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Ep.22 : 거리의 음악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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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우 키가 컸다.
천장이 제법 높게 설계된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정수리 끝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였으니까.
한국에서 제법 큰 키에 속했던 민준이도 그의 옆에 서면 머리통 하나만큼 차이가 났다.
동상을 연기하고 있었을 때는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잘 몰랐는데, 전체적으로 몸이 가늘고 팔다리가 길어 꼭 만화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분장 도구로 어지럽혀진 그의 방에는 행위 예술을 위한 형형색색의 모자와 옷가지들이 즐비했다.
“와… 진짜 겉으로 보면 조각품이 쓰고 있는 것들이랑 별다를 게 없네?”
모자 하나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민준이는 샤워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멎자, 조심스레 모자를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방금 전까지 쇳덩이와 다를 게 없어 보였던 남자가 수건으로 긴 머리를 비비며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시원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맞는 말이다.
한 여름. 그것도 38도에 육박하는 한낮에 아무리 그늘이어도 무척이나 더웠을 것이다. 거기다 장시간 동안 미동조차 없이 서 있는 것은 근육에 엄청난 부담을 주기에 웬만한 체력 없인 버티기 힘들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상체를 드러낸 남자의 몸에는 잔 근육이 엄청 돋아나 있었다.
‘그냥 저 상태로 석고를 풀은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근사한 조각상이 되겠는데?’
남자는 자신의 몸을 유심히 바라보는 민준에게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이쪽 취향이냐?”
“네? 아, 아뇨!! 절대 아닙니다.”
“그래? 아쉽네.”
‘뭐? 아쉽다고……?’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남자는 나무 의자 등받이에 대충 수건을 걸쳐 두었다.
머리카락까지 색을 입혀 분장했었는지. 수건엔 갈색 물감이 군데군데 묻어나 있었다.
“대충 샤워도 끝냈으니 슬슬 다시 나가볼까?”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챙겨 입던 남자는 잠시 후 뭔가 떠올랐는지 민준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아르센 마르코. 그냥 편하게 마르코라고 불러도 돼.”
“마르코…….”
“응. 맞아. 그렇게 부르면 돼. 억양이 제법인데? 우리나라 말은 어디서 배웠어?”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3개월 정도 머물렀어요.”
“호오~ 부다페스트. 도나우 강이 흐르는 낭만의 도시지. 그런데 여기 세게드까진 무슨 일로 온 거야?”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사정이라. 처음 만난 사람에겐 말하기 힘든 사연인가?”
그러자 민준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오래된 가게를 하나 찾고 있어요.”
“얼마나 오래된 가게인데?”
“1970년대에 있었던 골동품 가게인데, 주로 악기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흐음~ 1970년대면 거의 30년 전인데, 그런 곳이라면 세게드 시내에 한두 개 정도 있긴 하지.”
마르코의 대답에 차민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정말인가요?”
“반응을 보아하니. 제법 중요한 일인가 보구나?”
“네. 혹시 그곳에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전에 중요한 한 가지 일만 처리해 준다면.”
“그게 뭔데요?”
그때 기막힌 타이밍으로 마르코의 뱃속에서 우렁찬 울림이 들려왔다.
꾸르르르륵…….
뱃속에 장기들이 전부 내려앉은 듯한 소리에 마르코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뱃속에 뭐부터 좀 채워 넣으면 안 될까?”
세게드 거리의 행위 예술가 아르센 마르코. 아무래도 생계가 넉넉한 편은 아닌 듯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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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드하면 굴라쉬지. 암 그렇고말고.”
헝가리의 전통 요리인 굴라쉬는 소고기와 야채를 주재료로한 스튜의 일종이었다. 거기다 각종 향신료를 더해 파프리카와 토마토 페이스트가 듬뿍 들어간 빨간 스프는 헝가리어로 ‘구야시’라 불렀다.
세게드에서 나고 자란 마르코는 시내에 자주 들리는 식당으로 민준이를 안내해 주었다.
“굴라쉬는 여기가 최고야. 아마 부다페스트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더 맛있을걸?”
가게로 오는 동안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마르코는 자신 있게 앞장서다가 가게 간판에 제대로 이마를 부딪혔다.
“커흑… 젠장. 또 박았어.”
목재로 만들어진 간판은 같은 상황을 여러 번 겪었는지 밑 부분이 제법 닳아 있었다.
‘간판이 묘하게 낮긴 하네. 그래도 저기에 부딪힐 정도라니…….’
이마를 감싸 쥐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마르코 등 뒤에서 민준이는 자신의 이마와 간판의 높이를 한번 재어보곤 그의 뒤를 따랐다.
점심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저녁 시간이라고 하기도 뭐 한 오후 4시..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 안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구석에서 미지근한 맥주를 삼키며 체스를 두고 있는 노인들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아주머니 몇몇을 제외하면 말이다.
마르코는 상당히 배가 고팠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종업원을 찾았다.
“다 들리니까 그만해. 테이블 부서지면 물어줄 거야?”
묘하게 귀에 익은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 거리에서 본 아이 엄마가 허리춤에 팔을 올리며 다가왔다.
딸이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곡을 청하자, 서둘러 말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딸아이의 이름이 바바라였던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이 이름을 기억해낸 민준이는 혹시나 아이가 있지 않을까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화분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이쪽을 바라보던 여자아이가 민준이의 시선에 서둘러 몸을 숨겼다.
