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41화 (141/177)

[141] Ep.20 : 뉴 에이지. (4)

“도련님. 이제 곧 무대에 오르셔야 합니다.”

집사의 목소리에 모니터를 바라보던 아오바 쥰이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곧이어 차민준의 연주가 끝나고 나면 오늘의 마지막 무대를 자신이 장식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두려우십니까. 아오바 도련님?”

물론이다.

여태까지 수많은 대회를 나가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대 위에 오르기가 꺼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차민준의 다음 무대에 오르는 것은 마치 사형수가 교수대에 오르는 것과 흡사한 느낌일 것만 같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실력을 쏟아붓는다 하여도 지금 콘서트홀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차민준의 매력적인 선율에 비할 수 있을지…….

그때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 위로 집사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두려우시겠죠. 제가 느끼기에도 차민준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도련님. 이렇게 굳어버린 어깨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거의 모든 콩쿨을 함께 해온 나이든 집사의 목소리에 아오바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항상 자신과 함께해준 그는 아오바에게 친할아버지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현실에서 자신의 우상과 마주하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입니다. 때론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부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 하지만?”

“분명 그로 인해 도련님의 피아노는 더 성장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오늘이 아닐지라도.”

아오바 쥰이치의 집사는 이번 콩쿨로 인해 더욱 성장하게 될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이번 대회 내내 아오바 쥰이치의 마음을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탁하고 풀리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그것이 아닐지라도…….’

차민준의 실력이라면 분명 또 다른 어딘가의 콩쿨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는 한…….

* * *

“이제 들어가도록 하지.”

무대 안에서 들려오던 차민준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이 끝날 때 즈음.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발터 뮐러는 자신의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무대 바로 앞쪽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며 그들을 맞아주었다.

발터 뮐러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마침 근처에 앉아 있던 몇몇의 심사 위원이었다.

‘설마, 저 사람은 발터 뮐러!?’

‘제자의 무대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인가?’

‘마에스트로. 발터 뮐러. 실제로 직접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군.’

심사 위원석이 시끄러워지자, 발터 뮐러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차르트 21번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이 울려 퍼졌다.

2악장에서 호숫가를 연상시키는 청아한 선율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차민준의 피아노는 3악장에 접어들며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시작했다.

알레그로 비바체 아사이. C장조 2/4박자.

1, 2 악장에서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느낌을 일순 지워내는 빠르고 경쾌한 주제 음과 함께 차민준의 두 팔은 춤을 추듯 건반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낮은 화음 속에서 차민준이 내는 피아노 선율은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다.

같은 주제 음을 야마모토와 차민준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교차하는 가운데, 무대는 어느새 3악장 특유의 발랄한 분위기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아노 건반을 마치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다루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단순해 보였지만, 그의 손이 한 번 스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음계는 제자의 무대를 지켜보던 발터 뮐러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녀석.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한편 단상 위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야마모토 켄스케는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타이밍으로 치고 들어오는 피아노 선율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어떤 화음에서도 차민준의 피아노는 관객들에게 굉장히 선명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피아노가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군.’

여태까지 아오바 쥰이치의 피아노를 들어오며 생각했던 피아노의 한계가 차민준을 통해 새로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연주 중인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건반 하나로 몇 개의 음까지 낼 수 있는 거야?’

‘이걸로 하나는 확실해졌군. 아오바 군의 피아노 센스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어. 차민준은 그걸 또 한 번 뛰어넘었다.’

‘이번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에 참가하길 잘했어. 아마 이런 피아니스트와 협연은 두 번 다신 없을지도.’

3악장의 클라이맥스로 치고 오르는 와중에 몇몇 단원들은 이대로 차민준과의 협연이 끝나가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그의 선율에 보답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야마모토 켄스케는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마지막 독주 부분에서 차민준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건반 위에 쏟아부었고, 관객들을 비롯한 심사 위원들마저 멍한 표정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독주 부분이 끝나자마자 울려 퍼지는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합주 속에 차민준의 피아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가장 완벽한 타이밍으로 동시에 연주를 마쳤다.

“하아. 하아…….”

장장 30분이 넘는 무대였다.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낸 만큼 체력 소모가 컸던 탓일까?

차민준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건반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때 자신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라보. 아주 훌륭한 연주였다.”

그 목소리에 놀란 것은 차민준뿐만이 아니었다.

