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60화 (160/177)

[160] Ep.21 : 오래된 피아노 (3)

‘분위기를 조금 바꿔 볼까?’

‘피아니스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피아노를 잘 치는 것만으로 ‘피아니스트’라는 칭호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피아니스트’란 저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 만큼 매력적인 건반을 선사하고, 그로 인해 좌중의 분위기를 뒤엎어 버릴 정도의 특유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베토벤과 차이콥스키… 모차르트와 가면의 남자.

그 외에도 수많은 음악가들의 만남 속에서 차민준은 자연스레 그들이 뿜어내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과는 조금 성향이 다르지만,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건반에 담아낼 만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새하얀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차민준은 청중의 박수소리가 잦아들자마자 한 줄기 고운 음을 뽑아내었다.

“어라? 이 곡은?”

연주회 프로그램에 쓰여 있는 첫 곡은 분명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었다.

곡의 명칭에서 전해지듯 청중들의 긴장된 마음을 차분히 감싸 주는 따스한 선율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그러나 차민준이 무대에서 첫 곡으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Ah! vous dirai-je, Maman’ (아! 어머니 말씀드리죠.)는 국내에서 동요 ‘반짝 반짝 작은 별’로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곡이었다.

본래 이 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이 아닌 프랑스의 민요 멜로디를 가져와 모차르트가 변주 시킨 곡으로 후에는 이 곡의 리듬을 이용해 알파벳 곡을 만들어낼 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곡이었다.

“와아… 반짝반짝 작은 별이 이렇게 화려한 곡이었나?”

대부분의 청중들이 동요로 알고 있는 이 곡은 모차르트의 변주곡을 그대로 연주했을 때야말로 그 진가를 드러내었다.

특히나 후반부 악절은 모차르트 살아가던 시대에 유행했던 피아노 양식을 그대로 드러내어 비록 프랑스 민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의 오리지널이라 봐도 손색없을 만큼 훌륭한 악상이 담겨 있었다.

차민준의 깜짝 선곡으로 청중들의 입가에 하나둘 미소가 떠오를 때 즈음…….

모차르트의 곡은 어느 순간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흐름이 어찌나 부드러웠는지 몇몇 사람들은 곡이 바뀐 것조차 뒤늦게 깨달을 만큼 차민준의 연주는 더없이 훌륭했다.

‘녀석… 아주 관객들의 귀를 가지고 놀 작정이냐.’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석동철 교수는 곡이 바뀌던 그 순간을 정확히 캐치해냄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자신과 함께 공연장에 온 한국 클래식 협회 위원들은 차민준의 뛰어난 센스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더욱더 깊이 그의 음색에 빠져들고 있었다.

음악에 집중할수록 귀를 움찔거리는 버릇이 있는 정원철 원장은 눈앞에서 연주 중인 차민준의 실력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연신 귀를 움직이고 있었다.

잔잔한 선율이 빗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듯 차민준의 피아노는 관객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촉촉이 젖게 할 만큼 시원한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발터 뮐러와의 공연 덕분인가? 아니면 일본에서 무언가 따로 느낀 바가 있었나?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예리한 테크닉으로 승부하던 녀석이 이제는 연주홀 전체를 휘어잡을 만큼 분위기로 승부를 띄우는구나…….’

석 교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한 민준이를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화려한 조명하게 연신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차민준을 바라보면 아직도 9년 전 어린이 피아노 대회 예선의 그날이 떠올랐다.

조그마한 등을 곧게 세우고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하던 꼬맹이의 모습.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이어지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만약 선이가 있었다면 민준이와 좋은 라이벌이 되었을 텐데…….’

어린 민준이의 깜짝 놀랄 만한 피아노 실력을 보고도 그가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선이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이미 세상엔 괴물 같은 실력을 가진 천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소녀 덕분에 민준이의 피아노를 더 세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발터 뮐러라는 뛰어난 스승을 만나 훌륭히 자라났지만, 민준이는 석 교수에게도 소중한 제자나 다름없었다.

스승으로서 훌륭히 성장한 제자만큼 자랑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석 교수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오수정 선생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석 교수를 바라보고 있던 오 선생은 팔걸이에 올려진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민준이의 어린 시절을 함께 돌보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온 그들은 오랜 연애기간 끝에 올해 5월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민준이 피아노.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그녀의 물음에 석동철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도 그 말 하려던 차였는데. 자기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렇지?”

“정말이지……. 민준이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이 이상 훌륭한 연주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매번 그걸 다시 뛰어넘을 수 있지?”

“글쎄… 내가 그걸 알았으면 여기 앉아 있겠니? 벌써 저 위에서 연주하고 있겠지.”

“오~ 하긴 그것도 그렇네.”

장난스러운 말투로 미소 짓던 오수정은 석동철을 향해 빼꼼 혀를 내밀었다.

그때 석동철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정원철 원장이 한마디 내뱉었다.

“석 교수… 미안한데 조금만 조용히 해줄 수 없을까?”

“아, 죄송합니다. 원장님.”

간만에 듣는 최고의 연주를 음표 한 개도 놓치기 싫었던 정 원장은 석 교수를 향해 일침을 놓았다. 석 교수가 몸담고 있는 음대의 최우수 졸업자의 연주마저도 다소 싱거웠다고 평가했던 그가 이렇게까지 집중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순간 무대 위 빗방울 전주곡은 관객들의 굳어진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끝을 맺었다.

