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49화 (149/177)

[149] Ep.20 : 뉴 에이지. (12)

‘설마, 할아버지……?’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예전의 모습은 분명 남아 있었다.

조금씩 늘어가던 흰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해도,

못 본 사이에 눈가의 주름들이 훨씬 늘었다 해도,

그녀는 단번에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 * *

“선아. 이건 말이다. 피아노라는 악기란다.”

이제 겨우 사물을 분별할 수 있던 어린 그녀가 처음 마주한 것은 아주 거대한 피아노였다.

처음 권선이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피아노를 보았을 때 그녀는 거대한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용에 질겁했는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아가야. 피아노는 무섭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히끅거리는 어린 손녀는 달래기 위해 한 손으론 그녀를 안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건반을 두드렸다.

현이 진동하며 일으키는 아름다운 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했던 어린 손녀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어때? 전혀 무섭지 않지?”

살포시 손녀를 옆자리에 앉히고 본격적으로 두 손을 이용하자, 방 안은 금세 반짝반짝 빛나는 선율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그녀는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선율들이 비눗방울 흩어져 사라져 가는 것을...

누구나 성인이 되어도 인상 깊었던 어린 시절 추억 한두 개쯤은 희미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어린 권선에게 그 순간은 아주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따듯한 피아노 연주와 창가를 통해 들어오던 햇살. 그 안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까지…….

어린 손녀는 그날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주 이름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지만, 나름 스스로의 연주를 즐기던 피아니스트 권순철은 대중들의 예상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를 선언했다.

그 역시 어릴 시절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거치며 한국의 경제 상황은 그가 음악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형과 함께 파독 광부를 지원했고, 운이 좋아 형과 함께 둘 다 면접에 통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년 권순철은 생애 처음으로 피아노라는 악기를 만나게 되었다.

굉장히 낯선 느낌의 거대한 물건은 처음에는 악기인 줄도 몰랐다.

파독 광부들이 지내는 기숙사 식당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는 아무도 그것을 칠 줄 몰랐다.

새로 부임한 기숙사 사감의 명령으로 식당에 있던 피아노를 사감실로 옮기던 그날까지.

권순철은 언제나 흰색 천에 둘러싸인 피아노가 고급스러운 테이블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감이 부임한 며칠 뒤부터 창밖에서 아주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선율.

그 소리에 이끌린 권순철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사감실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소리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던 그는 용기를 내어 사감실 문을 살짝 열어 문틈 사이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꽤나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던 기숙사 사감의 피아노 연주가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 누구시죠?”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깜짝 놀란 권순철은 기겁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리자, 기숙사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원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독일에 온 형조차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권순철은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 순간.

사감실 문이 활짝 열리며 새하얀 손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아…….”

엉겁결에 안으로 들어와 버린 그는 당황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사감실 안에 있던 사람은 새로 부임한 사감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쉿. 조용히 해요.”

이윽고 복도를 순찰 중이던 경비원들이 소리의 근원지인 사감실 문을 두드리자, 그녀는 애써 어색한 미소와 함께 두꺼운 책을 복도에 떨어뜨렸다고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사감님께서 부탁하신 것도 있으니, 문제 삼진 않겠습니다. 대신 위험할 수 있으니, 기숙사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은 조심해 주시길.”

“감사합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책장 뒤에 숨어 있던 권순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걸어 나왔다.

그러나, 아직 태풍이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죠? 보아하니, 여기 기숙사에 머무는 광부인 모양인데?”

“제 이름은 권순철입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광산 감독관이나 식당 배식원들에게 조금이나마 귀동냥으로 배운 독일어로 더듬더듬 자신을 소개하는 청년의 모습에 젊은 아가씨는 조금 뒤로 물러나 다시 물었다.

“분명 지금은 노동자들에게 정해진 취침 시간일 텐데, 어째서 사감실 앞에 있었던 거예요?”

“그, 그게…….”

잠시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위해 뒷머리를 긁적이던 권순철은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한 어투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권순철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켰다.

“피아노?”

“저걸 피아노라고 하나요?”

예상치 못한 그의 순진한 대답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번엔 권순철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시죠? 여기는 새로 부임한 기숙사 사감의 업무실인데?”

“아, 그분은 저희 아빠예요.”

“아빠?”

그의 되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대충 상황 파악을 완료했는지, 다시 피아노 쪽으로 다가갔다.

“피아노를 처음 보세요?”

“네? 아, 네…….”

“마침 혼자 연주하기 지루했었는데, 이쪽으로 가까이 와보세요.”

아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게 묘하게 이끌린 권순철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사실 그녀의 말보단 조금 더 가까이에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눈앞에서 내려다본 피아노 건반의 개수에 그는 눈앞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낯설지도 않았다.

새하얀 건반과 검은색 건반의 교차…….

비록 건반 개수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지만, 독일로 넘어오기 전 몇 번인가 종로의 악기사에서 보았던 ‘풍금’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번 쳐 보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괜찮아요. 피아노는 건반만 누르면 누구나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니까.”

