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Ep.20 : 뉴 에이지. (8)
* * *
“그럼 이걸로 인터뷰는 마칠게요.”
문화 예술 관련 프로그램에서 나온 리포터는 민준이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뇨. 민준 씨야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아무래도 방송 카메라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시죠?”
“드라마 촬영할 때는 그저 연주에 몰두해서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눈앞에 두고 대화를 해보니, 엄청 긴장되네요.”
“그래도 처음치곤 잘하신 편이에요.”
인터뷰와 관련해서 이미 프로그램 측이 준비해온 대본이 있긴 했지만, 정식 인터뷰는 여전히 민준이에게는 어색하기만 했다.
미리 준비한 답변과 함께 몇 가지 내용을 덧붙여 순조롭게 인터뷰를 마치긴 했지만, VJ 등 뒤로 민준이를 지켜보던 진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리포터와의 가벼운 악수를 끝으로 오전 일정을 마치자, 차민준은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런 인터뷰보다 차라리 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는 게 훨씬 쉬울 거 같아.”
“그래도 뭐 차분히 잘 대응하던데? 수고했어.”
진아는 수고한 민준이를 향해 차가운 캔 커피를 내밀었다.
“고마워.”
“그런데 오후랑 내일은 하루 종일 스케줄을 비워달라니, 무슨 일 있어?”
그러자 민준이는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조금 집중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집중해야 할 일? 설마 안나 언니가 말한 작곡 말하는 거야?”
“음~ 뭐 비슷해.”
아리송한 대답만을 남겨 놓은 채 돌아서는 민준이에게 진아가 말했다.
“점심은 어쩌려고?”
“작업실에서 대충 때울게.”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휴게실을 나서는 민준이의 모습에 진아는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점점 줄어드는구나. 앞으로도 점점 바빠지겠지? 아오바 군이 했던 말처럼…….”
* * *
“역시 방송 쪽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SHW 엔터테인먼트의 사옥을 나서며 민준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사옥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민준이의 작업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공기가 느껴졌다.
“방금 청소를 마치고 가셨나?”
중앙에 설치된 피아노를 비롯해 각종 비품들까지 가득 채워진 작업실을 둘러보던 민준이는 허기짐조차 잊은 채 서둘러 오래된 피아노 앞에 다가갔다.
일본에 있던 3주 동안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던 피아노…….
건반 덮개를 열고 손가락을 몇 번 튕기자, 반가운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오래된 피아노 특유의 단단한 음색에 빙긋 미소 짓던 민준이는 곧바로 의자를 끌어당겨 그 앞에 자리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리를 마친 그의 곡이 완벽하게 머릿속에 그려진 순간.
차민준은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그만의 오리지널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낮은 저음으로 시작되는 곡은 오래된 피아노의 음색과 정확히 맞아떨어졌고, 자신이 생각했던 상상 속의 선율과 100% 일치하게 된 순간.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린 전율이 손끝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입부에서 주로 저음을 오가던 그의 손가락은 점차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높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분명 작업실 관리자들이 내부 창문을 모두 닫아 놓았음에도 그의 피아노에선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약 3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무치게 그리웠던 선율.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곡을 치고 싶었던 민준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곡으로 호로비츠에게서 그녀를 되찾을 수 있기를…….’
* * *
“뭐? 그게 정말인가?”
놀란 눈으로 방금 전 자신이 들었던 말을 되묻는 모차르트에게 덩치 큰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바로 내일. 이 자리에서 그 동양인 남자랑 가면 쓴 사람이 피아노 대결을 하기로 했다니까.”
가면을 쓴 남자라는 말에 모차르트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스쳤다.
“혹시 그 남자 온통 검은색 복장을 하고 있었나?”
“어? 맞아. 설마 볼프강 자네도 아는 사람이야?”
혹시나 아니길 바랐지만, 역시나 가면의 남자는 모차르트가 알고 있는 의뢰인이었다.
바로 어젯밤…….
다시 자신의 집을 찾아온 그에게 며칠 밤을 새워 작곡한 피아노곡을 내민 순간.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을 열었다.
“실망이군요. 볼프강 선생님. 빈에서 최고의 작곡가라는 당신이 고작 이런 곡을 내놓다니…….”
두터운 장갑으로 거칠게 오선지를 살피던 그는 바닥에 모차르트의 곡을 흩뿌리며 등을 돌렸다.
“이 따위 곡을 받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지불한 것이 아니오. 그러니 제대로 다시 곡을 만들어 주시오.”
치욕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곡을 작곡하며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러워본 적은 처음이었다.
