요.”
그 순간 건반 위를 오가던 아르센마르코의 손이 멈추었다.
“정말로 내 피아노가 무대에 오른 적이 있나?”
“물론이죠.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사람들이 좋아해주던가……?”
“무척이나요.”
“…….”
“피아노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아르센 가문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이제부터 더 큰 무대에서 세상에 그 선율을 들려줄 수 있겠지요.”
“그렇군. 동료들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의 피아노는 제 인생을 바꿔 준 최고의 피아노였습니다.”
차민준의 대답에 아르센 마르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기를 계속 기다렸던 것 같군. 권선이라는 아가씨에겐 그동안 미안했다고 전해 주게.”
가면 속에 가려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채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아르센 마르코는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주점에서 민준이는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주점을 빠져나와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민준이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갈 때마다 그 한 걸음만큼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린 대로의 저편은 기묘할 만큼 일그러진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유명한 화가의 추상화처럼 일그러진 세계를 뒤로하고 민준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문 밖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할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있던 권선이 입을 열자 민준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자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민준이에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이 세계를 지탱해 주는 이가 없기에 이 저택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르센 씨는……?”
“기다리는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마저 돌아가고 나면 이곳도 사라지겠지요.”
“아…….”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럼 정말로 이게 끝인가요?”
“이 세계에 남아 지탱해 줄 분이 없다면 이걸로 작별이겠지요. 그동안 도련님을 모시며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저택 안에 있던 모든 하인들이 세 사람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때 거실 의자에 앉아 있던 권순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에 내가 이 세계에 남겠다면 어쩌겠는가?”
“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이곳이 좋구나. 물론 언젠가 나를 기다리는 할멈에게 돌아가겠지만, 조금만 더 이 세계에 머물고 싶군.”
그러자 집사가 권순철을 향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이라면 저희도 기쁜 마음으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다시 문 밖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소음이 들려왔다. 이 세계가 권순철을 새로운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할아버지의 선택에 멍하니 서 있던 그때. 권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당분간 여기 있을래.”
“뭐?”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 그냥 조금만 더 이곳에서 할아버지랑 함께 있고 싶은 것뿐이니까. 마음이 정리되면 꼭 다시 현실에서 만나자.”
“그래. 꼭 기다릴게.”
&
2년 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5년마다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각국의 지역 예선과 비공개 예비선발을 거쳐 약 80명의 피아니스트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중엔 당연히 민준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아야, 이거 보타이를 너무 조인 것 같은데?”
“그래? 어디 좀 봐.”
민준이의 1차 본선을 서포트하기 위해 함께 바르샤바에 도착한 진아는 매듭을 풀어 다시 매주었다.
“야, 이런 사소한 것쯤은 이제 스스로 할 때도 되지 않았니?”
“매번 네가 해 주니까 버릇이 돼서 그렇지.”
“저기요. 나도 두 달 뒤에 콩쿨이 있거든요.”
“그럼 그때는 내가 가서 도와줄게.”
“아이고~ 고마워라~”
보타이 하나를 매는 동안에도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여성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아야~ 차민준~”
반갑게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늘색 드레스 차림의 소연이가 반갑게 달려왔다.
“어머, 소연이니? 와아~ 너 진짜 몰라보겠다.”
부모님과 함께 해외에서 유학 중이던 소연이는 어린 시절의 앳된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약속대로 당당히 본선에 오른 그녀는 민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리 서로 최선을 다하자.”
“그래.”
“레슨 선생님이랑 미팅이 있어서 이따 저녁에 연락할게.”
“응. 이따 보자.”
반가웠던 어린 시절 친구를 떠나보낸 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그들 앞에 반가운 얼굴이 또 하나 나타났다.
“아오바 쥰이치?”
“기억해 주니 영광인데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어 보인 아오바 쥰이치는 진아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오랜만이네요.”
“와아… 머리를 다시 기르셨네요?”
“그 후로 다시 길렀어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잘 어울려요.”
“고맙습니다. 차민준 씨. 이번엔 지지 않을 거예요.”
일본에서 열린 모차르트 국제 콩쿨에서 최우수 연주자 상을 놓쳤던 아오바는 차민준이 이번 쇼팽 콩쿨에 나올 것을 미리 직감했다.
지난 2년 동안 거의 모든 국제 콩쿨에서 상을 휩쓸어 버린 차민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쇼팽 콩쿨 하나뿐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와 악수를 나눈 민준이와 진아는 이틀 전 바르샤바에 도착한 발터 뮐러와 안나 누나를 만나러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소란스러운 실내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저분이지? 이번 예선에서 최고 평가를 받은 한국인 피아니스트.”
“맞아. 같은 한국인 피아니스트인 차민준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던데?”
“그럼 거의 우승 후보 아냐?”
“그건 아직 모르지만, 꽤 유력하긴 하지…….”
자신을 향해 소곤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민준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온 그녀는 다름 아닌 권선이었다.
현재 세간에서 기적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그녀는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내내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회복된 지 고작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있었다.
본래라면 행방불명이었던 그녀의 과거는 현실로 돌아온 순간, 사고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환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피아노였다고 한다.
권선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이를 향해 똑바로 걸어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오래 기다렸지?”
“그러게, 너무 늦은 거 아냐?”
“미안. 마지막에 쇼팽에게 직접 레슨 좀 받느라…….”
권선의 대답에 차민준이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건 반칙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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