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Ep.20 : 뉴 에이지. (11)
새로운 곡을 만드는 동안 민준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었다.
하지만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는 순간, 너무나 섬뜩한 선율에 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민준이를 붙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권선의 따듯한 손길이었다.
“흔들리지 마.”
그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차민준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호로비츠의 연주에 집중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두 팔을 살짝 구부린 채 연주 중인 그의 모습은 마치 피아니스트의 표본을 보는 것만 같았다.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훌륭한 연주는 특유의 복장 때문일까? 더욱 음산하게 느껴졌다.
“대단해…….”
“똑같은 피아노를 가지고 이렇게나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니.”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세 사람의 실력에 청중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빗방울처럼 촉촉하게 청중의 마음을 적셔주었던 차민준.
화려한 테크닉을 이용해 변주곡의 극치를 보여준 모차르트.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선율을 들려주는 호로비츠.
각기 다른 세 사람의 매력적인 피아노 연주는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순히 차민준의 실력을 인정하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곡을 변주시킨 모차르트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그 스타일을 해치지 않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변화시키려는 호로비츠의 노력은 곡의 절정 부분에서 아주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연주 성향이 너무 달라. 녀석과 똑같은 분위기를 이끌어내려 해봐도 잘되지가 않아.’
가면 속에 숨겨진 호로비츠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런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있던 차민준은 솔직한 마음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 들은 피아노 소나타를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한 채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마주하는 그의 선율은 놀라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과연 세상이 인정한 최고의 피아니스트.’
혹시나 자신의 상황이 호로비츠와 반대되는 입장이었다면 어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까?
문득 그 생각에 미치자, 손끝이 저절로 떨려왔다.
그 순간에도 호로비츠의 피아노 연주는 처절한 감정을 쏟아내며 마지막 악절로 향하고 있었다.
웬만큼 까다로운 청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별다른 실수를 느끼지 못했을 만큼.
철저했던 그의 연주는 아련한 울림을 끝으로 청중들과 작별을 고했다.
“대체 이 조그만 술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미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한 빈민가의 골목은 마지막 호로비츠의 연주에 떠나갈 듯한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그것은 훌륭히 연주를 마친 호로비츠를 비롯해 앞서 연주한 민준이와 모차르트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쉽게 결판이 나진 않을 것 같은데?”
연주를 마치고 걸어오는 호로비츠를 바라보며 민준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모차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밤은 길고, 우리의 연주는 이제 시작되었으니. 저번처럼 중간에 사라지지 말라고.”
며칠 전만 해도 반쯤 삶을 내려놓은 듯한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활기가 넘쳐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감성을 자극하는 또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존재가 그동안 잠들어 있던 그의 본능을 깨우게 된 것일까?
민준이의 곁에서 모차르트와 호로비츠의 연주를 지켜본 권선은 비어진 피아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세 사람의 피아노 실력을 겨룬다는 건, 아마 밤을 샌다고 해도 불가능할 거야…….’
불안한 마음에 차가워지는 손끝을 주무르던 권선은 세 번째 무대를 위해 피아노 쪽으로 향하는 모차르트를 바라보았다.
* * *
똑똑똑.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늙은 집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현재 이 저택의 주인인 차민준은 오늘 밤엔 늦을 거라고 미리 예고했었기에 딱히 저택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이보게. 날세.”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작은 틈 밖으로 밖을 내다본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그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니. 주인 어르신.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오실 줄이야.”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리자, 짙게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한 남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게, 참으로 오랜만이군.”
눈가에 잡힌 주름이 깊게 패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늙은 집사는 천천히 걸어 나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도련님께선 지금 아가씨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군. 나도 서둘러야겠는걸?”
늙은 집사는 두 사람이 있는 장소를 간략하게 설명해주며 발길을 돌리는 어르신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부디 웃는 모습으로 세 분이 함께 돌아오시길,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와서 젊었을 때처럼 잘 움직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해봐야지.”
뒤돌아 차분히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발걸음은 굉장히 가벼워보였다.
대로 끝에서 뿌옇게 올라오는 밤안개는 어느새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어울리는 운치 있는 밤이로군.”
잠시 후. 작은 골목 모퉁이를 끼고 돌자, 그의 귓가에도 희미한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골목 틈까지 비집고 들어온 밤안개 속에서 오직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발걸음을 떼자,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작은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인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작은 술집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피아노 선율에 깊게 매료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고 가게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 틈에 섞여 가게 안은 바라본 노인은 격앙된 표정으로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모차르트를 발견했다.
