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Ep.20 : 뉴 에이지. (16)
그것은 참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들어진 재질과 이음새만 본다면 18세기 후반 무렵의 물건으로 추정되었다.
프란츠 리스트의 요청에 따라 건반의 장력을 극대화시킨 현대 피아노의 최종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아마도 시대를 고려하면 현대 피아노로 넘어오기 바로 전 여러 차례 시험을 거치며 만들어낸 ‘프로토 타입’ 같았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성대를 아스팔트에 몇 번 갈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굉장히 메마른 목소리의 점원이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60줄 나이에 접어든 순철이 고개를 돌리자,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점원 하나가 자신을 향해 공손히 두 손을 접어 모았다.
인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점원 덕분에 흠칫 놀란 순철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굉장히 오래된 녀석이군요. 아직도 소리가 나나요?”
“물론입니다. 조율까지 완벽하게 마쳐져 있지요. 한번 연주해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나요?”
“어설픈 뜨내기들보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연주해준다면 피아노도 기뻐할 것입니다.”
단번에 손님의 직업을 간파해낸 점원의 눈썰미에 순철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떻게 그걸……?”
“오랜 세월 음악과 함께해 온 사람들은 악기를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다르죠. 과연 이 녀석은 어떤 소리를 들려줄까? 내 마음에 꼭 드는 소리를 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손님처럼 무의식중에 직업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랬다.
피아노를 바라보는 동안 순철의 손가락은 그의 욕망에 표현하듯 아까부터 까딱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순철은 재빨리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얼굴을 붉혔다.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이야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지만, 저 역시 예전에는 악기상을 했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음악가를 만나보았죠.”
“그러셨군요.”
점원은 천천히 건반 뚜껑을 위로 열어젖히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한 곡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점원의 부탁에 구경만 하려던 순철은 마지못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비좁은 가게에서 유난히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가 과연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순철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난 오래된 건반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도 나처럼 그동안 많은 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옛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 부드럽게 건반을 내리누른 그 순간. 순철의 예상과는 다르게 공허한 음색이 가게 안을 떠돌았다.
‘뭐지……?’
분명 건반을 통해 해머가 올라가는 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그렇다는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순철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방금 전 연주처럼 단순히 손가락만으로 내리누르는 것만이 아니라, 어깨 전체를 이용해 팔 전체를 지그시 내리누르자 건반을 타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만큼은 손님의 연주를 지켜보던 점원조차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순철에게는 그의 표정을 살필 틈조차 없었다.
‘굉장한 울림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피아노를 연주해보았지만, 이토록 깊은 음색을 가진 녀석은 단연코 없었다.
예고도 없이 듣는 이의 마음속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피아노의 음색은 선율이라기보단 흐느낌에 가까웠다.
잠시 생전에 올리비아가 좋아했던 쇼팽의 녹턴을 연주해보았다.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선율 속에서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떠올렸다.
쇼팽의 피아노가 가져다주는 쓸쓸함 때문일까? 순간 권순철은 드넓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좁은 가게 안에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이 피아노를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아직 오래된 피아노가 전해준 감정 선에서 제대로 헤어나지 못한 그의 모습에 점원을 빙긋 웃으며 엄청난 가격을 제시했다.
“조금은 특별한 사연을 가진 피아노이기에 가격이 높은 편입니다.”
“특별한 사연?”
“이 피아노를 처음 사용한 연주자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지요.”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순철의 머릿속에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그 역시 직접 그의 피아노를 들어보진 못했지만, 피아니스트의 정점에 선 자라고 익히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올리비아 역시 생전 그의 피아노를 직접 들어보길 간절히 바랐지만, 유독 공백기가 잦고 길었던 호로비츠의 슬럼프 덕분에 기회가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구나.’
아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피아니스트가 최초로 연주한 피아노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권순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눈앞의 피아노가 더욱 갖고 싶어졌다.
원래는 가까운 미래에 태어날 손주의 작은 선물을 구입하려던 그는 헝가리의 골동품점에서 한 대의 피아노를 구입했다.
* * *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는 딸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쌔근쌔근 잠든 손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순철은 몇날 며칠 아들 부부와 상의 끝에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년 시기에 접어든 순철에게 인생에서 두 번째로 행복의 시기가 다가왔다.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손녀 선이의 남다른 재능이었다.
때로는 한 세대를 건너뛰어 할아버지 할머니의 재능을 물려받는 세대가 있었다.
