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Ep.22 : 거리의 음악가 (8)
젊은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연습 중이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손이 일제히 멈추었다.
객석에는 오늘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단원들을 바라보는 호프먼 씨가 있었다.
5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민준이가 새로운 오케스트라에 적응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도움이 매우 컸다.
전 지휘자이자, 단원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호프먼은 자신의 친구이자, 콘서트마스터인 비에라에게 새로운 지휘자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의 부탁을 외면할 만큼 고집불통은 아니었기에 비에라는 못 이긴 척 호프먼의 말을 따랐다.
아니, 사실 비에라는 어느 정도 차민준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첫 연주에서 차민준이 보여준 카리스마에 이끌려 자신의 템포를 새카맣게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으니까.
짧은 기간이라도 그의 지휘에 맞춰 연습을 하다보면 성공적인 무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창피는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지휘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비에라는 홀가분한 느낌마저 들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지휘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줄 것인지 내심 기대마저 들던 그때, 젊은 지휘자는 낯선 손님을 함께 데려왔다.
‘누구지? 새로운 연주자인가?’
‘설마 축제를 이틀 앞두고 새로운 연주자라니.’
‘하지만 직접 이곳까지 불러올 정도면 대단한 연주자가 아닐까?’
‘과연…….’
낯선 환경에 얼어붙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만 느껴졌다.
어떤 이는 그녀를 향해 기대에 찬 눈초리로…….
누군가는 경계의 눈빛으로…….
한국에서 대학생들과 함께했던 작은 오케스트라가 마치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졌다.
‘마을 축제 규모의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걱정 하지 말라더니. 차민준 이 순 뻥쟁이.’
마른침을 삼키며 옆에 있던 민준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단원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한국에서 온 제 친구예요. 이름은 천진아. 축제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오보에 파트를 맡기려 합니다.”
민준이의 입에서 오보에라는 단어가 떨어진 순간.
오케스트라에서 오보에를 맡고 있던 자콥 씨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제까지 혼자서 파트를 맡고 있던 그에게도 드디어 함께할 동료가 생긴 것이다.
“오~ 안 그래도 관악기 파트가 불안했는데, 잘됐군.”
호프먼은 진아의 소개에 가벼운 박수로 그녀를 환영해주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성당에 들어가기 전 민준이에게 배운 언어로 단원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모두가 박수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자콥은 손수 그녀의 자리를 마련해주며 자신은 한 자리 옆으로 물러섰다.
“잘 부탁해요. 아가씨.”
“네. 감사합니다.”
푸근한 첫 인상의 자콥은 어린 시절 만화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이웃집 할아버지를 연상 시켰기에 진아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깐깐한 인상의 악장 할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편이 심적으로도 위안이 되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자콥의 후덕한 상반신은 날씬한 진아를 가려주기에 매우 적절한 방패가 되었다.
“그럼 새로운 인원도 투입되었으니, 정식으로 오늘 연습을 시작해 볼까요?”
그때 비에라가 바이올린 활을 치켜세우며 민준이에게 물었다.
“잠깐만 그 전에 우리에게 해줄 말이 남아 있을 텐데?”
“아, 흩어진 오케스트라 인원들에 대해서 말이죠?”
“맞아. 이제 곧 있으면 무대에 올라야 하는데, 여태까지 아무런 조치도 없으니. 괜히 나까지 불안해지는군.”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운 지휘자를 들였으니 당장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저희는 당일 이 인원으로 무대에 오를 겁니다.”
“뭐? 그렇다면 처음이랑 얘기가 다르잖아. 단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선곡을 바꾼 것이 아니었나?”
당황한 기색의 비에라와 달리 민준이는 여유로운 미소로 차분히 그를 달랬다.
“저희가 부르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음악이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허어… 당최 무슨 뜻인지 점점 모르겠군.”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호프먼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지. 민준군에게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 그럼 오늘 연습을 시작하죠. 새로운 인원도 있고,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혹독할 수도 있겠지만, 저를 믿고 따라와 주셨으면 해요. 그럼 갑니다.”
가로로 뉘어진 민준이의 지휘봉이 그의 손끝에 튕겨 세워진 순간.
방금 전까지 화목했던 분위기의 오케스트라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진아 역시 거의 10년 만에 연주자와 지휘자로서 마주한 민준이의 모습에 살짝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 맞아. 전에도 이런 느낌이었지.’
짧게나마 당시 어린이 오케스트라 무대를 떠올린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오보에를 움켜쥐었다.
&
“징하다. 징해…….”
연습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부르튼 입술을 저린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던 진아는 앞서 걸어가는 민준이를 쏘아 보았다.
‘세상에 한 번도 안 쉬고, 2시간 동안 같은 곡만 내리 같은 곡만 연주시키다니. 악마다. 악마야.’
덕분에 진아의 머릿속은 아까부터 라데츠키 행진곡이 끊이지 않고, 반복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지만, 실제로 겪고 나니 생각보다 고된 연습량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미안. 나 때문에 헝가리에 오자마자 고생만 하네.”
“흥. 용케도 알긴 아네?”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나도 엉겁결에 맡아버려서 네가 이해 좀 해주라. 대신 축제가 끝나면 근사한 곳 구경시켜줄게.”
