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Ep.20 : 뉴 에이지. (9)
“당신들이 하는 내기. 나도 참가하고 싶은데. 어때? 받아줄 텐가?”
생각지 못한 모차르트의 등장에 차민준을 비롯한 권선과 호로비츠는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가발을 고쳐 쓰며 특유의 웃음을 흘리는 모차르트의 표정에 긴장감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 모차르트의 모습에 평소의 그라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그래~!! 여기 이방인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라고~”
“볼프강 본때를 보여줘!!”
어느새 한마음으로 모차르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호로비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볼프강 선생이 우리의 내기에 끼는 건 상관없지만, 내기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담보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러자 모차르트는 품안에서 돌돌 말은 종이 뭉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 두었다.
“물론 준비해두었지.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피아노 소나타. 이 정도면 당신들의 내기에 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 순간 호로비츠와 차민준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모차르트의 경우는 전염병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사망 탓에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지지 않아 사후에 밝혀진 곡들도 상당했다.
그런 와중에 어떤 곡은 영영 세상에 공개될 기회조차 잃어버린 것들도 상당수 존재했는데, 어쩌면 그런 곡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운터 위에 놓아진 모차르트의 악보를 바라보던 호로비츠는 이윽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악보라면 나는 상관없지.”
의외로 순순히 모차르트의 참여를 허락한 호로비츠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은 차민준과 권선에게로 향했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예술로 승화시킨 세기의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평가받은 또 다른 천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이 두 사람과의 대결을 눈앞에 두고 차민준의 심장은 아까부터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저 역시 상관없습니다.”
차민준의 대답과 동시에 주점 안에 모인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얼씨구? 젊은이가 제법 세게 나오는데?”
“저 청년도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오늘 누가 내기에 이기든 귀가 호강하는 날인 것은 틀림없을걸?”
“아무렴 이 정도 실력자들이면 귀족 무도회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무대지.”
손님들은 서둘러 피아노 주위에서 물러나며 이어질 세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럼 내기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지?”
모차르트의 질문에 호로비츠가 대답했다.
“방식은 간단하다. 내가 치는 피아노곡을 그대로 따라 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통과. 그 다음은 차례차례 돌아가며 자기만의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것을 정확히 카피하는 것으로 하지.”
차민준에겐 각 시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성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나 다름없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더구나 하이든의 시대부터 최근까지 거의 모든 피아노곡을 외우고 있는 그에겐 더없이 훌륭한 찬스이기도 했다.
모차르트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내기 방식에 제법 흥미가 동하는지 별로 불만이 없어보였다.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지.”
최초로 내기를 제안한 호로비츠가 먼저 자신의 장갑을 벗어 던지며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새하얀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좁은 실내에 유리처럼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간단히 손 풀기로 선택한 호로비츠의 첫 곡은 무려 모차르트의 11번 소나타. 터키 행진곡을 주제로 삼았다.
그의 피아노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익숙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 흡족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주제음 속에서 뻗어나가는 경쾌한 선율에 맞춰 관객들은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정한 패턴으로 진행되던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은 조금씩 그 형태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주제음이 반복될수록 미묘하게 달라지는 곡의 분위기를 눈치챘을 즈음…….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11번 소나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때 민준이가 모차르트 앞에서 재즈풍의 터키 행진곡을 연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
마치 헝가리 무곡을 결합시킨 듯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선율의 속에서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건반은 한 치의 어그러짐조차 없었다.
약 3분대의 짧은 연주로 순식간에 청중을 장악해버린 호로비츠는 천천히 피아노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음 차례인 차민준을 지명했다.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겠지?”
짧은 순간에 호로비츠의 피아노를 카피해낸 차민준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설마 방금 연주한 곡을 그대로 따라 쳐보라는 거야?”
일반인들의 보통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 사람의 대결이 드디어 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단 하나의 음표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청각을 곤두세웠던 차민준은 이윽고 호로비츠가 연주했던 곡을 그대로 따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피아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이윽고 호로비츠가 연주한 곡을 끝까지 쳐낸 민준이는 한 차례 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손끝에 힘을 주었다.
‘단순히 같은 곡을 카피해 내는 것만으론 제대로 승부가 나지 않겠지?’
그 순간.
끝난 줄로만 알았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차민준의 손끝에서 또 한 번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곡을 이용해 두 차례 변주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기존의 것을 탈피해 완전히 새로운 곡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곡을 베이스로 두고 두 사람이 만들어낸 새로운 선율에 모차르트는 자꾸만 앞으로 흘러내리는 가발을 고쳐 쓰며 빙긋 미소 지었다.