가면의 남자가 사라지고 텅 빈 집안에 흩뿌려진 악보를 주워들던 모차르트는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겨진 오선지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거세게 말아 쥔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했던 모차르트는 그날 밤. 고급 살롱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털어 술을 삼켰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빈털터리가 된 모차르트는 빈민가의 주점을 찾았다.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면 남자의 피아노 실력이 그토록 뛰어나다 이거지?’
당시 주점 안에서 울려 퍼진 두 사람의 피아노곡에 대해 모차르트의 친구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빈민가 출신이지만 자신과 어울리며 피아노 소나타에 대해 제법 박식했던 그들조차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는 말에 모차르트는 더욱 확신을 가졌다.
‘그렇군. 그 녀석도 결국 음악가였어. 지금까지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 곡을 써보라고 시켰던 거야.’
그리고 눈앞에서 악보를 바닥에 던지며, 가면 속으로는 나를 비웃고 있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차르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카운터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제법 도수가 높은 알코올을 빠르게 삼키자, 잠시 눈앞이 흔들거릴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
“어이, 볼프강. 무슨 일이라도 있나?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보이는군.”
평소와 다른 모차르트의 행동에 주인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빈 잔을 그에게 내밀며 한 잔을 더 요구하였다.
주인장은 이제 고작 30대에 접어든 젊은 음악가의 초라한 모습에 혀를 차며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모차르트는 주인장이 내미는 술을 다시 한 번 스트레이트로 삼켜낸 뒤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나도 함께해 주지.”
“음? 무얼 말인가?”
“그 두 놈들의 피아노 대결 말이야.”
독한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모습에 주점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녀석들이 음악의 수도라는 이곳 빈에서 제멋대로 설치게 둘 수는 없지.”
“본때를 보여줘. 볼프강~!!”
“오늘 볼프강이 마신 술은 내가 다 사지.”
모차르트의 선전포고에 주점에 모여 있던 손님들은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모차르트를 응원해 주었다.
* * *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민준이는 자신의 저택에서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자신이 없는 동안 저택을 지키는 집사가 외출하는 민준이에게 배웅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조금 늦을지도 몰라요.”
“네. 알겠습니다. 부디 시간은 지켜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깍듯이 허리를 숙이는 집사의 정중한 인사에 부담을 느낀 민준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로 쪽으로 향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마차들 사이로 건너편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어깨에 숄을 걸치고 나온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슬쩍슬쩍 곁눈질을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금은 불안한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권선에게 민준이는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응…….”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지그시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호로비츠와의 피아노 대결을 앞두고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권선은 짧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
“네? 뭐가요?”
“오늘 호로비츠와의 대결에서 혹시나 지기라도 한다면, 넌 앞으로 영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분명 그가 이긴 다면 자신의 두 손을 거둬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호로비츠.
눈앞에 권선이 과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가 한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두 손을 잃는다는 것은 아마도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재능을 모두 앗아간다는 말…….
그것은 즉.
그와의 대결에서 지게 된다면 두 번 다시 이 시대로 올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의 제안에 응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현실로 돌아가도 좋아.”
권선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찡그린 그녀의 눈썹과 상기된 표정.
민준이는 그런 권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누나는 어머니 쪽을 많이 닮은 듯하네요.”
“뭐……?”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현실에 있는 동안 호로비츠가 남겼던 영상을 모두 챙겨 보았고, 나름 대비도 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잠시 뜸을 들이던 민준이는 빈민가의 주점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왠지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차민준의 자신 있는 말투와 평온한 미소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권선은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 * *
잠시 후. 해가 떨어지는 시기.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의 빈민가 주점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좁은 주점이 미어터지기 직전인데도 불구하고, 카운터 위까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저마다 누군가의 승리를 점치며 모자에 동전을 던져 넣었다.
그 무리들 한가운데 조그만 술잔을 가면 사이로 기울이던 남자는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한 커플에 고개를 돌렸다.
“왔군.”
품 안에서 술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가면의 남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다시 찾아온 민준이를 향해 두 팔을 넓게 벌리며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시게. 그럼 곧바로 시작할까?”
그러자 호로비츠의 목소리에 덩치 큰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잠깐. 아직 다 오지 않았어.”
“뭐?”
그 순간. 주점 바깥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누가 또 오는 건가?”
“그러게?”
잠시 권선과 눈을 마주한 민준이가 주점 출입구를 향해 눈을 돌린 그 순간.
“뭐하다 이제 온 거야~!!”
“푸히히, 기분 전환 겸 새로운 가발 좀 맞추느라.”
“뭐!? 그건 또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외상이지. 돈 한 푼 없는 내가 무슨 돈으로 이걸 사겠어?”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들어온 한 남자는 헝클어진 자신의 가발을 고쳐 쓰며 주점 안에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하는 내기. 나도 참가하고 싶은데. 어때? 받아 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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