그녀의 친절한 배려에 피아노 앞에 걸터앉은 권순철은 생애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 위에 손끝을 올려 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아가씨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분명 방금 전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악기하고 했는데, 손가락을 어디에 두는지 정확히 알고 있네?’

그 순간.

바들바들 떨리던 남자의 거친 손가락이 새하얀 건반을 지그시 누른 순간. 손끝을 타고 뻗어나가는 매력적인 음색에 권순철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페달을 밟은 때마다 새어나오는 공기를 이용해 소리를 내는 풍금과는 달리 소름끼치도록 맑고 청아한 음색에 귀가 뻥 뚫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와…….”

단 한 번 건반을 눌러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린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악기상 주인에게 언젠가 꼭 이곳에서 풍금을 사겠다고 하며 조금씩 배워왔던 건반 연습을 설마 피아노로 치게 될 줄이야.

더구나 연주 내내 페달을 밟아댈 필요도 없어 쓸데없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오로지 눈앞에 건반에만 집중할 수가 있다.

그 순간. 사감실 안에서 기묘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순찰 중이던 경비원들은 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뭐지 이 곡은? 처음 들어보는 곡인데?”

“그러게? 어느 음악가의 곡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비원들과는 달리 늦은 밤 타국에서 잠 못 들던 광부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설마 잠깐만 이 곡은?”

“거짓말이지? 이 곡이 여기서 들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조금 더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자, 그들이 생각하던 그 노래가 확실했다.

“분명 단장의 미아리 고개. 맞지?”

“아니, 이 오밤중에 누가 저 노래를…….”

“시방. 오밤중이 문제여? 지구 반대편인 독일까지 와서 저 노래를 듣게 될 줄이야. 이게 꿈이여 생시여?”

한밤중에 만난 반가운 리듬에 한국인들 기숙사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순찰 중이던 경비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권순철은 밤마다 사감실을 찾아가 그녀에게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고,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수많은 음악가들의 클래식을 접할 수 있었다.

기본기를 익히고 나자, 마치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며 성장해나가는 권순철의 연주 실력에 사감의 딸인 그녀는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매일 밤 방을 들락거리는 자신의 동생을 수상히 여긴 형이 어느 날 새벽 방을 빠져나가는 그를 불러 세웠다.

“너 지금 어디 가냐?”

“잠깐 화장실 좀…….”

“매일 새벽마다 화장실에 가서 두세 시간씩 뭘 하다 오는 거야?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게… 사실은…….”

하는 수 없이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형에게 알려준 권순철은 그래도 형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형의 두 손은 순식간에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지금 여기 뭐 하러 왔냐? 가족들 다 한국에 두고 돈 벌러 온 거 아냐? 그럼 인마. 돈이나 벌어 이상한 짓거리해서 쫓겨나지 말고. 뭐? 사감 딸한테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고? 미친놈 이 오밤중에 사감 딸이랑 매일 만난다고 하면 기숙사 사감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아, 아냐. 형. 이상한 생각하지 마. 우린 진짜 피아노만 칠 뿐이라고.”

“그걸 누가 믿어 주는데!? 그러다 걸리면 너랑 나랑 쫓겨나는 걸로 안 끝나. 몸 성히 고국에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아?”

형의 말은 사실이었다.

분명 그녀와 함께 피아노를 치는 것은 즐거웠지만, 혹시나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뿐만 아니라 형까지 엄청난 곤욕을 치를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알아들었으면 그냥 쳐 자빠져 자. 아무리 네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게 우리한테 고기를 가져다 주냐. 쌀을 가져다 주냐.”

피난 중에 아버지를 잃은 형은 그동안 집의 가장 노릇을 도맡아 해왔기에 동생을 말리는 건 당연했다.

그 역시 자신의 동생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나가기엔 너무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후로 한동안 권순철은 더 이상 새벽에 사감실을 찾지 않았다.

며칠 뒤.

광산 일을 마치고 석탄 먼지가 잔뜩 묻은 얼굴을 씻어내던 어느 날.

“젠장. 이놈의 석탄 가루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가 않아.”

“누가 아니래. 비누라도 좀 좋은 걸주든가….”

동료들의 불만에 권순철의 형인 권상철이 낡은 수건으로 거칠게 물기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엠병. 아주 다들 팔자가 폈네?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세끼 식사 주는 거만도 감지덕지라고 하더니, 아주 배때지가 불렀어?”

“상철이형 다들 힘드니까 그런 거지. 뭘 그런 걸로 성을 내소.”

동생의 만류에 권상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수건을 목에 둘렀다.

“너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알았어?”

툭 던지듯 말을 내뱉으며 돌아선 권상철은 목에서 거무튀튀한 가래침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독일로 넘어와 점차 독해지는 형의 성격에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권순철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마저 세수를 마쳤다.

그때 어깨에 어설프게 걸쳐두었던 수건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사방팔방 석탄이 나뒹구는 흙바닥에 떨어진 수건은 수돗가 근처의 물기로 인해 금세 더럽혀졌고, 비눗물로 인해 따가운 눈으로 바닥을 짚던 그의 눈앞에 누군가가 새하얀 수건을 내밀었다.

“이걸로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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