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Ep.20 : 뉴 에이지. (17)
당시 오래된 피아노의 선율에 깊이 매료된 순철은 상인의 마지막 말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의 문을 두드려보라는 그의 오묘한 말조차 단순히 피아노의 묵직한 선율에 대해 이야기 한 거라 여겼다.
하지만 손녀의 말을 듣는 순간.
순철은 오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골동품 상인의 말이 떠올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손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순철은 울먹이는 손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선아 네가 만난 쇼팽은 어떤 사람이었니?”
그러자 어린 손녀는 잠시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슬픈 사람.”
“응?”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어요.”
그 후로도 권선은 쇼팽의 이목구비에 대해 제법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인상과 눈매를 비롯해 피아노를 칠 때의 특유의 동작까지 재연하는 아이의 손짓에 순철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손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신중했기 때문이다.
“아버님. 자꾸 그러시면 아이 버릇 나빠져요.”
아이의 교육을 생각하는 며느리 입장에선 항상 손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순철이 못마땅한 것이 당연했다.
손녀와 며느리 둘 사이에 끼어버린 순철은 머쓱하게 웃으며 선이에게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선이야. 이 할애비랑 약속 하나만 하자꾸나. 앞으로 쇼팽을 만나든 베토벤을 만나든 그곳에 갈 때는 꼭 할아버지랑 같이 가자꾸나.”
어린 소녀는 할아버지의 말에 조그만 입술을 삐쭉 내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래. 고맙다. 그럼 이제 방으로 들어가 보렴.”
다시 한 번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철은 손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며느리를 타일렀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세심하게 선이를 지켜보자꾸나. 아직 꿈과 현실이 잘 구분이 가지 않는 나이지 않느냐.”
“그럼 쇼팽을 만났다는 건 그렇다 치고, 이 반지는 어떻게 설명하시려구요?”
“음?”
며느리의 손에 놓인 반지를 유심히 살피던 순철은 예전에 해외를 다니며 기념품으로 샀던 반지라고 둘러대었다.
“그럼 선이가 설마 아버님 물건에 손을 댔다는 말씀이세요?”
“괜찮다. 괜찮아. 이번 일은 그냥 한번 눈감아 주자꾸나.”
“아버님~!!”
비록 며느리의 미움을 사긴 했지만, 어린 아이를 무작정 다그쳐서 될 일도 아니었기에 순철은 차라리 이쪽이 속편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외식이라도 나가서 좀 달래주면 되겠지…….’
검은 반지를 손에서 굴리던 순철은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거실에서 피아노가 설치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오래된 피아노가 모습을 드러내자, 순철은 평소와 다른 연습실의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정리정돈이 되어 있던 악보가 피아노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녀석. 엄마한테 혼나느라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나갔구만…….”
바닥에 떨어진 악보를 주워 들며 곡을 살피던 순철은 흩뿌려진 악보들 사이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해 내었다.
“전부 쇼팽의 곡들이잖아?”
다시 악보들을 하나도 정리해 책장에 꽂아 넣은 그는 잠시 동안 오래된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선이가 주로 연주했을 뿐.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한 적은 없었다.
오랜 휴식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순철은 잠시 후 피아노 앞에 걸터앉았다.
“쇼팽이라…….”
젊은 시절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했던 순철과 올리비아는 나이가 들며 쇼팽의 피아노를 주로 들었다.
세월 탓인지 격정적인 선율의 베토벤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쇼팽의 따듯한 피아노가 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던 순철은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끼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제법 지름이 커보였던 그 반지는 손가락에 끼우자 꼭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최근에 눈이 침침해진 탓일까?
손에 끼워진 반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순철은 이내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쇼팽 녹턴 9번. 1악장.
비록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하여도 그의 실력은 여전했다.
오히려 관록이 묻어난 그의 연주는 느린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귓가에 스며들었다.
쇼팽의 피아노를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어느새 오랜 세월 피아노와 함께 해온 권순철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의 악보 속에 그려진 음표 하나하나가 피부 결에 와 닿는 느낌.
그 감각을 쫓아 연주에 집중할 때면 그들의 피아노에 한걸음 더 다가간 듯한 성취감과 함께 짜릿한 흥분에 휩싸였다.
녹턴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분위기에 취해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하던 순철은 순간 기묘한 감각에 빠졌다.
눈을 감은 채로 피아노를 연주하던 순철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있는 곳이 집 안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 순간.
한창 절정으로 오르던 그의 피아노가 멈췄다.
왠지 그대로 연주를 계속 해버리면 굉장히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뭐였지……? 방금 그 느낌은?’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에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후다닥 소리와 함께 어린 소녀가 제 방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 * *
“아버님이 선이한테 너무 관대해서 큰일이에요. 애도 그걸 아는지 할아버지 뒤로만 숨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아들 녀석이 퇴근한 뒤, 거실에서 들려오는 부부의 대화에 순철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선이 예뻐한 게 하루 이틀인가? 당신이 조금만 참지 그랬어.”
“그래도 요즘엔 정도가 너무 심해요.”
“그래? 으음… 알았어. 주말에 아버지한테 따로 이야기 좀 해볼게.”
사실 권순철도 알고 있었다. 너무 오냐오냐 하는 것은 아이의 교육에도 좋지 않다고…….
