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58화 (158/177)

[158] Ep.21 : 오래된 피아노 (1)

“풍랑이요……?”

“참으로 엄청난 풍랑이었지. 함께 배에 올라탄 악기 장인들과 몇몇의 음악가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피아노를 지키려 애를 썼지만, 밀려드는 파도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거대한 파도에 배가 뒤집어지고 말았지.”

“아…….”

권선과 차민준은 노인의 이야기에 짧은 탄식은 내뱉었다. 손주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권순철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풍랑이 잦아들고 바다가 고요해진 뒤, 한 음악가가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눈을 떴지. 악기 장인들과 함께 피아노를 완성한 그는 발표회에서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어. 비록 프란츠 리스트만큼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아니더라도 제법 음악에 남다른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

* * *

남자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고 주변을 둘러본 남자는 이내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간밤의 지독한 풍랑과 함께 벼락을 내리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기만 했다.

“대체 여긴 어디냐…….”

지끈 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며 두발을 딛고 일어선 남자의 시선에 멀리 반쯤 물에 잠긴 거대한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상자를 본 순간 남자의 입에서 절로 신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 상자는 발표회에 출품할 피아노가 담겨 있던 상자였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피아노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장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여기저기 부서진 상자의 틈 속으로 바닷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뒤집혀진 배안에서 그들의 피아노가 온전할 리가 만무했다.

남자는 상자에 동여매어진 밧줄을 붙잡고 있는 힘껏 잡아 당겼다.

피아노가 담긴 거대한 상자를 끌어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지만 해변의 고운 모래와 파도의 힘을 이용해 해변 안쪽으로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신과 같이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누군가가 찾아오겠지 싶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허기짐과 목마름에 결국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해변가 뒤쪽에 작은 수풀을 헤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채 30분도 되지 않아. 그는 반대편 해변에 다다랐다.

“뭐, 뭐야 이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자는 북쪽으로 걸음을 옮겨 보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20여 분쯤 지났을까? 언덕길을 오르던 그를 맞이한 것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끝없이 넓은 바다였다.

그제야 남자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아아…….”

바닥에 힘없이 꿇어버린 무릎에서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푸른 빛깔의 바다. 남자는 피아노와 함께 작은 무인도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지독한 풍랑 속에서 기적처럼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기쁨도 잠시였을 뿐인가…….

남자는 쓸쓸한 걸음으로 다시 해변가로 돌아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반대편 해변에서 건조 식량이 담긴 상자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숲속에 작은 샘물도 있었기에 이 정도라면 충분히 버텨볼 자신이 있었다.

배가 난파된 것을 알아내면 근처에 구조선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해안을 지나가는 배들이 볼 수 있도록 작은 모닥불이라도 피워야 했다.

장작을 모으는 대신 남자는 피아노를 감싸고 있는 상자를 뜯어내었다.

“어라? 세상에…….”

안에서 완전히 박살 났을 거라 생각했던 피아노는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정말 기적이로군…….”

과연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피아노라 그런지 몰라도 엄청난 내구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상자를 모두 거둬내고 해변 위에 놓인 피아노는 석양빛을 받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도 너라도 있으니 좋구나.…….”

이미 발표회에 참가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고단한 무인도 생활 속에 피아노라도 한 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남자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강렬한 태양 아래 수분기가 모두 마른 피아노는 비록 자잘한 상처와 군데군데 소금기가 묻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소리를 잃진 않았다.

바닷물을 머금은 탓에 건반을 누를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남자는 식량이 담겨 있던 상자를 의자 삼아 피아노를 연주해보았다.

바닷바람에 실린 피아노 연주를 듣고 혹시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 무인도 근처를 지나는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지? 구조선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짜증이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남자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피아노였다.

어느 날엔 분노를 담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을…….

날이 선선하고 그림 같이 예쁜 하늘이 펼쳐진 날에는 모차르트와 쇼팽을…….

그가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무인도 생활에 피아노라도 없었다면 그는 진즉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이미 미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남자가 발견된 것은 불행하게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이, 너 그 얘기 들었냐?”

“무슨 얘기?”

“이 바다를 지나갈 때,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린대.”

“피아노 소리? 웃기고 있네.”

새벽에 키를 잡고 있던 젊은 선원은 동료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웃어 넘겼다.

옛날부터 바다 사나이들이 자주 하는 농담은 대개 비슷했다. 아름다운 처녀의 노랫소리를 따라 찾아갔다가 암초에 걸려 난파한 설부터 안개가 낀 날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해적들의 노랫소리 등등…….

주로 소리에 관한 설이 많았다.

젊은 선원은 새벽에 피어오르는 바다 안개 속에서 항로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유령선이 나타난다고 하지 그랬냐? 이런 날엔 그 편이 더 어울리지 않겠니?”

“진짜라니까. 나도 얼마 전에 항구에 들어온 선원한테 들은 얘기야.”

“남한테 들은 이야기는 진짜가 아냐. 네가 직접 겪어봐야 진짜인 거지.”

“나 원. 그래 너 잘났다.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키나 똑바로 잡고 있어.”

