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Ep.23 : 태양의 축제 (2)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들 속에서 몇몇 눈에 띄는 색다른 차림의 단원들이 서 있었다.
마르코에게 미리 지도를 받은 그들은 마치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한자리에 서서 가만히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아직인가? 이거 참 창피해서 돌아버릴 지경이군.’
오페라 유령을 연기 중인 비에라는 아까부터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꼬마 아이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악장님은 이제부터 광장에 서 있는 조각상이에요.’
아이들이 자꾸만 망토를 잡아당겨 목이 죄어왔지만, 비에라는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 이를 악물었다.
“와하하~ 할아버지 아까부터 눈썹이 꿈틀거려~”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는다 해도 안면 근육까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서 빨리 연주가 시작되길 바라는 수밖에…….
그 시각.
엄마와 함께 광장으로 향하던 바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에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어머~ 예뻐라. 꼬마야. 이름이 뭐니?”
세게드의 여름 축제를 찾아온 관광객에게 바바라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제 이름은 앨리스예요.”
“설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끄덕끄덕.
조그만 아이의 얼굴이 위 아래로 움직이자, 너도 나도 사진을 찍느라 제대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바바라의 엄마가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요. 저희가 급히 가야할 곳이 있어서…….”
“맞아요. 엄마랑 빨리 무서운 광대한테 가야해요.”
“무서운 광대?”
수수께끼 같은 아이의 말에 호기심이 인 관광객들은 서둘러 아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동화 속 흰 토끼를 쫓듯이 아이를 따라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길게 뻗은 예술가의 거리를 지나는 와중에도 아이과 비슷한 차림의 몇몇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저마다 악기 하나씩을 들고 있는 행위 예술가들 사이를 지나 광장에 다다르자, 홀로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조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반응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그의 앞에는 텅 빈 중절모가 거꾸로 놓여 있었다.
광대 앞에 나타난 앨리스의 등장에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지?”
“뭔가 시작하려나 봐.”
“쉿~!! 조용해 봐.”
떠들썩한 광장에서 앨리스와 조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조용히 숨 죽였다.
“미안해요. 너무 늦었어요.”
“괜찮아요. 앨리스 양.”
조커에게 한걸음 다가간 꼬마 앨리스가 중절모에 동전 하나를 던져 넣은 그 순간.
키이이잉…….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광장 한가운데서 울려 퍼졌다.
‘시작이다.’
그 소리를 들은 광장의 행위 예술가들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악기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이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주위를 맴돌며 장난치던 아이들조차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솔로의 음에 이끌리듯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봐 저기서 뭔가 대단한 걸 하려나 봐~”
호기심 가득한 관광객들이 그들을 따라 광장 한가운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소 거추장스러운 차림이었지만, 관객을 끌어들이는 효과는 충분해보였다.
‘젊은 지휘자는 설마 이것까지 눈치를 채었단 말인가?’
클래식은 귀족의 음악이다. 그렇기에 짜인 틀 또한 확실했다.
텅 빈 무대에 연주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으면 지휘가 올라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시작되는 공연은 정규 무대가 아닌 이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가 매우 힘들었다.
어쩌면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배경 음악 정도로 치부되며 연주가 끝나면 자기들끼리 좋은 공연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차림의 연주자들은 광장 곳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가보자. 뭔가 시작되려나 봐.”
이윽고 민준이 근처에 있던 단원들 몇몇이 모여 들며 자리를 잡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민준이의 연주에 맞춰 화음을 넣던 단원들은 관객과 함께 속속들이 모여드는 동료를 향해 눈으로 인사하며 구색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단원들이 모인 순간.
그들 주변엔 셀 수 없이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때 민준이의 바이올린 솔로가 끝을 맺으며, 민준이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어린 소녀에게 맡겼다.
“고마워요. 앨리스 양.”
보라색 정장을 벗어던지고 바바라의 어머니가 건네주는 요란한 코트를 걸쳐 입은 민준이가 바닥에 놓인 중절모를 뒤집어쓰자, 민준이는 순식간에 조커의 모습에서 앨리스 동화 속 ‘모자 장수’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진짜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관객들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민준이는 재킷 안쪽에서 가느다란 지휘봉을 꺼내들었다.
“설마 오케스트라였어?”
“와아…….”
수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원들을 향해 돌아선 민준이가 지휘봉을 추켜세우자 관객을 포함해 모든 이들이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정확히 민준이의 지휘봉 끝이 작은 북을 향한 순간. 맑고 경쾌한 행진곡의 서두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리듬이 귓가에 닿은 순간.
오케스트라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북의 박자를 타고 관객들의 박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그가 작곡한 왈츠 중에서 ‘로렐라이 강의 메아리’와 더불어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이 곡은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를 위해 만들어졌다.
귓가에 날아와 꽂히는 듯한 간결한 리듬은 듣는 이로 하여금 박수가 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그때 지휘자 뒤에 서 있던 바바라가 하늘 높이 팔을 휘저으며 X표시를 그렸다.
