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74화 (174/177)

[174] Ep.24 : 아르센 마르코 (1)

&

민준이의 손끝에 걸린 사진을 보자마자,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네요.”

“지, 진짜로요?”

“응. 확실해. 이 피아노는 우리 가문에서 만든 거야. 아마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만들었으려나? 설마 여태까지 이 피아노에 대해 물어보려고 골동품점을 찾아다닌 거야?”

“네. 맞아요.”

“그런데 이거 척 봐도 굉장히 오래된 모델 같은데, 대체 어디서 찍은 거야?”

“한국에서요.”

“뭐어!? 이 물건 이 지금 한국에 있다고?”

“정확히는 제 작업실에…….”

“그러니까 그 말은 이 피아노를 지금 네가 가지고 있다고?”

“네. 맞아요.”

“이게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됐지?”

“그게 좀 사연이 깊어요.”

“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민준이는 궁금해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르코와 두 음악가에게 오래된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그것을 통해 시간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는 빼고, 권순철 할아버지가 그 피아노를 얻은 경위와 자신의 손에 피아노가 들어올 때까지에 대해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 말인즉슨 이 피아노가 우리 가문이 만든 첫 번째 피아노라는 얘기잖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래. 못 믿겠으면 증거를 보여주지.”

“증거라구요?”

“날 따라와.”

마르코는 단원들에게 잠시 민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다고 둘러댄 뒤,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어젯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옷가지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가운데, 마르코가 창고 대용으로 쓰고 있는 천장의 다락방 문을 열었다.

비밀 통로처럼 꼬챙이를 이용해 사다리를 내리자, 부스스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하하. 한번 청소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네.”

피식 웃음을 던지며 사다리에 오른 마르코가 민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내 손 잡고 올라와.”

마르코의 도움을 받아 올라온 창고에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무릎을 구부린 채 마르코의 뒤를 따르자, 조그만 창틀 앞에 오래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반신만 한 크기의 상자는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새하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열어 봐.”

“이게 뭔데요?”

“글쎄, 열어보면 알아.”

마르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민준에게 재촉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달칵…….

상자의 자물쇠를 푼 민준이는 살짝 열린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뚜껑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건 설마?”

“어때? 놀랐지?”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작은 피아노 모형이었다.

마치 실제 피아노 사이즈를 5분의 1로 줄여 놓은 듯한 그것은 척 보아도 민준이가 사용했던 오래된 피아노와 똑같이 닮아 있었다.

“봐. 네 사진에 담겨 있는 녀석이랑 크기만 빼고 완전히 똑같지 않아?”

“마, 맞아요. 진짜 똑같아요.”

“이거 장난감처럼 보여도 실제로 연주가 가능하다. 일반 피아노랑 크기만 빼고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거든.”

“와아…….”

좁은 창고에서 안 그래도 키가 큰 두 사람은 상자를 거실로 옮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특히나 천장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 받을 때는 다치지 않기 위해 굉장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쿵~

이윽고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밝은 거실로 상자를 옮기는 데 성공한 마르코와 민준은 뚜껑 열어젖히고 조그만 피아노를 밖으로 꺼내었다.

그때 상자 바닥에 놓여 있는 낯익은 물건에 민준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이건?”

“응? 상자 안에 뭐가 또 있어?”

“그게…….”

“어!? 우와? 이게 여기 들어 있었구나.”

마르코 역시 그 물건을 보자마자 반가운 듯 재빨리 허리를 숙여 꺼내들었다.

잠시 후 그는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민준이에게 물었다.

“어때? 잘 어울려?”

가면을 쓴 마르코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민준의 등 뒤로 한 줄기 소름이 스쳤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면은 과거에서 만났던 ‘가면의 남자’와 똑닮아 있었다.

‘뭐지? 왜 저 가면이 마르코 씨의 집에?’

얼떨떨한 기분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마르코는 싱거운 표정으로 가면을 내렸다.

“별로야? 하긴 꽤나 유행이 지났으니.”

“마르코 씨 혹시 그 가면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세요?”

“이거? 당연하지.”

민준이의 질문에 마르코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놓인 작은 피아노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걸 만드신 분이거든.”

“정말요?”

“뭘 그리 놀라?”

“아 그게… 조금 사정이 있어서.”

“어이, 오히려 내가 더 소름 끼치는데? 네가 어떻게 이 가면을 알고 있을 수 있지?”

“그 가면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사실 나도 이 가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몇 가지 없어. 아까 말한 대로 피아노 장인이었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는 것. 어릴 적 병을 앓고 난 뒤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그걸 가리기 위해 쓰셨다고 하더군. 그리고…….”

마르코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을 그분의 성함을 따서 지었다고 하더라.”

“아르센… 마르코.”

“그래 맞아. 이분의 이름도 아르센 마르코지.”

“아…….”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풀리지 않던 퍼즐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거에 있는 가면의 남자는 무인도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그 음악가가 아니라 마르코의 조상이자, 오래된 피아노를 직접 만들었던 본인이라는 거잖아.’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소름이 발꿈치까지 내려오는 듯했다.

마르코는 차민준의 심각한 표정에 덩달아 눈썹을 모으며 가면을 내려놓았다.

“너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마르코 씨.”

평소의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진지함이 묻어난 차민준의 목소리에 마르코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제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주실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제가 직접 겪었던 일이에요. 조금 황당할 수도 있는데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어요?”

“좋아.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진심으로 들어 주겠다 약속하지.”

테이블 의자를 끌어와 작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은 그 후로 꽤나 긴 시간 동안 대화를 이어 나갔다.