“빨리 갔다 와. 나도 오줌 마려.”

툴툴거리며 자리를 지운 동료가 배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홀로 남겨진 젊은 선원은 괜스레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이상한 얘기를 해가지고, 썰렁해지게…….”

입술을 삐쭉 내민 선원은 차가운 밤공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동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다단… 다단… 단… 단…

단… 다단… 다단, 단…

차가운 바람 속에 정말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방금?”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선원은 이윽고 귓가에 전해지는 선명한 피아노 연주에 순간 소름을 느꼈다.

“쇼팽의 녹턴……?”

비록 피아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쇼팽의 곡은 워낙 유명했기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새벽에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라니..

평소라면 그저 잠이 부족해서 들린 환청이라 여겼겠지만, 화장실에 간 동료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더욱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어이, 뭐해?”

갑자기 들려온 동료의 목소리에 찔끔 오줌을 지린 선원 곧장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쉬잇……!!”

“뭐야? 갑자기 왜그래?”

“이 소리 안 들려?”

“응……? 무슨 소리?”

그리고 잠시 후. 동료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선원의 얼굴에도 경악이 스쳤다.

“이거 설마……?”

“너도 들리지? 맞지?”

일단 동료 역시 같은 소리가 들린 다는 것에 내심 안도한 선원은 잠시 키를 동료에게 넘겨주고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뭐가 좀 보여?”

“기다려 봐. 망원경 들여다본 지 1초도 안 지났다.”

“그거 꺼내 본다고, 이 안개 속에서 뭐가 보이겠냐?”

“혹시 모르지 근처 배에서 들려오는 소리면 서로 부딪힐지도 모르잖아.”

“아, 그렇군……!!”

동료의 말에 바싹 긴장한 선원은 키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주변에서 또 다른 파도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키를 잡았던 선원은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더 이상 수상한 피아노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기에 두 선원은 서로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아무래도 안개 속에서 다른 배랑 스쳐갔었나 보다.”

“아니, 어느 미친놈이 이 새벽에 베토벤을 치고 난리야.”

그러자 망원경을 거두던 선원이 동료를 향해 무식하다는 눈길로 입을 열었다.

“베토벤? 넌 쇼팽이랑 베토벤도 구별할 줄 모르냐?”

“응? 뭔 소리야. 빠바바밤~!! 빠바바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맞잖아. 인마. 내가 그것도 모를까봐?”

“뭐……? 잠깐만 내가 들은 곡이랑은 좀 다른데? 내가 들은 건 분명 쇼팽이었어. 녹턴 20번. 정확하다고…….”

“…야,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창피하면 그냥 잠시 착각했다고 해.”

“너야말로 그냥 잘못 들었다고 하지 무슨 아는 척을…….”

단, 다단, 단, 단…….

그 순간 귓가에 파고 들어오는 피아노 선율에 서로를 바라보던 선원은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렸다.

“너도 들었지?”

“어…….”

“설마 지금도 베토벤이야?”

자신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료의 눈동자에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황급히 접었던 망원경을 다시 꺼내 들자, 멀리서 붉은빛이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모닥불… 사람인가?”

어느 정도 배가 안개 지역을 벗어났는지, 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 아래 작은 섬이 보였다.

“저런 곳에 섬이 있었나?”

“그러게? 처음 보는 섬인데?”

그 순간 망원경을 이용해 해변가를 바라보던 젊은 선원이 비명과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으와아아악!!”

“뭐야!? 뭔데?”

대신 키를 잡고 있던 선원이 바닥에 넘어진 동료를 부축하며 소리치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망원경을 넘기며 말했다.

“저기 해변가 좀 봐봐…….”

그리고 잠시 후. 망원경을 넘겨받은 동료마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배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그중에는 이 배의 선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이 갑자기 왜 그래? 해적이라도 나타난 거냐!?”

“그, 그게 아니라… 저 섬 해변가에…….”

“응?”

* * *

“허유……. 이거 오래되었군.”

바닷바람에 풍화된 사체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숨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진정 음악가다웠다.

“선장님 이거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시체는 대충 주변에 묻어주고, 피아노는 배에 실어.”

“네에!? 선장님 제정신이세요?”

“뭐 어때 겉보기에 쓸 만해 보이는구만, 헝가리 만물상에 내다 팔면 웬만한 것은 다 받아 주니까. 얼른 싣기나 해.”

“아니……. 선장님 이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데요!?”

“그러니까 제법 두둑이 받겠지? 뭔가 사연도 있어 보이고, 안 그래?”

“끄응…….”

해변가에서 사체를 발견한 두 선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다른 동료들과 함께 피아노를 배에 싣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신호였나 봐.”

“뭐가?”

“우리한테 들린 피아노 소리 말이야. 자기가 여기 있다고 그러니 좀 찾아달라는 신호…….”

“어이, 무서우니까 그만하자. 우린 그냥 어쩌다가 이 섬을 찾아낸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다.”

* * *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세 사람은 어느새 차민준이 이용하는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건물 안에서 집사가 걸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안에 따듯한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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