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Ep.22 : 거리의 음악가 (4)
해 질 녘, 가장 먼저 성당의 문을 두드린 것은 중년의 배불뚝이 남자였다.
커다란 덩치에 안 맞게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악기 케이스가 들려 있었는데, 사이즈로 보기엔 목관 악기로 보였다.
그런 그의 앞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허리를 숙이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자콥 씨.”
“매번 이렇게 성당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나마 여러분들의 축제 준비를 도울 수 있어서 기분이 좋군요. 아마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하하~ 글쎄요. 주님께서 저희들의 형편없는 음악에 벌을 주진 않으실까 걱정입니다만.”
“그럴 리가요. 여러분 모두 한때는 이 거리를 훌륭한 음악으로 가득 채우신 분들이지 않습니까. 개개인의 실력은 그만큼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모두를 이끌어 줄 만한 지휘자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배불뚝이 남자는 신부의 말에 그동안 망설였던 말을 어렵사리 입 밖에 꺼내보았다.
“혹시 신부님께서 저희를 이끌어 주실 수는…….”
“네? 제가요? 그건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단지 이 작은 성당의 성가대만 지휘했을 뿐이지. 오케스트라는 정말로 무리입니다.”
“역시 그런가요. 단원들 중에는 신부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종종 흘러나와서…….”
“믿고 기다리신다면 분명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적이라… 축제까지 앞으로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정말로 가능할까요?”
“우리 함께 기도드리죠.”
신부는 성당 높은 곳에 걸린 십자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붉은 노을 아래 홀로 세워진 십자가는 그 어느 때보다 고고해 보였다. 자콥은 신부를 따라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잠시 둘만의 경건한 시간이 흐르고…….
“그럼 저는 이만.”
“네. 신부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두꺼운 성경을 옆에 끼고 자콥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인 신부는 잠시 후 언덕 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성당을 빌려준 신부님이 사라질 때까지 자콥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글쎄요. 신부님. 정말로 일주일 사이에 우리를 이끌어 줄 만한 지휘자가 나타날까요?”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은 남자는 다시 성당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밖은 후텁지근한 여름이었지만, 대리석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 덕분일까?
성당 안은 외부보다 온도가 1~2도가량 낮게 느껴졌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연습실.
오케스트라 연습마저 성당을 빌려야 할 만큼 열악한 환경.
자콥이 소속된 오케스트라는 일찍이 모두 거리에서 음악을 시작한 연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정부나 기업의 후원금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단원 개개인의 사비로 운영되는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
지난 몇 년간 그럭저럭 현상유지를 해올 수 있었으나, 그것도 일주일 뒤에 열리는 축제가 마지막이었다.
거리의 음악가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이들도 벌써 몇 년이나 지속된 얼어붙은 헝가리의 경제 상황에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졌다.
그나마 수도인 부다페스트 같은 경우는 관광객들의 수입으로 그럭저럭 먹고 살만 하다지만, 국경 지역의 세게드에서 거리의 예술가로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오케스트라를 지탱해 주었던 지휘자마저 지난봄 지병을 얻어 현재 입원 중인 상태였다.
아마도 단원들 모두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번이 우리들의 마지막 무대라는 것을…….
자콥은 자신의 오보에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와도 이번 공연이 마지막일 듯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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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녀석은 아직인가?”
“허~ 별일이군. 그래도 연습 시간엔 늦지 않는 녀석인데.”
성당 안에 의자를 모두 치우고 오케스트라 형태로 자리 잡은 단원들은 가장 막내인 마르코가 보이지 않자, 수군대기 시작했다.
활기찬 성격으로 오케스트라의 분위기 메이커를 맡고 있는 그의 부재는 안 그래도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단원들의 안색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 녀석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겠지. 지휘자도 없는 상태로 연습을 이어가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설마, 아무리 그래도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녀석은 아닐 텐데.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러게 아무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일단 그 녀석이라도 있어야 제대로 합주라도 할 수 있으니.”
전 지휘자가 병으로 쓰러진 뒤 자칫 해체될 뻔했던 오케스트라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마르코였다.
그런 그가 설마 자신들을 배신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축제 기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성당 문이 벌컥 열리며 마르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두침침했던 단원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이 녀석.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기어 와!?”
“거 봐. 곧 올 거라고 했잖아.”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오는 마르코를 향해 단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던 중, 그의 등 뒤에 가려져 있던 한 남자가 슬쩍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르코의 키가 워낙 큰 탓일까? 동양인 청년 역시 제법 키가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다.
그는 성당을 이용한 오케스트라를 연습실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르코. 거기 네 뒤에 있는 분은 누구냐?”