객석에는 이전부터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친구를 따라, 아니면 상대방의 취향 탓에 어쩔 수 없이 연주회를 찾아온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들이 클래식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각을 첫 연주곡으로 단번에 해소시킨 차민준은 실로 ‘피아니스트’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연주자로 거듭나 있었다.

정원철 원장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여운에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귀에 닿는 선율 하나하나에서 오래된 와인의 풍미가 느껴질 정도야. 쇼팽의 우수에 젖은 선율을 이 정도까지 재현해 내다니, 방금 곡을 와인으로 환산한다면 돔 페리뇽 로제급 정도는 되겠어.’

와인 애주가인 정 원장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좋아하는 와인의 가치와 환산하는 버릇이 있었다. 차민준의 첫 번째 선곡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러운 에피타이저를 즐긴 느낌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럼 다음은 무슨 곡은 들려줄 텐가?’

정 원장은 애초에 연주회 곡 순서가 담긴 책자를 펼쳐보지도 않았다.

선곡 목록을 확인 하고 듣는 것은 영화의 스토리를 미리 알고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객석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차분한 미소로 답례한 차민준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두 번째로 그가 관객들에게 들려줄 곡은 일본에서 열린 콩쿨에서 심사 위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이었다.

잠시 후.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8번 소나타의 도입부에서 정 원장을 비롯한 클래식 협회 위원들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거대한 연주 홀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과감하게 뻗어나가는 선율에 애초에 머리숱이 전혀 없던 협회 위원 한 명은 머리숱이 새로 돋아나는 듯한 감각에 몰래 자신의 정수리를 어루만져 볼 정도였다.

첫 무대로 관객들의 긴장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던 차민준의 피아노가 본색을 드러낸 순간 일반 관객마저도 그의 선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버리겠군. 돔 페리뇽 정도가 에피타이저급이었다니.’

스파클링 와인의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라인에 속하는 돔 페리뇽. 그리고 시작된 차민준의 모차르트 8번 소나타는 묵직한 레드 와인 중에서 최고급이라 치는 샤또 라뚜르의 풍미가 짙게 풍겼다.

세계 5대 와인이라 일컬어진 만큼 레드와인 특유의 원숙하고 강렬한 맛이 일품인 샤또 라뚜르를 떠올린다는 것은 정원철 원장에게 있어서 좀처럼 내주기 힘든 점수였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강렬한 선율 속에 정 원장은 마음속으로 차민준의 8번 소나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20분 동안 꽉 짜여진 모차르트의 8번 소나타는 또다시 관객들에게서 충분한 박수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저런 연주를 하는 동안 단 한 번의 미스터치조차 없다니…….’

차민준의 연주를 지켜보던 석동철은 그의 괴물 같은 실력에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전성기 시절의 자신이라도 지금 민준이가 보인 것만큼 훌륭한 연주를 펼쳐 보이긴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그런 차민준의 연주를 완벽하게 받쳐주고 있는 저 피아노…….

거대한 연주 홀을 꽉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선율을 들려주고 있는 그의 피아노는 일전에 민준이의 단독 연주회에서 보았을 때에도 왠지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제자들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느라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그 피아노의 정체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분명 선이의 피아노인데…….’

어떻게 그 아이의 피아노가 이곳 무대에 설치되어 있는지 석동철은 당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약 30분 동안의 연주를 마친 차민준이 손가락을 관절을 풀어내며 다음 연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 원장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땀이 가득 밴 양 손바닥을 비볐다.

이미 자신이 피아니스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모두 보낸 정 원장은 스스로 점수를 줄 수 있는 화려한 연주는 더 이상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차민준의 다음 선곡에 의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낮은 음으로 시작하는 첫 악절은 차라리 소나타라기보단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합창곡에 어울릴 법했다.

정 원장은 8번 소나타 이상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기묘한 곡풍에 살며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곡이지? 느낌은 모차르트의 분위기와 상당히 흡사한데…….’

클래식 협회의 원장을 지낼 만큼 웬만한 클래식을 전부 접해본 그마저도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비슷한 곡을 찾으라면 오페라 ‘마술 피리’에서 밤의 여왕의 아리아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주변에 앉아 있던 클래식 협회 위원들 역시 귀에 익지 않은 생소한 멜로디에 서로를 향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장 교수님. 혹시 지금 듣는 곡이 어떤 곡인지 아십니까?”

“그, 글쎄요. 저도 잘…….”

클래식 협회 위원들 역시 정 원장의 방침을 따라 아무도 연주 순서가 담겨 있는 책자를 가져 오지 않았기에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석교수와 함께 온 오수정 선생의 손에 들린 프로그램 책자가 정 원장의 눈에 들어왔다.

“석 교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온 일행분이 가져온 프로그램 책자 좀 잠시 볼 수 있을까?”

정 원장의 생각지 못한 부탁에 석 교수는 오 선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책자를 건네주었다.

“고맙네. 지금 연주하는 곡이 대체 어떤 곡인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저 역시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 궁금했던 차였는데 잘됐네요.”

기대에 찬 눈으로 연주곡 순서가 담긴 페이지를 열자 정원장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들의 눈도 동시에 책자를 향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교수들의 이목이 집중된 책자 안에는 지금 연주 중인 곡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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