“그 약속 꼭 기억해 두겠어. 그럼 후아암~ 잘 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진아는 민준이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흘리며 방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불안한 눈으로 끝까지 바라보던 민준이는 그녀가 복도 쪽으로 사라지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한 시.
도착하자마자 고된 연습을 강행했으니, 아무리 체력이 강한 진아라도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의 전화 한 통에 지체 없이 달려 와준 그녀가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어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연습한 거예요?”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카운터 쪽에서 바바라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아와 민준이의 목소리에 잠시 나와 본 모양이었다.
“네. 이제 마르코 씨의 집에 돌아가 보려구요.”
“아가씨는 방에 잘 들어갔어요?”
“방금 올라갔어요.”
“많이 피곤했나보네. 하긴 그 먼데서 왔으니 무리도 아니지. 한국이라고 했던가?”
“네. 맞아요.”
“마음씨도 곱고 얼굴도 예쁜 친구네. 애인이야?”
그녀의 질문에 민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예요.”
“아직 애인까진 아닌가보네~”
젊은 남녀의 훈훈한 분위기에 바바라의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돌아가서 잘 거면 따듯한 우유라도 줄까? 숙면에 도움이 될 거야.”
사실 바바라의 어머니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었던 민준이는 그녀의 친절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작은 냄비에서 따듯하게 데워진 우유를 머그컵에 옮겨 담은 그녀는 민준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쪽도 여행 중인데, 어쩌다 마르코네 악단까지 떠맡아 버렸네?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공부 중이라.”
“흐음~ 그래도 젊은 나이에 대단한 실력이네. 우리 바바라가 요즘 그쪽 피아노랑 바이올린을 듣고 무얼 배울까 고민 중이라니까. 고작 네 살인 주제에~”
“벌써요? 나중에 어마어마한 음악가가 되겠는데요?”
잠시 동안 꼬마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로 한차례 웃음꽃을 피운 그들의 대화에서 바바라의 어머니가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어왔다.
“그런데 어쩌다 그 먼 데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음악 공부라면 이런 시골 보다 훨씬 좋은 곳이 있을 텐데?”
“실은 찾고 있는 가게가 하나 있어서요.”
“이곳에? 어떤 가게를?”
“아직까지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래된 골동품 가게인데, 주로 악기를 취급하는 곳이에요.”
“악기를? 글쎄 그런 가게 있었나?”
“꽤 오래된 가게라 이젠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언제 있었는데?”
“1970년대?”
“뭐? 그럼 그쪽 나이보다 더 오래된 거 아냐?”
“그럴 거예요. 그저께 마르코 씨랑 근처 몇 군데 다녀왔는데, 제가 찾던 가게는 아니더라구요.”
“최근에는 골동품 가게들도 많이 사라졌으니까. 더구나 악기를 주로 다뤘다면 벌써 사라지고도 남았을걸?”
“역시 그럴까요…….”
“그런 거라면 마르코 녀석보단 비에라 씨나 호프먼 씨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거야. 세게드 출신에다 평생 이곳에서 살아왔으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뭘~ 네 덕분에 요새 오케스트라에 활기가 넘치던데? 바바라도 좋아하고.”
“아, 아주머니. 실은 바바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응? 무슨 부탁?”
두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는 그녀에게 민준이는 오케스트라를 맡을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털어 놓았다.
잠시 후. 민준이의 계획을 모두 들은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야?”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뭐~ 다들 거리에서 음악을 하던 사람들이라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과연 깐깐한 비에라 씨가 부탁을 들어줄까?”
“실은 저도 그게 가장 걱정이에요.”
“그래도 정말로 하게 된다면 진풍경이겠는데?”
“아마 세게드 축제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무대가 될 수도 있겠죠.”
“아니 그 정도면 역대 축제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무대가 될 수도 있겠는데?”
아주머니의 칭찬에 민준이는 얼굴을 붉히며 재차 되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바바라를 조금 빌려 가도 될까요?”
“좋아~ 그 아이한테도 분명 좋은 추억이 될 테니까.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축제 날 기대할게. 아침에 바바라가 일어나면 신나하겠다.”
“저녁 연습하기 전에 바바라를 찾으러 올게요.”
“응. 조심해서 들어가렴.”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햇볕에 하루 종일 달궈진 도로 위로 떠도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삼키며 민준이는 생각했다.
‘분명 재미있는 무대가 될 거야.’
&
날이 밝아 오고, 최종 연습을 앞두고 초저녁에 성당에 모인 단원들은 민준이의 제안에 경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발이 심한 것은 역시나 악장인 비에라였다.
“자네 지금 우리와 장난하자는 건가?”
“아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멀쩡한 무대를 내버려두고 거리에서 공연을 하려는 게야.”
비에라의 질문에 민준이는 훌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거리의 음악가들이니까요. 그러니 비좁은 무대에서 뛰쳐나와 사람들과 부대끼며 광장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차민준의 대답에 비에라는 할 말을 잊은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고, 객석에 앉아 있던 호프먼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핫하. 그것 참 재밌는 생각인데? 꼬마 아가씨와 거리의 악사라. 제법 괜찮은 그림이지 않나?”
호프먼의 박장대소에 민준이 옆에 서 있던 바바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비에라는 호프먼과 꼬마 아가씨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모든 걸 뒤집어엎을 수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게나.”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악장님.”
이로서 민준이가 생각했던 장기판은 완벽하게 짜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