순철의 손녀인 권선이 바로 딱 그런 상황이었다.
그가 피아노를 칠 때면 멀리 거실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언제나 피아노 다리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선이는 옹알이를 할 때에도 피아노 반주에 음을 맞추듯 웅얼거렸다.
그런 손녀의 모습이 순철에게 얼마나 예쁘게 보였을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젠가 올리비아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억울하지 않아요?”
“뭐가?”
“당신의 피아노 실력이라면 분명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그들의 첫 데이트이자 순철에겐 사고로 형을 잃었던 악몽 같았던 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들려주었던 발터 뮐러는 어느새 세계적인 지휘자 반열에 올라 있었다.
한편으론 굉장히 부러우면서도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그가 독일에 남아 피아노를 계속했다고 하여도 분명 동양인이 가진 한계에 직면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순철은 그런 올리비아의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정말로요?”
“응. 나는 할 수 없이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것이고, 내가 가진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음을 택한 거야.”
“다음이요?”
“새로운 시대. 우리 아들. 아니면 우리 손주들이 더 이상 해외에서 그런 편견을 겪지 않도록 지금 나는 그 시대를 위해 힘내고 있는 거야.”
순철의 대답에 올리비아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지? 그 불신이 가득한 눈빛은?”
“설마 당신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정말 의외네요.”
“뭐……?”
“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하지만 정말로 당신이 노력한 만큼 다음 세대에서는 한국에서도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탄생하기를…….”
“어쩌면 우리 아들이 해주지 않을까?”
“으음…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봤는데, 우리 아들은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여요.”
“역시 그렇지……?”
“혹시 모르죠. 나중에 태어날 손주가 우리의 바람을 이뤄줄지…….”
“그랬으면 좋겠네…….”
어느 날 산책로에서 나누었던 두 사람의 대화는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현실이 되었다. 비록 올리비아는 그의 곁에 없었지만 말이다.
선이가 4살이 되고 스스로 피아노 의자에 기어 올라갈 수준에 이르자, 잠시 눈만 떼어도 아기는 항상 피아노 연습실에 들어가 있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이 그녀의 주특기였고, 자그마한 손을 열심히 놀려 대며 한 번 들은 할아버지의 곡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하기도 했다.
‘천재…….’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자신과 올리비아에게는 없었던 피아노에 대한 엄청난 재능.
순철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럴수록 선이에게 쉴 새 없이 많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어쩌면 올리비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로 그들의 꿈을 이루어줄 새로운 시대의 피아니스트가 바로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실력이 늘어가는 손녀의 피아노에 흡족해하며 순철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욕심이 깊어져만 갔다.
이미 선이는 피아노 실력만 놓고 본다면 같은 나이 또래에서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담당한 레슨 선생들마저도 혀를 내두르며 손사래를 칠 만큼 그녀의 연주는 완벽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었다.
설령 모차르트가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의 손녀의 실력에 비할까. 순철은 손녀의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잠이 드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린 손녀가 국민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집안에서 묘한 일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어딜 다녀왔어? 그리고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며느리의 호통 소리에 잠시 밖으로 마실을 다녀온 순철이 며느리에게 물었다.
“아가. 무슨 일이냐? 담장 너머로 네 목소리가 동네방네 울리던데?”
“아버님. 글쎄. 선이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요.”
“음?”
며느리의 말에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손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할애비한테 얘기해보렴.”
얼마나 서운했는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손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기어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손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달래주자, 이윽고 고개를 든 선이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새어 나왔다.
“어젯밤에 쇼팽을 만났어요.”
“뭐……?”
그 뒤로 차근차근 말을 이어나가는 손녀의 이야기는 분명 순철의 귀에도 허무맹랑하게 들렸지만, 기묘하게도 세세한 부분에서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쇼팽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반지…….
검은색 테두리에 한가운데 은빛 실선이 그어진 독특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이걸 쇼팽에게서 받았다고?”
“네.”
잔뜩 부어오른 눈을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선이는 이윽고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정말이에요. 할아버지. 저는 피아노를 치면 누구든 만나러 갈 수 있어요.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그 누구라도…….”
어린 딸이 너무 피아노에 매진하는 바람에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선이의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권순철은 그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골동품 상인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재능을 가진 자가 이 피아노를 친다면 아주 특별한 만남이 기다릴 것입니다. 손님께서도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언젠가 우연히 시간의 문을 두드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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