단상 위에서 마지막 여운을 즐기던 야마모토조차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무대 아래 발터 뮐러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늦었지만, 자네의 마지막 무대. 똑똑히 지켜보았네.”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박수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함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자, 객석은 마치 파도를 연상시키듯 아래서부터 위로 일렁이며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차민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오케스트라 단원들마저도 서로를 격려함과 동시에 야마모토와 차민준을 향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어쩌면 이제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두 사람의 협주곡은 후일. 공연이 콩쿨이 끝난 이후에도 클래식 장르 중 베스트 음반으로서 성대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스승이 직접 찾아와서 놀랐겠지만, 우선은 관객들에게 인사가 먼저겠지?”

무대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는 발터 뮐러를 멍하니 바라보던 차민준은 야마모토 켄스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놓인 그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더 큰 함성과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번 콩쿨의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야마모토와 차민준은 동시에 허리를 숙여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훌륭한 연주. 고마웠네. 덕분에 내 마지막 무대를 평생 기억할 수 있겠군.”

“마지막이라니, 너무 아쉬운걸요? 선생님의 지휘 실력이라면 다시 지휘봉을 잡아도 손색이 없을 텐데.”

“칭찬이 과하군. 나는 그저 자네의 피아노 소리를 열심히 쫓았을 뿐이야. 나는 이걸로 만족한다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자네의 스승에게 전해주게나. 어찌나 제자 사랑이 극심한지. 제자가 없는 나로선 상당히 부럽더군.”

미소와 함께 턱짓으로 발터 뮐러를 가리키는 야마모토의 모습에 차민준은 뒷머리 긁으며 얼굴을 붉혔다.

“콩쿨의 마지막 무대인 아오바 쥰이치 군의 연주는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고 20분 뒤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외부로 나갈 시 티켓을 꼭 소지하고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콘서트홀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후끈 달아올랐던 회장안의 열기가 차가운 공기로 인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박수 속에서 무대 아래로 펄쩍 뛰어 내린 차민준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발터 뮐러를 향해 서둘러 달려왔다.

“이놈아.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선생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보다시피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지만, 차츰 나아지겠지.”

발터 뮐러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겨우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살짝 들어 올린 것만으로도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는 그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국을 떠나올 때에 비하면 상당히 나아진 편이었다.

“선생님~!!”

“발터 뮐러 선생님.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심사 위원들마저도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에 한 사람씩 차례차례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발터 뮐러는 친절하게 그들의 인사에 한 명씩 악수를 청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윽고 마지막 차례에서 그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방금 지휘를 마치고 내려온 야마모토가 서 있었다.

“어땠나? 자네의 마지막 무대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무대였네. 아무 미련도 남지 않을 만큼.”

“그런가? 나는 오히려 오늘을 계기로 자네가 다시 지휘봉을 잡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인재들이 넘쳐나는 바닥에 늙은 우리가 굳이 다시 고개를 들이밀 필요가 있을까?”

유창하게 독일어로 대화하는 야마모토 켄스케는 발터 뮐러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네.”

“음? 그게 뭔가?”

“오늘부터 차민준 군처럼 훌륭한 인재를 찾아내 제자를 삼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러자 발터 뮐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야마모토. 저런 녀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큼은 내 장담하지.”

“역시 그렇겠지?”

야마모토 켄스케는 한 걸음 물러나 기자들과 대화 중인 차민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뛰어난 감각과 연기력을 지닌 피아니스트야. 거기다 이번 콩쿨을 계기로 한 단계 더 성장한 느낌이군.’

야마모토는 콩쿨의 첫째 날에 그가 보여주었던 진화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남은 것은 아오바 쥰이치 무대인가? 지난 무대에서 심사 위원들이 아오바 군을 최우수 연주자로 지명한 것에 큰 불만은 없지만, 그로 인해 마지막 무대에 올라야 하는 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 * *

“도련님……? 이제 무대에 오르셔야 합니다.”

“잠깐만. 아주 잠시만…….”

두 눈을 감은 채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던 쥰이치는 집사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대기실 벽이 진동할 정도로 울려 퍼진 관객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

아오바 쥰이치는 자신의 우상이자, 공포의 존재인 차민준의 피아노를 되짚으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응……. 그럼, 다녀올게.”

“객석에서 응원하겠습니다.”

“고마워…….”

이윽고 대기실을 나선 아오바 쥰이치는 무대를 향해 길게 뻗은 붉은 카펫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언젠가 당신의 피아노를 뛰어넘겠어. 그때까지 내 목표는 언제나 차민준 당신의 피아노겠지.’

“비록 오늘이 아닐지라도…….”

아오바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며 길고 얇은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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