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63화 (163/177)

[163] Ep.22 : 거리의 음악가 (1)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남쪽으로 320km. 국경의 끝자락에 위치한 세게드.

살인적인 유럽의 더위에 지친 차민준은 방금 가게에서 사온 물을 들이켰다.

안 그래도 이동하는 동안 흙먼지로 칼칼했던 목구멍에 수분이 들어가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커피 캔 한 개 수준의 조그만 페트병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었다.

한 방울이라도 더 털어 넣기 위해 페트병을 흔들어 대던 차민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우… 덥다. 어째 맥주보다 물이 더 비싸냐. 사막도 아니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로 넘어가는 국경도시 세게드.

국경 인근이라 굉장히 시골틱 한 풍경을 상상했던 차민준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 하는 듯한 도시의 분위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이라면 보통 오스트리아와 독일. 파리 등을 먼저 떠올리지만, 헝가리 역시 동유럽 음악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었다.

헝가리 광시곡으로 유명한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와 요한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다운 도나우강. 그리고 현대에 포크댄스로 발전한 집시들의 왈츠 등등 하나하나 나열하면 끝이 없을 만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음악의 성지였다.

그래서 일까?

음악을 사랑하는 도시의 시민들은 언제나 행동이 여유롭다.

잔잔한 미소를 띠운 채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차민준은 덩달아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은 별로 여유롭지 않구나.”

방금 전 물 한 병을 사면서 남아 있던 잔돈까지 모두 털어낸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별일 아닌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간 먼 길 와서, 저녁도 굶게 생겼는데?”

헝가리의 전통 음식인 굴라쉬의 본고장까지 왔는데, 도착 첫날부터 노숙을 할 순 없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어느새 4개월.

여행 내내 함께한 바이올린 케이스는 어느새 여기저기 상처가 많이 돋아나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크라우잘 광장 한복판에 서 있던 민준은 도저히 여기선 바이올린을 켤 자신이 없었다.

한 줌의 그늘이라도 찾기 위해 광장을 벗어나 다른 광장과 길을 이어주는 카라스 거리에서 민준이는 오늘 저녁과 잠자리를 해결해줄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세게드에는 유난히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광장이나 유명한 거리엔 꼭 동상이 하나씩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 적당한 그늘 아래 조형물에 기대어 있는 남자 동상 아래서 민준이는 오늘의 돈벌이를 시작하기로 했다.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바이올린을 꺼내들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민준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푹푹 찌는 날씨 덕분에 매번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늘어진 현을 조여야 했는데, 이것도 몇 차례 하다보니 제법 익숙해졌다.

약간이나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 아래 바이올린을 든 민준이의 모습은 제법 잘 어울렸다.

“엄마~ 저기 저 오빠 지금 바이올린 켜려나 봐.”

“그러네? 여기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엄마와 함께 시장으로 향하던 어린 소녀가 바이올린 활을 들어올리는 민준이의 모습에 엄마의 치맛자락을 서둘러 잡아끌었다.

“바바라. 엄마 옷 찢어지겠다. 살살 잡아당겨.”

“빨리요. 곧 시작하려나 봐요.”

손가락으로 바이올린 현을 튕기는 스타카토 주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민준이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한국과 일본에서 맛보았던 화려한 무대를 뒤로하고, 한낱 거리의 음악사가 된 민준이는 이미 이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가?”

“이 근처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젊은 동양인 친구로군. 어디 실력을 한번 볼까?”

습하고 더운 날씨였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헝가리인들은 금세 민준이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여전히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어린 바바라도 섞여 있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여 들자, 차민준은 바이올린 활을 멋지게 돌려 현 위에 걸쳐 올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민준이를 바라보던 바바라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민준이는 가장 먼저 달려와 준 꼬마 아가씨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키잉~ 키기깅~~

연주의 시작을 알리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보잉이 한여름 더위에 지켜 있던 사람들의 귓가에 번개처럼 스쳐 지났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빈이나 잘츠부르크에도 뒤지지 않는 세게드 시민들은 젊은 동양인 청년에게서 과연 어떤 곡이 흘러나올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팔꿈치를 직각으로 세운 민준이의 팔이 춤을 추듯 움직이자, 사람들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라 캄파넬라~!”

프란츠 리스트가 1838년에 작곡한 이 곡은 젊은 시절 성직자의 길과 음악가의 길을 두고 고민하던 당시, 파리에서 열린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을 듣고 그것을 피아노로 치기 위해 작곡한 곡이다.

따라서 그 이름 역시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 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연은 1838년 작곡한 라 캄파넬라는 프란츠 리스트가 오로지 자기만 연주할 수 있도록 온갖 기교를 잔뜩 넣어 작곡했기에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후에 많은 이들이 ‘라 캄파넬라’를 연주할 수 있도록 1851년 악보를 수정하였다.

완고한 고집 덕분에 당시 음악가들에게 미움도 많이 샀지만, 프란츠 리스트는 근대 피아노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며 호로비츠 이전 최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헝가리를 대표하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프란츠 리스트를 있게 해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세게드 시민들이 싫어할 리 없었다.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음색은 차민준의 어깨 위에서 마치 살아 숨 쉬 듯 울부짖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활이 현을 스칠 때마다 들려오는 선율은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무더운 여름 속에서 차민준의 연주에선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상당한 실력이군…….”