그리곤 단번에 사람들이 어째서 이토록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에 대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교향곡 25번을 피아노 한 대로……?’
영화 아마데우스의 첫 번째 곡으로 쓰였던 교향곡 25번은 현악기 특유의 날카로운 보잉을 이용해 긴박감을 극대화시키는 독특한 선율이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모차르트는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단 한 대의 피아노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단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긴박감이 느껴지는 싱커페이션.
급속히 오르내리길 반복하는 선율을 단지 손끝의 감각만으로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그의 연주는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게 안에서 지켜보는 차민준은 역시 거대한 망치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모차르트라지만, 고작 피아노 한 대로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연주를 할 수 있다니.’
워낙 정교한 그의 연주는 경과구가 지날 때마다 머릿속으로 관악기의 연주가 자동으로 연상될 만큼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었다.
호로비츠와 차민준이 선보인 무대를 지나 이윽고 자신의 피아노를 선보이는 모차르트의 연주는 자신이 어떤 음악가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듯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가난에 찌든 빚쟁이가 아니라, 빈에서 추앙받은 최고의 음악가라는 자부심만이 그의 연주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건반에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고, 그런 모차르트의 마음가짐은 자신의 곡을 더욱 빛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설마 모차르트가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차민준과 호로비츠. 두 사람의 대결을 예상했던 노인은 이윽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아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가게 안 분위기는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술잔을 입에 댄 채로 뚫어지게 모차르트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미동조차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속에 그리운 얼굴도 있었다.
바로 차민준과 권선이었다.
노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반가움과 그리움에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선뜻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보지 못한 동안 예쁘게 자랐구나…….’
잠시 지긋한 눈으로 차민준 옆에 서 있는 권선을 바라보며 노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였다.
한창 교향곡 25번의 절정으로 치닫던 모차르트의 피아노에서 기괴한 소음이 들려왔다.
티딩! 팅!! 티디딩!!
“아…….”
최절정 부분에서 세 사람의 연주를 견디지 못한 피아노에서 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갑자기 끊어진 연주에 주점 안을 비롯해 바깥에서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참담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설마 피아노가 고장 나버린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런 빈민가 골목 주점에 제대로 된 피아노가 있겠어?”
하지만 이 순간.
그 누구보다 허탈한 것은 바로 연주자였던 볼프강 모차르트였다.
힘없이 바닥에 내려앉은 건반들을 바라보던 모차르트는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연주였기에 더욱 이런 식의 끝맺음은 가장 원치 않은 결과였다.
한편 그의 연주를 끝까지 지켜보던 호로비츠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다 해도 현재 모차르트의 연주를 뛰어넘기엔 불가능해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폐인에 가까웠던 모차르트가 이 정도로 열정을 보일 줄이야.’
그동안 자신의 계획대로 빈틈없이 반복되던 모든 음악가들의 시대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래전 한 소년이 베토벤의 시대를 넘나들었던 그 순간부터…….
그리고 지금 그 어린 소년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미리 권선처럼 싹을 잘라내지 못한 게 한이로군.’
설마 자신의 피아노를 이용해 과거에 넘나드는 존재가 그토록 짧은 시기에 두 명이 나타날 줄이야.
‘일단 오늘의 대결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그렇게 마음을 굳인 호로비츠가 걸음을 떼던 그 순간.
모차르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차민준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직 모차르트는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뭐라고……?”
“피아니스트가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그의 연주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때였다.
완전히 끝난 줄로만 알았던 모차르트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제2악장.
1악장과는 달리 우수에 젖은 듯한 느낌의 2악장은 바이올린과 파곳의 선율을 닮은 낮은 저음으로 시작되었다.
방금 전 연주에서 거의 모든 건반을 잃어버린 모차르트는 짧은 시간 동안 중력에 의해 내려앉은 건반 개수를 빠르게 체크한 뒤, 머릿속으로 두 번째 악장을 그렸다.
고장 난 건반 때문에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도려내며 연주를 이어가는 모차르트의 얼굴은 다소 격앙되었던 1악장 때와는 달리 도리어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 전부를 쏟아부은 피아노 연주를 이렇게 허망하게 망칠 순 없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돌아온 모차르트의 표정.
주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선율에 감탄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호로비츠에겐 지옥과도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순식간에 자신만의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감탄한 권선은 그의 연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차민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던 중 가게에 입구에 몰린 많은 인파 속에서 낯이 익은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라졌지만, 깊이 팬 주름과 가무잡잡해진 피부를 거둬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할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