첼로 연주자인 보즈콕은 마르코와 함께 나타난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여행객이 이곳 세게드까지 찾아올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어깨에 걸쳐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본 순간. 보즈콕을 비롯한 단원들 몇몇은 마르코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코 너 설마…….”
“축제를 코앞에 두고 새로운 단원을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안타깝게도 헝가리어에 제법 능숙했던 민준이는 자신의 귓가에 날아드는 사람들의 격앙된 언어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환영 받는 느낌은 아닌데?’
자신이 마르코의 제안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나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일단 하기로 한 이상 끝까지 가볼 마음은 있었다.
‘불평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오케스트라치고 규모가 너무 작은데?’
일반적으로 현대에서 오케스트라 인원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명 정도가 필요했는데, 현재 성당 안에 모인 사람의 머릿수는 15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마르코와 자신을 포함해도 17명…….
이 정도면 오케스트라의 초창기 무렵의 인원수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질 정도로 굉장히 자그마한 악단이었다.
물론 이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연주가 가능했지만, 악기 편성부분에서 제한이 걸리는 곡들이 많아 무리가 있어보였다.
‘차라리 9년 전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가 훨씬 인원이 많았던 것 같은데?’
그때 마르코가 단원들을 향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뒤에 있던 민준이를 소개했다.
“오늘 제가 데려온 이 청년은 우리 오케스트라에 꼭 필요한 포지션을 맡아 줄 겁니다.”
“꼭 필요한 파트? 글쎄 지금 비어 있는 포지션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이봐 마르코 지금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제와 다른 연주자랑 또다시 화음을 맞출 시간이 있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새로 온 청년에겐 미안 하지만, 우리에겐 남아 있는 시간이 없어.”
그러나 마르코는 특유의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이 청년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테니까.”
“뭐!?”
“뭐라고!?”
마르코의 대답과 동시에 몇몇 연주자들은 손에 들고 있던 악기를 떨어뜨렸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을 지휘자로 삼겠다고?”
“그래 마르코. 전 지휘자였던 죠셉 씨 역시 우리와 몇 년 동안 호흡을 맞추었는데, 적어도 새 지휘자를 들이려면 우리랑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한 사람을 데려와야지!!”
물론 어느 정도 반발은 예상했었던 마르코였기에 차분히 이유를 설명해주려던 찰나. 뒤에 서 있던 차민준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을 겁니다. 헝가리어도 어느 정도 가능하니까요.”
그 순간 성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헝가리어의 기원에 속하는 마쟈르어는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지에서 사용하는 소수 민족의 언어였기에 설마 동양인 남성의 입에서 유창한 발음이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마르코의 제안에 반발했던 목소리를 전부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대부분은 창피함에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오케스트라 대열에서 오보에를 맡고 있는 자콥 씨가 민준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게 동양인 젊은이.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단순히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네. 자네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음악엔 그 나라 특유의 정서가 묻어 있기 마련이야. 자네의 지휘 경력이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단시간에 자네의 지휘를 따르기 힘들다는 뜻일세.”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도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런 연습 없이 딱 한 곡만 지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 여러분이 저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깔끔히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민준이의 대답에 몇몇 단원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곡정 도야 속는 셈치고 그에게 맡겨도 손해 볼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준이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는 마르코는 답답함에 속이 타 들어갈 지경이었다.
‘지금 이 녀석을 내치는 것은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 차 버리는 거라구. 이 사람들아~!!’
하지만 정체를 밝히지 않기로 약속한 터라 마르코는 분한 마음을 억누른 채 묵묵히 자신의 포지션으로 향했다.
오케스트라 대열의 가장 뒤로 향하는 마르코의 뒷모습에 차민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호오, 마르코 씨의 포지션은 팀파니였구나.’
드럼 형태의 타악기인 팀파니는 오케스트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악기 중 하나였기에 마르코의 피아노 연주를 한차례 지켜본 민준이는 한편으론 상당히 안심이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앞에 지휘자가 있다면 팀파니의 템포는 오케스트라 전체에 영향을 주는 든든한 수호자였으니까.
고작 16명의 단원으로 이루어진 작은 악단이라 할지라도 민준이와 마르코가 각각의 자신의 위치에 오르자, 제법 안정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청년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 단원들은 대부분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악기를 들어올렸다.
잠시동안 지휘자용 악보인 스코어를 살펴본 민준이는 익숙한 교향곡에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웠다.
‘베토벤 7번 교향곡이라…….’
어린 시절 자신이 처음으로 지휘했던 이 곡을 설마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를 만큼 익숙했기에 민준이는 품 안에서 지휘봉이 담겨있는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젊은 나이에 맞지 않게 지휘봉을 살포시 말아 쥐는 모습에 자콥을 비롯한 몇몇 단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지? 단지 지휘봉만 손에 쥐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자,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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