“바바라. 이쪽으로 와서 제대로 인사해야지.”
“시러~”
“바바라. 엄마가 손님들이 오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엄마의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져서일까? 그제서야 바바라는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민준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바바라?”
“안녕…….”
빨개진 얼굴로 온몸을 배배 꼬는 아이의 모습에 바바라의 어머니는 작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주문은 뭘로?”
그러자 마르코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끝내주게 양이 많은 굴라쉬 두 개. 그리고 목구멍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맥주 두잔.”
“우리 집 메뉴에 ‘끝내주게 양이 많은’ 굴라쉬는 없는데?”
“그냥 좀 많이 달란 뜻이야.”
“알았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주문서에 굴라쉬 두 개를 빠르게 휘갈겨 쓰고는 종이를 찢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잠시 후. 주방 쪽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향긋이 퍼져 나오자, 마르코는 못 참겠는지 포크와 스푼을 양손에 들고 침을 꼴깍 삼켰다.
민준이는 소중한 밥벌이 도구인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안에 담겨 있던 지폐를 꺼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벌었어?”
“그럭저럭 며칠 지낼 정도는 되겠네요.”
“그래?”
순간 마르코는 민준이 손에 들려 있던 지폐 몇 장을 순식간에 낚아채 품 안에 챙겼다.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마르코는 뻔뻔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함께 벌은 돈이란 걸 잊지 말라고, 브라더.”
그가 말한 예술적인 자세 유지가 민준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의 반 강제적인 호객 행위(?) 덕분에 제법 돈을 벌은 것은 사실이기에 민준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바바라의 어머니가 들고 나온 향긋한 굴라쉬가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식탁에 음식을 내려놓기 무섭게 포크로 두툼한 쇠고기를 씹어 삼킨 마르코는 맥주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아까 보니 바이올린 실력이 제법이던걸? 누구한테 배운 거야?”
온전히 자신의 페이스대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마르코에게 민준이는 그를 골려주듯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내뱉었다.
“니콜로 파가니니.”
순간 체스를 두던 노인들과 커피를 즐기던 아주머니들까지 고개를 돌려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정적의 순간 민준이와 마주 앉아 있던 마르코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너 제법 유머감각이 있는데? 아주 그럴듯했어. 뭐~ 그만큼 바이올린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안 그래?”
그는 민준이의 말뜻을 그럴싸하게 해석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마르코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허기져 있던 민준이는 굴라쉬 한 스푼을 입가로 옮기며 웃어 보였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던 니콜로 파가니니는 도박과 여색을 밝혀 딱히 본받을 만한 위인은 아니었으나, 치명적인 카리스마가 담긴 선율과 그만의 독특한 무대 매너로 나폴레옹의 여동생조차 홀리게 만든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의 어깨너머로 바이올린을 배우기까지 민준이가 들인 노력은 상당했다.
‘하긴 배웠다기보단 기술을 훔친 것이나 다름없지. 오죽했으면 도박판에 자기 바이올린까지 걸었던 양반이니까.’
잠시 옛 추억에 잠겨 있던 민준이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마르코의 접시는 깔끔히 비워져 있었다.
마지막 맥주 한 모금까지 깨끗이 비운 그는 벌써 소화를 마쳤는지 거대한 트림을 내지르며 식사를 마쳤다.
“꺼어어억. 아주 잘 먹었다.”
말이야 그랬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게걸스러울 정도로 접시까지 싹싹 핥은 탓에 설거지조차 필요 없어 보이는 그의 접시를 잠시 바라보던 민준이는 예의상 그에게 물어 보았다.
“혹시 더 시키시겠어요?”
“물론이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낚아챈 마르코는 결국 애플파이 한 판과 감자 수프까지 먹고 난 후에야 세상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아~ 이제 진짜 더 이상은 못 먹겠다.”
그가 식사를 마치는 동안 조용히 굴라쉬 한 접시를 비워낸 맥주로 목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배도 채웠으니. 이제 시내에 있다는 가게로 가볼까요?”
“잠깐만 오늘이 화요일이던가?”
“네. 맞아요.”
“아~ 그럼 오늘 가봤자 소용없어. 그 가게 화요일엔 쉬거든.”
“아까는 분명 2~3개 정도 있다고……?”
“그래, 전부 화요일에 쉬어.”
설마 가게 주인들이 모두 화요일에 쉬자고 짠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민준이는 일단 마르코의 말을 믿기로 했다.
“간만에 식도 끝까지 음식을 밀어 넣었더니. 배가 터질 것 같구만. 기껏 모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게 아깝긴 하지만 간만에 식후 운동이나 좀 해볼까?”
“식후 운동?”
의자에 늘어져 있던 마르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전히 체스를 즐기던 노인들과 아주머니가 반가운 미소를 띠우며 입을 열었다.
“마르코 간만에 피아노 솜씨 좀 보여주려나?”
“기대하슈. 아주 끝내주는 걸로 한 곡 뽑아 드릴 테니.”
갑작스러운 마르코의 행동에 민준이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다른 이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 역시 민준이에겐 큰 배움이자, 즐거움이었으니까.
‘과연 어떤 음색을 들려줄까?’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탓에 피아노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은 한 마리의 거미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피아노 앞에 앉은 그가 연주를 시작했을 때.
차민준은 생각보다 놀라운 그의 피아노 실력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민준이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연주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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