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Ep.20 : 뉴 에이지. (10)
어릴 적부터 민준이에겐 잠들기 전 눈을 감으면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낮은 허밍으로 시작하는 단조로운 노래는 포근한 할머니의 살 냄새와 함께 작디작은 아이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그 소리에 집중 하다보면 어느새 창문 넘어 아침이 밝아오고, 아직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부스스 눈을 뜨면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시는 할머니의 손길이 떠올랐다.
감기로 인해한 밤중에 열이 올라 끙끙거릴 때에도 할머니의 콧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던 민준이는 언젠가 할머니에게 자장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 제가 잠들 때 불러주시는 콧노래 말인데요. 어떤 노래예요?”
“응? 아, 그 노래?”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트로트도 아니고, 옆집 아주머니께 물어도 잘 모르겠다고 하셔서.”
“우리 강아지 호기심도 많지. 사실 그 노래는 말이다. 네 어미가 갓난아기 때부터 너한테 들려주던 노래란다.”
“우리 엄마가요?”
“그려. 너를 뱃속에 가졌을 때부터 우리 민준이 들으라고 흥얼거리던 노래인데, 옆에서 하도 듣다보니 이 늙은이도 저절로 외워버렸지 뭐냐.”
어린 민준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할머니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마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네 어미를 닮아서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때부터였을까?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난 민준이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일을 나가신 할머니가 집을 비우면 민준이는 달동네에서 내려와 피아노 학원 앞에서 온종일 음악을 듣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어느 날엔 하루 종일 그 앞에 앉아 피아노가 몇 개의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세어보기도 하고, 학생들의 연주를 하루 종일 들어보기로 하였다.
낮에는 학원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밤에는 할머니의 자장가로 잠이 들던 소년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었던 할머니의 콧노래를 자신만의 피아노곡으로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 * *
그 어느 때보다 신중히 건반을 다루던 민준이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반복했다.
‘건반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국제 규모의 무대에서도 평소와 같이 즐기듯 연주했던 그였지만, 이 곡을 연주하는 동안에는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녀석. 꽤 재밌는 피아노를 치는군.’
먹구름이 낀 하늘을 연상케 하는 중후한 저음.
그 안에 후두둑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울려 퍼지는 청아한 고음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민준이의 피아노를 지켜보던 모차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낭만파 시대의 음악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차민준의 피아노는 모차르트를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얼핏 듣기에 쇼팽의 피아노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한데…….’
민준이를 지켜보던 권선은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그의 선율에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메마른 마음을 적셔주는 따듯한 울림.
분명 처음 들어보는 곡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따스한 멜로디 라인.
‘뭔가 들을수록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듯한 느낌이야.’
그 순간. 민준이의 피아노가 주제음을 반복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호로비츠와 모차르트마저도 매서운 눈으로 연주자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중후한 저음을 벗어나 옥타브 사이를 춤추듯 자유로이 오가던 민준이의 손끝은 단 한 번의 미스도 없이 빠른 속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건반의 장력을 한계까지 사용하는 묵직한 선율이 좁은 실내의 벽을 타고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참 그의 연주에 집중하고 있던 주인장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작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클라이맥스에서 정점을 찍어낸 민준이의 피아노는 이윽고 다시 낮은 음으로 돌아와 처음의 주제음을 반복하며 아스라이 끝을 맺었다.
“오오~!!!”
“멋진 곡이야. 자네가 직접 만든 곡인가!?”
화려한 화음만이 훌륭한 음악으로 연결되던 이 시대에 민준이의 피아노는 굉장히 담담한 선율로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었다.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차민준은 짧은 숨을 내쉬며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끝맺음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끝났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허전함이 몰려들어 쉽게 자리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 그런 민준이의 눈앞에 새하얀 손이 불쑥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권선이었다.
“아주 훌륭한 곡이었어. 끝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만큼…….”
민준이의 피아노 선율에 깊이 감동한 그녀는 바닥을 향해 있던 민준이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카운터 안에서 민준이의 연주를 지켜보던 주인장이 다시 한 번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한편 민준이의 차례가 끝나고 그 뒤를 이어야 했던 모차르트는 선뜻 앞으로 나서질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음표 개수로만 따진다면 분명히 어려운 곡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난해한 템포의 곡이야.’
물론 똑같이 쳐보라면 못 칠 것도 없지만, 청중의 감정을 사로잡는 미묘한 포인트를 잡아내기가 굉장히 힘이 들었다.