민준이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오래된 피아노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

처음에는 순순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르코는 점차 민준이의 입에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피아노를 이용해 과거의 음악가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분명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서 내 조상님을 만났다고?”

“이 가면을 알고 있다는 게 그 증거죠.”

차민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마르코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비록 알고 지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민준이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서 할 만큼 가벼운 남자가 아니었다.

특히나 그의 눈은 이야기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를 꾸며서 들려준다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생각을 하나로 정리한 마르코는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민준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네가 바라는 건 뭐지?”

“과거에 남아 있는 그녀를 현실로 데려오고 싶어요. 하지만 이제는 과거로 갈 수 없어요.”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네.”

“좋아.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네.”

“방법이 있나요?”

“그 피아노를 여기로 가져다줘. 나는 그동안 우리 할아버지에게 연락해 볼 테니까.”

“마르코 씨의 할아버지?”

“뭐 피아노 장인이었던 우리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제작 기술을 전수받았던 분이니까. 그 오래된 피아노에 대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그 커다란 피아노를 가져오는 게 보통 작업이 아닐 텐데?”

그러자 차민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에 부탁드릴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

“어머, 민준아.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석혜인의 목소리에 차민준은 밝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진아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구나. 갑자기 네가 찾는다고 허둥지둥 헝가리로 떠나더니, 잘 지내나 보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실은 누나에게 부탁 좀 드릴 게 있어서요.”

“나한테?”

“네. 제 작업실에 있는 피아노 기억 하시죠?”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그거 고장났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어쩌면 고칠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 잘됐다. 그렇구나. 그럼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그 피아노를…….”

“응. 그 피아노를?”

“제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셨으면 해요.”

“아? 네가 있는 곳으로… 엉? 잠깐만. 그걸 헝가리로 보내 달라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헝가리의 국경도시인 세게드로…….”

“피아노 수리공이랑 같이 한국에 오는 게 아니라. 피아노 자체를 헝가리로 보내 달라고?”

“네. 좀 복잡한 작업이겠지만, 꼭 부탁드릴게요.”

“하아~ 음. 알았어. 대표님이랑 이야기해 보고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연락 좀 자주 하고, 대표님도 걱정이 많으시더라.”

“네… 대표님과 누나에겐 항상 신세만 지는 느낌이네요.”

“그럼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줄 수 있어?”

“부탁이요? 말씀만 하세요.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오올~ 너 분명 약속한 거다.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뭔데요? 갑자기 무서워지네.”

“대단한 건 아니고, 내년 봄에 한국에 돌아와서 피아노 몇 곡만 쳐주면 돼.”

“정기 공연인가요?”

“아니.”

“그럼……?”

“내 결혼식.”

“네에!? 누나 결혼해요?”

“야, 그 깜짝 놀란 말투는 뭐냐? 내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신기해?”

“아니, 그게 아니라 상대가 누군데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수화기를 바꿔 들었다.

“나다. 인마. 불만 있냐?”

“대표님?”

“피아노든 뭐든 당장 헝가리로 보내 줄 테니까. 후딱 마무리 짓고 한국에 돌아와. 알겠냐?”

“하하…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기분 좋은 소식에 수화기를 만지작거리는 민준이의 등 뒤에서 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씻고 나온 그녀는 마른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 내며 물었다.

“혜인 언니랑은 통화 잘했어?”

“응…….”

수화기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민준이에게 진아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왜? 수화기가 너무 예뻐 보여?”

“아니. 그게 아니라 누나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어서.”

“응? 뭔데?”

“그게, 누나랑 대표님이랑 결혼하기로 하셨대.”

“아~"

“뭐야, 그 반응은? 깜짝 놀랄 줄 알았는데?”

“그거 이미 알고 있었어.”

“뭐?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깜짝 놀래켜 주려고 했지. 에잉~ 언니한테 선수를 뺏겼네.”

“와아~ 그건 좀 너무한데?”

“모~ 왜~ 뭐~ 자기도 맨날 비밀 투성이면서.”

젖은 수건을 펄럭거리며 툴툴거리는 그녀에게 민준이가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뭘 숨겼다고 그래?”

“너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당연하지!”

“어머, 뻔뻔해라. 그럼 내가 진짜 놀라 자빠질 만한 이야기 하나 해줄까?”

“뭐, 뭔데?”

“우리가 같은 반이었던 4학년 때 말이야.”

“연서 국민학교 때?”

“응. 그때 한창 구교사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그랬지. 그때 승우 축구공 찾으러 들어갔다가 선생님한테 무진장 혼났었잖아.”

“맞아. 그 후로 구교사에서 한밤중에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민준이는 속으로 뜨끔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다음 진아의 말을 들은 순간.

더 이상 표정을 유지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가본 적이 있어. 한밤중의 구교사에…….”

“뭐……?”

“거기서 널 봤어.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너를… 그리곤 베토벤의 피아노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치다가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더라?”

“너 설마…….”

“그래. 그곳엔 더 이상 네가 없었어. 아무도 없었지. 내가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

“다음 날 학교에 오자마자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교실엔 태연하게 네가 있더라? 그뿐만이 아니야. 봄의 왈츠 드라마가 끝나고 네가 오래된 피아노를 가져와 단독 공연을 마치고, 사라져 버린 널 찾다가 작업실에서 잠들었던 그날. 넌 홀연히 피아노 앞에 나타났어. 마치 유령처럼…….”

“너 그럼 지금까지 그걸 알고도…….”

“또 하나 알려 줄까? 너 일본에서도 종종 작업실에서 사라졌지?”

“…….”

“그러니까. 이제 네가 대답 좀 해봐. 넌 나에게 뭘 숨기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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