처음엔 반신반의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점점 민준이의 바이올린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귀를 농락하듯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어린 바바라는 멍하니 민준이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곳에 서서 그의 음악을 듣고만 싶었다.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흘러내린 아이의 손이 감동에 젖어 움찔거릴 때 즈음 차민준의 라 캄 파넬라가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 끝을 알렸다.

연주 도중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눈을 뜨자 거리의 절반가량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이 바이올린 실력이 제법인데?”

“캬~ 간만에 세게드에 제대로 된 연주자가 나타났구만.”

그러나 차고 넘치는 박수와 응원 속에서 정작 민준이의 바이올린 케이스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초조한 마음에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곡을 준비하던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예쁜 꼬마아이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지폐 한 장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민준이 앞에 놓인 바이올린 케이스에 500포린트 지폐를 넣으며 얼굴을 붉혔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에 민준이는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꼬마 아가씨.”

유로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헝가리에서 500포린트면 그래도 적당한 곳에서 한 끼를 때우기에 충분했다.

꼬마 덕분에 일단 저녁을 해결하게 된 민준이는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는 아이에게 말을 이었다.

“혹시 듣고 싶은 곡 있니? 오빠가 들려줄게.”

동양인 젊은이의 입에서 유창한 헝가리어가 흘러나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든 말해 봐.”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놓인 바바라는 한참 민준이를 바라보다가 덜컥 입을 열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그러자 근처에 있던 아이 엄마가 깜짝 놀라 외쳤다.

“바바라 그 곡은 안 돼.”

“왜요……?”

“그건 바이올린 하나론 연주할 수 없는 곡이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왈츠의 왕이라 불린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대표곡인 이 곡은 본래 합창으로 작곡된 곡이다. 전쟁에서 참패해 우울함에 빠져 있던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곡으로 후에 합창에서 오케스트라 전용으로 편곡해 굉장한 인기를 누린 곡이기도 했다.

그런 거대한 곡을 바이올린 하나로 연주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기에 바바라의 엄마는 민준이를 향해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라. 이렇게 귀여운 숙녀의 부탁을 외면할 수는 없죠.”

아이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민준이는 다시 멋지게 활을 빙글 돌려 현 위에 올렸다.

“시작한다.”

원래라면 관악기에서 흘러나와야 할 묵직한 소리가 바이올린의 현을 타고 흐르자, 아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스타카토와 현을 이용해 집시들의 왈츠 풍으로 연주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박수로 리듬을 맞추며 민준이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잠시 후. 허리와 어깨를 이용해 크게 움직이며 활을 켜자, 바이올린 하나에서 나오는 음색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코드를 쥐는 손가락만으로 스타카토 연주하는 그의 재주는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와아…….”

아이와 함께 넋을 놓고 바라보던 클라라의 어머니도 설마 이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란 생각은 못 했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렇게 아름다운 도나우 강의 메인 루트를 한 바퀴 돌아 나온 차민준의 바이올린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두 번째 곡의 끝을 맺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그저 멍하니 청년을 바라보던 그때..

차민준의 옆에 있던 차가운 동상의 입에서 갑자기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브라비~!!!!!!!! 정말 엄청난 녀석이구만~!!”

“우와아아악!!”

여태까지 동상인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실은 피부에 색을 칠한 행위 예술가였던 것이다.

연주하는 동안 정말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깜짝 놀란 민준이는 심장이 내려앉은 듯한 충격과 함께 선 채로 굳어버렸다.

“야이~ 구두쇠들 같으니, 다들 빨리 지폐 한 장씩 안 꺼내? 길 가다 이런 음악을 들었으면 알아서 돈을 내야 할 거 아냐?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 헝가리인의 인심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거냐. 거기 빨리 돈 안 내?”

충격에 멍하니 굳어 있는 민준이 대신 동상을 연기(?)하던 남자는 대신 돈을 걷어 주었다.

남자의 호통 때문일까? 텅텅 비어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에 수북이 지폐가 쌓였다.

“어이, 청년 이름이 뭐야?”

“네?”

“이름이 뭐냐고, 이름 없어?”

“아, 그… 차민준이요.”

아직까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차는 차붐밖에 없는데, 너 혹시 한국인이야?”

“네. 맞아요.”

“오~ 이것 참 반갑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 돈으로 밥이나 먹으러 갈까?”

“네? 지금요?”

“이정도면 이미 벌 만큼 벌었잖아. 왜 더 털어가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날도 더워 죽겠으니 나도 오늘은 그만 영업 해야겠다.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고.”

“덕분이라뇨……?”

“섭섭하게 이제 와서 모른 척하기야? 나의 예술적인 자세유지와 너의 신들린 음악으로 ‘우리’가 이렇게 돈을 번거잖아.”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시끄러운 남자였다.

동상을 연기 중일 때는 어떻게 말을 참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너 잘 데는 있어?”

“아뇨. 아직.”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이런 꼴로 식당에 갈 수는 없으니까.”

그동안 홀로 조용히 헝가리 곳곳을 누비던 차민준은 갑자기 나타난 혈기 왕성한 사내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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