아이의 행동에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연주자들을 가리켰다.
아직은 연주자들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꼬마의 귀여운 제스처에 청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바라 덕분에 연주자들은 한결 편안하게 첫 번째 악절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악절에서 지휘자가 돌아서며 관객들에게 박수를 유도했다.
관객과 연주자들을 동시에 지휘하는 모자장수의 화려한 제스처에 사람들은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바바라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환호를 멈춰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휘자와 꼬마 아가씨의 완벽한 호흡에 청중들은 그들의 신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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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곡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호기롭게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더해지며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마저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박수소리에 이끌리듯 모여들고 있었다.
“라데츠키 행진곡이라. 선곡이 좋은데? 오케스트라 연주로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니. 대체 어느 악단이지?”
호프먼의 오케스트라를 빠져나와 다소 심심하게 한여름 축제를 즐기던 남자는 아까부터 귓가에 파고드는 선율이 꽤나 신경 쓰였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연주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웅장해지기 시작했다.
‘악절이 반복될 때마다 마치 악기가 하나씩 추가되며 완성되어가는 느낌이야.’
악단을 나오고 나서 한동안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귓가를 간지럽히는 훌륭한 연주에 자신도 모르게 박수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케스트라를 둘러 싼 인파를 겨우 헤치고 겨우 그들 앞에 섰을 때.
남자는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 다들 지금 뭘 하는 거야?”
우스꽝스러운 차림의 옛 단원들 사이사이에 자신과 함께 악단을 나온 몇몇 연주자들이 한데 섞여 같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과 마찬가지로 라데츠키 행진곡의 선율에 이끌려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멀리서 그의 존재를 눈치챈 호프먼이 바바라를 시켜 그를 이끈 것이다.
“나보고 같이 저기에 같이 동참하라고……?”
끄덕끄덕.
해맑은 아이의 미소에 제법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제와 무슨 면목으로 저 자리에 끼어든단 말인가?
남자는 아이의 요청에 고개를 저으며 물러서려 했지만, 옷깃을 잡아끄는 아이의 힘도 보통이 아니었다.
“안 돼. 꼬마야. 아저씬 저기에 갈 수 없어…….”
도리도리.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흔드는 바바라의 모습에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 순간. 악단을 지휘 중인 민준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단번에 그가 예전에 악단을 나간 연주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민준이는 금관악기 파트에 신호를 주며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나를 받아주려는 것인가?”
자신을 위해 비워진 자리에 마른침을 삼키며 망설이던 그에게 이번엔 호프먼이 먼 곳에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집을 떠난 탕아를 반기듯 단원들 모두 그를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자, 남자는 어느새 케이스에서 트럼펫을 꺼내들었다.
‘우리 연주를 듣고 돌아온 연주자는 지금까지 12명.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관객들의 박수소리도 점차 지쳐가는 지금.
민준이는 새로운 연주자가 투입됨과 동시에 마지막 반복 악절 신호를 주었다.
‘이제야 드디어 절정으로 갈 수 있겠군.’
비에라는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듯이 괴로웠지만, 자신들의 연주를 듣고 돌아와 준 단원들 덕분에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다.
젊은 지휘자의 말대로 라데츠키 행진곡은 수많은 관객과 더불어 잃어버린 동료들을 다시 불러와 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생에 이만큼 열정적으로 연주한 적이 있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지금 이 순간이 그의 음악 인생에 있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모여 있는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단해……. 정말 순식간에 사람들이 엄청 모여들었어.’
야외 연주가 처음인 진아는 관객들의 즐거운 표정과 늘어나는 단원들로 인해 더욱 힘이 실어지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전율을 느꼈다.
이 모든 게 자신과 함께 자라온 민준이의 머릿속에 이미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세게드 여름 축제의 분위기는 지금 그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흥겨운 선율에 최고조로 무르익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떠나간 단원들까지 제법 돌아온 이 순간…….
지휘자는 그들에게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주문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한도의 선율을……. 그 음색을…….
이곳에 모인 대중들에게 들려줄 것을 명령하듯 얇은 지휘봉 끝이 황금색 노을을 발하고 있는 태양을 가리킨 순간.
라데츠키 행진곡의 최절정 구간이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지휘자의 손끝이 관객들을 향하자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흥겨운 리듬에 맞춰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연주자와 청중들이 하나가 되어 세게드 광장을 가득 메우자, 뒤늦게 오케스트라에 참여한 남자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돌아가고 싶었던 악단.
차마 연습실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었던 그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절정에 다다른 라데츠키 행진곡은 땀에 흠뻑 젖은 민준이의 격렬한 제스처와 함께 끝을 알리자 쏟아지던 청중의 박수 소리도 동시에 끝을 맺었다.
‘끝…났다.’
마지막 순간에 뿜어낸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악장 비에라가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순간.
세게드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환호성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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