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42화 (142/177)

[142] Ep.20 : 뉴 에이지. (5)

모차르트 국제 콩쿨 3차전. 마지막 무대.

긴 대기실 복도를 빠져나와 무대에 발을 디딘 아오바 쥰이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자신이 참가했던 콩쿨들의 마지막 무대는 언제나 그의 것이었다. 파이널 무대이자, 피날레였으며 어느 때는 관객들을 향한 앙코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마지막 무대가 껄끄럽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휴식을 마치고 객석으로 돌아온 관객들의 표정은 아직까지 지난 무대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오바 군?”

무대에 들어오자마자 멍하니 객석만 바라보는 그를 향해 지휘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괜찮은가?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으음…….”

아오바의 상태를 확인하며 턱을 쓰다듬던 지휘자는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눈썹을 추켜올렸다.

‘벌써 땀을……? 아오바 군이 이렇게까지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군. 하기야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아오바 쥰이치와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지휘하게 된 그는 손수건으로 흥건히 젖은 자신의 손바닥을 닦아냈다.

아오바와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에서 꽤나 주목 받고 있는 지휘자인 그 역시 생각지 못한 야마모토 켄스케의 등장에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설마 했던 그의 솜씨는 역시나 기대 이상이었고, 오케스트라에 전달하는 스코어 메시지는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정확했다.

또한 곡의 특성을 이용해 2악장의 도입부 지휘를 피아니스트에게 양도한 결단력 역시 대단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오바 군. 어쩌면 자네와 나는 이번 무대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것 같군.’

차라리 그들의 연주를 듣기 전에 무대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여러 생각들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교차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무대 위에 올라서 있었다.

‘무대에 올라선 이상. 준비한 곡을 마칠 때까지 내려갈 수 없지. 어찌할 텐가? 아오바 군.’

그때 아오바의 오른발이 관객들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곤 객석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지휘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 역시 잘 부탁하네.”

땀에 젖은 지휘자의 손을 맞잡은 순간. 아오바 역시 그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작하지.”

지휘자와 떨어져 피아노 앞에 자리한 아오바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니스트에게서 신호를 받은 지휘자는 단원들을 향해 두 팔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차라라락.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자들이 자신의 어깨 위로 악기를 걸쳐 올리자, 지휘봉 양끝을 잡고 있던 그는 한쪽을 튕기듯 세우며 아래위로 부드럽게 팔을 흔들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상당히 무거운 주제음으로 시작하는 20번 협주곡은 단계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현악기의 화음을 포인트로 두고 있었다.

총 27곡을 남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단조 성향의 작품은 20번과 24번 단 두 곡뿐이었는데, 평론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칭해지는 협주곡이 바로 아오바가 선곡한 20번이었다.

사실 이 곡은 차민준 역시 노리고 있었으나, 선곡에 대한 우선권은 지난 무대의 최우수 연주자에게 있었기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밝고 따스한 분위기의 곡만 쓰던 모차르트가 단조풍의 협주곡을 작곡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인생에서 아주 짧은 시간 황금기를 누렸던 모차르트는 이 곡을 시작으로 그 찬란한 순간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그는 상당히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이 곡은 그에 따른 초조함이나 다급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 모차르트의 성향을 모두 관철시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20번 협주곡에는 대범함과 과감한 악절이 잔뜩 실려 있었다.

연주 시작 후 약 2분 동안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서 최상의 소리를 뽑아내기 위해 혼신을 다한 지휘자의 손이 멈춘 순간.

대기 중이던 아오바 쥰이치에게로 바통이 돌아갔다.

현악기의 화음이 끊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울려 퍼진 피아노 선율에 무대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가에 탄성이 새어나왔다.

“와아…….”

“역시 아오바 쥰이지. 휴먼 메트로놈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군요.”

“이 정도라면 지난 무대의 차민준 군과 비교해도 손색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몇몇 심사위원의 생각은 달랐다.

“글쎄요. 차민준의 타이밍이 절묘했다면, 아오바 군의 타이밍은 예리한 칼날 같다고 표현해야하나?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오바 군의 연주가 오케스트라의 합주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오케스트라를 지휘 중이던 지휘자 역시 비슷한 기분을 들었다.

쉴 새 없이 건반을 내리치며 독주하는 아오바를 힐끗 바라본 지휘자는 그의 연주에 맞춰 다시 오케스트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연주 속도가 조금 빠른 듯한데…….’

지휘자는 미묘하게 틀어진 피아니스트와의 연주 속도를 맞추기 위해 조금 더 빠르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째서지? 따라갈 수가 없다.’

오케스트라 파트와 피아노 파트가 교차할수록 아오바의 피아노는 점차 조금씩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휘자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마저 느끼고 있었다.

‘대체 피아니스트가 왜 이리 서두는 거지?’

‘계속 이런 식이면 템포를 맞추기가 힘들어…….’

피아노 협주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 악단의 궁합이다.