하지만 피아노를 가르칠 때마다 그 조그마한 손으로 커다란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하얗게 밤을 새워 한 가지 결단을 내린 순철은 자신을 대신해 손녀를 가르칠 새로운 선생님을 모셔왔다.
낯선 이의 등장에 한동안 할아버지의 바지 뒤에 숨어 있던 선이가 호기심에 고개를 빼꼼 내밀자, 소녀의 피아노 레슨을 맡게 된 남자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선생님 이름은 석동철이라고 한단다.”
현재 한국 클래식계에서 제법 유망주로 이름을 날리는 남자.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 자리에 역임하게 된 그는 권순철이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는 동안 주목하던 학생이기도 했다.
“오랜만이네. 석 군.”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우선은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지?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님의 부탁이라면 열일 제쳐두고서라도 와야죠.”
“말만으로도 고맙네.”
“말씀하셨던 손녀가 이 아이로군요.”
“그렇다네. 내 피붙이인지라 아무래도 객관성은 좀 떨어지겠지만, 어린 나이에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네.”
“교수님의 피아노 실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말이군요.”
석동철의 대답에 권순철을 빙긋 웃으며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고이 접어두었다.
‘실은 그 이상이지…….’
아직도 자신을 낯설어하고 있는 어린 소녀에게 석동철은 최대한 눈을 맞추며 방긋 웃어보였다.
“그럼 선이야. 선생님이랑 같이 피아노 연습해볼까?”
안 그래도 어제 엄마에게 혼난 터라 꼬박 하루 동안 피아노를 치지 못한 선이는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새로 온 레슨 선생님이 어색하긴 했지만, 피아노를 쳐도 된다는 말에 오래된 피아노가 놓인 연습실로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
“그럼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잠시 듣고 오겠습니다.”
“나는 차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듣고 오게나.”
사실 석동철은 권선의 피아노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최근 경기가 좋아지며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한 집 건너 하나는 있을 만큼 인기가 있었으니까.
여러 아이들의 피아노를 들으며 석동철이 생각한 것은 선율에 담긴 성숙함의 부재였다.
클래식이란 모름지기 그 안에 담긴 감정 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어린이들에게 그것까지 가르치기엔 분명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교수님의 손녀라 하여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지.’
아이를 따라 연습실로 향하던 석동철은 존경하던 교수님조차 손주사랑엔 어쩔 수 없구나란 생각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기본은 해주겠지?’
방 안에 들어서자, 이미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선이의 모습에 석동철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악보도 없이 커다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다.
“악보도 없이 피아노를 치려고?”
“딱히 안 봐도 괜찮아요.”
‘오… 그래도 한국의 클래식계를 초창기부터 이끌어온 권 교수님의 손녀라 이건가?’
거실에서 보였던 긴장한 모습은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석동철은 살짝 문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가장 마음에 드는 곡 하나만 쳐볼래?”
“정말 아무거나 쳐도 돼요?”
“응? 어, 그럼~”
그동안 할아버지와 레슨을 할 때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정해준 곡으로만 연주했던 소녀는 벌써부터 신이 나 있었다.
한동안 머릿속으로 치고 싶었던 곡 몇 가지를 정리한 소녀는 순간 한 차례의 예고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 * *
잘 말린 녹차 잎을 뜨거운 물로 우려내던 순철은 연습실에서 새어나오는 피아노 선율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이라. 선곡이 나쁘지 않구만.”
그리고 약 10분 정도가 지난 뒤.
귀신에라도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석동철이 연습실을 나왔다.
미리 자리에 앉아 뜨거운 녹차를 삼키던 순철은 따듯한 찻잔을 그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고생했네. 우리 손녀의 피아노는 들어줄 만하던가?”
그의 물음에도 석동철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피아노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자신이 분명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이…….’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대는 권순철 교수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피어올랐다.
학창 시절에도 보기 힘들었던 석동철의 당황한 표정이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윽고 식탁 의자에 자리한 석 교수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선이는 지금 한국에 있을 아이가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너무 어리지 않은가…….”
“어릴수록 더 빨리 경험을 해야죠. 저 아이는 백년에 한 번… 아니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입니다!!”
석교수의 강한 외침에 마당에서 채소를 돌보던 선이 엄마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함부로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아버님과 편히 대화 나누세요.”
근처에 아이 엄마가 있었다는 생각에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석동철은 조금 목소리를 낮춰 자신의 은사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선이는 교수님과 저조차 이루지 못한 세계 피아니스트의 정상에 다가설 아이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한국에 두고 계신 겁니까? 어서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줘야죠.”
“미안하지만, 난 선이의 할아버지일 뿐 부모가 아니라네. 아이의 교육은 부모가 맡아야 하는 법. 안타깝게도 내 아들과 며느리는 선이의 실력을 그저 또래보다 조금 더 잘 치는 정도라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 안타까운…….”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옆에서 선이를 가르치며 내 아들과 며느리를 좀 설득해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이 늙은이의 말보단 젊은 자네의 말이 더 와 닿을 테니 말일세.”
그러자 석동철은 은사의 청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연습실 쪽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연습실 안에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그 소리에 집중하던 석동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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