“어이 볼프강.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냐?”
“아냐. 이 정도쯤은 되어야 내기를 걸 만하지.”
호로비츠의 피아노를 뛰어넘어 그 이상을 보여준 차민준의 피아노가 끝을 맺자, 사람들은 청년을 향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를 지켜보던 호로비츠마저 손뼉을 치게 만드는 민준이의 실력에 권선은 솔직히 깜짝 놀랐다. 호로비츠의 제안에 응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민준이의 실력은 그녀가 상상했던 그 이상을 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맥없이 당하진 않겠죠?”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 권선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지막 차례인 모차르트는 두 차례의 변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곡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호로비츠가 만들어낸 선율을 그대로 쫓아가던 모차르트는 변주 부분이 시작되자 특유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거두고 진지하게 연주에 임하기 시작했다.
평소 모차르트와 친분이 있던 친구들마저 그의 그런 모습은 굉장히 보기 드물었기에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고 그의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약 3분 20초 정도인 그의 11번 소나타는 민준이의 변주곡까지 합쳐 4분 30초대로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모차르트는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내듯 하나하나 정확하게 연주를 풀어나갔다.
“두 번의 변주곡을 딱 한 번 듣고 그대로 받아칠 수 있다니. 역시 볼프강이야.”
“그런가? 솔직히 나는 볼프강이 만들어낸 곡을 장난감 다루듯 바꿔버린 저들의 실력이 더 무서운 것 같은데…….”
“지금이야 볼프강이 따라가고 있지만, 다음 차례에서 순서가 바뀌면 어찌될지 모르지.”
“아, 하긴 볼프강 녀석도 변주가 특기이긴 하니까…….”
한편 차민준은 자신의 변주곡까지 더해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연주를 완성시킨 모차르트의 실력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러다가는 날이 새도 승부가 나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모차르트의 피아노는 굉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첫 번째 곡만으론 제대로 승부가 나지 않는군.”
호로비츠 역시 딱히 흠잡을 데 없는 모차르트의 피아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모차르트는 주점 밖에서까지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그럼 두 번째 순서는 그쪽인가?”
마지막 순번인 모차르트의 손가락이 차민준을 가리키자, 카운터 안에서 세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주인장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저 청년이 피아노 앞에 앉으면 기대가 되는군.”
다른 손님이 주문한 술을 내어주던 주인장은 다시 피아노 쪽으로 향하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운터에 몸을 기대었다.
“과연 이번엔 어떤 곡을 들려줄 것인지.”
이윽고 피아노 앞에 다시 자리한 차민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여기서 단순히 베토벤이나 쇼팽의 곡을 친다고 해도, 뒤에 있는 호로비츠라면 분명히 그 이상의 피아노를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20세기까지 클래식 장르의 피아노곡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의 주특기인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의 곡이 아니더라도, 유명한 음악가의 곡들 대부분은 이미 그의 실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더구나 예상치 못한 모차르트까지 대결에 합류한 이상. 차민준은 차라리 자신이 준비한 곡을 서둘러 꺼내기로 결심했다.
잠시 동안 피아노 건반과 마주하고 있던 그의 왼손이 건반 위에 내려앉은 순간. 파도에 일렁이듯 낮은 음의 건반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호로비츠였다.
‘뭐지. 이 곡은? 대체 누구의 곡이냐.’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베토벤과 쇼팽의 것을 닮아 있었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단조의 선율 속에 민준이의 피아노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저마다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서 사라질 즈음 민준이의 오른손이 깃털처럼 가볍게 건반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만큼은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차민준에게로 향할 만큼 그의 피아노는 굉장히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뒤흔드는 선율이 반복할수록 가면 속으로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있던 호로비츠조차 멍하니 차민준의 피아노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건 다른 누구의 곡도 아니야. 차민준이라는 녀석. 나와 헤어진 단 10일 만에 스스로 새로운 곡을 만들어낸 거야…….’
차민준이 직접 작곡한 곡의 선율은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뛰어난 음악가들의 난해한 해석조차 가뿐히 쳐낼 만큼 뛰어난 테크닉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곡에는 그런 기교를 보이는 구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민준의 선율은 청중들의 귓가에 차갑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런 차민준의 피아노를 지켜보던 주인장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청년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니 말이야. 마치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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