아무리 한쪽이 화려한 연주를 한다 하려도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져 버리면 그 곡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곡이 될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지휘자의 등 뒤로 식은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 * *

“아오바 쥰이치의 피아노가 혼자서 너무 치고 나가는 것 같은데?”

무대를 지켜보던 안나의 목소리에 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으음. 하지만 아오바의 피아노만 따로 놓고 본다면 결코 빠르진 않은데? 왜 밸런스가 점점 무너지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에 발터 뮐러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통로 쪽에 휠체어를 두고 앉은 그에게 진아는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전해주었다.

“안나 언니가 곡 전체의 밸런스가 흔들리고 있대요. 선생님 그렇게 생각하세요?”

발터 뮐러는 진아가 전해 준 귓속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사실 지금 아오바 군이 연주하는 피아노는 지극히 정상이란다.”

“네?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금 아오바의 피아노를 불편해하고 있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래도 차민준 녀석이 함정을 설치해둔 모양이야.”

진아는 아리송한 발터 뮐러의 답변에 눈썹을 모으며 한쪽 볼을 부풀렸다.

그리곤 그에게 들은 대로 이번엔 안나에게 귓속말을 전해 주었다.

“뭐……? 함정?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요. 민준이가 무슨 함정을 설치했다는 건지.”

안나는 기묘한 거장의 답변에 더욱 신중히 무대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알레그로 템포로 진행되는 1악장의 도입부는 바순의 위협적인 소리로 차츰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강하게 몰아치는 첼로와 바이올린의 선율이 피아노와 하나로 엮이며 관객들의 귀를 어지럽힌다.

덕분에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 곡은 모차르트 협주곡 중에서도 숙련된 오케스트라 악단만이 연주하는 곡이기도 했다.

그때 안나의 머릿속에서 번개같이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났다.

‘어쩌면…… 지금 이 곡은 완전히 정상인 것일 수도 있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 보기 위해 지금까지 듣고 있던 20번 협주곡의 느낌을 싸그리 비워내고 다시 처음부터 느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제야 안나는 발터 뮐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밸런스가 무너진 게 아니었어. 원래 20번 협주곡은 이런 느낌의 곡이니까…….’

안나의 표정을 살피던 발터 뮐러는 놀란 토끼눈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어린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만큼 센스가 탁월한 아가씨로군. 클래식을 그만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인재지…….’

송 대표와 친분을 두고 송안나와도 제법 사이가 좋았던 발터 뮐러는 손에 들려주면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안나를 손녀처럼 예뻐했었다.

언젠가 그녀가 클래식계에 큰 인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녀가 음악을 관둔다고 했을 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말려 보고자 노력도 했었다.

하지만, 송 대표와 마찬가지로 보통 고집이 아닌 그녀였기에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발터 뮐러조차 두 손 들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음악 자체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가 선택한 길을 순순히 응원해주기로 하였다.

발터 뮐러는 천천히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여전히 아오바의 피아노를 쫓아가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악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지휘자가 이 문제를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지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오바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이렇게 힘든 지휘는 처음이다.’

이미 아오바의 연주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그의 피아노를 쫓기 위해 온힘을 다한 단원들의 표정에는 피로가 역력해 보였다.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는 계속 바뀌었지만, 단원들에게 있어서는 벌써 세 번째 무대이기도 했다.

분명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순서이긴 했지만, 솔직히 프로들에게 이 정도 연주시간은 큰 무리가 아니었다.

첫 번째 니시노야의 연주를 마친 뒤에도 15분간 휴식 시간이 있었고, 두 번째 차민준의 연주가 끝난 이후에도 휴식 시간이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의 특성상 중간 중간 피아노 솔로 파트가 있기에 그 시간조차 포함한다면 이렇게까지 지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

‘설마. 내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단상 위에 올라서 있던 지휘자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대체 어디서부터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휘봉을 휘두르는 그의 손끝이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아오바 군은 알고 있었을까?’

일본을 대표하는 중요한 피아니스트의 콩쿨 무대를 자신의 실수로 망쳐버리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단조풍의 모차르트 20번 협주곡은 특유의 피아노 터치와 그 뒤에 딸려오는 현악기들의 화음으로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차민준과 야마모토 켄스케의 절묘하게 교차되며 녹아드는 선율에 어느새 지휘자 자신도 그 소리에 이끌렸던 것이다.

덕분에 본래 뒤에서부터 따라갔어야 할 오케스트라 화음을 무리하게 아오바의 선율에 맞추려 하다 보니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질 수밖에…….

‘내 실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이제까지 유지해오던 템포를 한순간에 바꿀 수도 없었다. 지휘자는 괴로운 마음에 두 눈을 찡그리며 고뇌에 잠겼다.

그 순간. 무대 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휴먼 메트로놈이라 불리며 자신의 템포를 철저히 지켜오던 아오바 쥰이치의 피아노 선율이 오케스트라의 화음에 맞춰 반 템포 늦춰진 것이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아오바 쥰이치를 알고 있는 모두에게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관객들에게 아무 것도 느끼게 해주지 못한 채 마지막 무대를 망칠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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