차라리 화려한 테크닉만으로 곡의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으나, 방금 보여준 연주는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도 잠시뿐.
모차르트는 자신의 악보가 놓아진 카운터를 힐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 대결이 될 것 같은데?’
손끝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감각.
음악가로서 이렇게까지 손이 근질거렸던 적이 요 근래 몇 번이나 있었던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차갑게 식어버렸던 작곡가로서의 피가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타고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모차르트의 상기된 표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호로비츠는 자신이 의도했던 계산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방금 전 연주로 인해 볼프강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어. 애초에 시작부터 기를 죽였어야 했는데, 너무 방심했나?’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각오를 다지고 앞으로 나서는 모차르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떠한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고요하다.
차민준이 연주한 두 번째 곡 덕분에 실내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정적을 참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탁자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이어질 두 번째 연주를 기대하고 있었다.
건반에 손을 올려둔 채 한동안 연주를 망설이던 모차르트는 이내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도저히 못 해먹겠군.”
결국 새로 산 가발을 벗어던지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댄 그는 자신을 향하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똑같이 따라 치는 건 역시 내 성미에 안 맞아.”
그 순간. 번쩍 들어 올린 모차르트의 두 팔이 번개같이 건반 위로 내리꽂혔다.
그 첫 시작음과 함께 차민준의 피아노와는 정 반대되는 화려한 선율이 실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오… 역시…….”
“볼프강 녀석. 지난 몇 달간 폐인처럼 살더니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군.”
수많은 화음과 화려한 테크닉.
도저히 같은 곡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민준이가 작곡한 곡은 모차르트의 손안에서 빠르게 편곡되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모차르트가 자기 목숨처럼 아끼던 악보집에는 수정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오선지에 그리는 음표 하나하나가 그만큼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만큼.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선 민준이의 피아노를 듣는 순간. 이미 편곡이 완성되어 있을 지도 몰랐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차민준의 피아노를 카피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스타일대로 바꾸는 것이냐에서 망설이고 있던 것뿐.
그리고 모차르트는 두 개의 선택지에 후자를 택했다.
그동안 자신을 옥죄는 주변 환경 탓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그의 피아노가 민준이의 연주로 인해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런 느낌이었어.’
정신없이 건반을 두드리는 모차르트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며 기묘한 미소를 그린 순간.
완전히 새롭게 편곡된 곡이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한편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차민준과 호로비츠는 다시금 머릿속으로 모차르트의 풀 네임을 되새겨 보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음악의 신에게 사랑을 받은 아이.
그의 손이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새어나오는 선율은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까지 화려한 테크닉으로 건반을 내리 그으며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는 자신의 연주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차민준의 피아노가 잔잔한 빗방울을 연상시켰다면,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스케일을 보여준 모차르트의 연주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 볼프강!! 이제야 제대로 된 연주를 보여 주었군.”
“최고다~!!”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 그의 선율에 보답하기 위해 사람들은 칭찬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모차르트는 의외로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나쁘지 않은 편곡이었지만, 역시 원곡이 더 나은 것 같군.”
그러자 모차르트의 연주를 묵묵히 지켜보던 주인장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내 생각도 마찬가지라네.”
화려한 테크닉과 화음으로 분위기를 띄웠지만, 듣는 이의 감정 선을 뒤흔드는 차민준의 피아노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모차르트가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갑작스런 모차르트의 패배선언에 청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차분히 이전 차민준의 연주를 떠올린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차르트의 말에 수긍했다.
착잡한 표정과 함께 물러나는 모차르트에게 가게 주인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인가?”
마지막으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차례가 다가왔다.
가면 속 두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빈 피아노 앞에 다가간 그는 검은 망토를 뒤로 넘기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 함께 연주를 지켜보던 권선의 손이 살며시 민준이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부터 한순간도 호로비츠의 연주에서 눈을 떼지 마.”
“응?”
“쉿. 바로 시작한다.”
무거운 저음이 좁은 실내에 울려 퍼진 순간.
한동안 모차르트의 연주로 흥겨웠던 분위기가 일순 가라앉았다.
깊은 심해를 연상시킬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은 그의 선율에 권선과 함께 연주를 지켜보던 차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작곡가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정점에 닿은 그의 실력은 단 한 소절 만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 충분했다.
‘이것이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던 호로비츠의 실력인가…….’
예리한 면도날처럼 울려 퍼지는 그의 선율에는 잔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는 호로비츠의 연주에 차민준은 생각했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는 결코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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