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Ep.20 : 뉴 에이지. (3)
“와…….”
얼핏 듣기에 단순한 피아노 주제음의 시작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기 때문일까?
무대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이번 대회에서 비공식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차민준의 실력인가?’
‘피아노 솔로뿐만 아니라 협주곡마저도 상당히 숙련된 느낌이야. 어떻게 이런 실력자가 아직까지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한 거지?’
‘어쩌면 이번 무대가 세계로 뻗어나갈 시험대란 말인가?’
‘이번 콩쿨을 세계로 향한 발판으로 삼고 있던 것은 아오바뿐만이 아니었어.’
오케스트라 합주에 첫발을 내디딘 차민준의 피아노 선율은 투명한 유리계단을 밟고 오르듯 청명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공연에서 발터 뮐러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는 처음부터 피아노가 주제음을 이끌어 나가는 스타일이었지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연주 중간에 피아노 선율이 오케스트라 합주에 스며드는 형식이 많았다.
이런 형식은 치고 들어가는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곡 전체의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해지기에 피아니스트에게 상당한 음악적 감각이 필요했다.
‘이제까지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지휘하는 동안, 손에 꼽을 만큼 정확한 타이밍이야.’
일단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시작한 차민준의 피아노는 옥타브의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장내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피아노 선율은 달콤한 와인처럼 관객들의 귓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올라서 있던 야마모토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피아니스트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등 근육이 바짝 조여 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같은 무대에 서보니, 멀리서 지켜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군.’
야마모토 켄스케는 정신을 바싹 차리기 위해 마른침을 삼키며 더욱 힘차게 지휘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선도하고 있는 지휘법은 무대가 시작되기 전 차민준이 집어준 메시지를 정확히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한 점은 굳이 스코어의 메시지를 살피지 않아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피아니스트의 선율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오케스트라를 주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그가 작곡한 다른 협주곡들과는 달리 자신의 피아노 실력을 뽐내기 위한 곡이기도 했다.
자신의 취직과 결혼 문제로 소원한 관계에 놓인 아버지까지 직접 연주회에 초청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그가 오직 자신의 독주 파트를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는 설도 있다.
작곡가 겸 지휘자, 그리고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무대 위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는데, 그 모습을 본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공연을 지켜보며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그의 음악을 영원히 기리기 위한 음악인들의 축제에서 다시 한 번 그 화려한 선율이 재연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피아노 앞에 앉으면 금세 딴 사람처럼 변한다니까…….”
친구의 무대를 지켜보는 진아는 온전히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는 민준의 모습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안나가 함께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평소엔 좀 심심한 녀석이긴 하지.”
“맞아요. 정말 머릿속에 음악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달까? 욕심도 없고, 연애도 안 하고…….”
“왜? 민준이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도 개인 작업실에만 있고, 일본에 와서도 거의 비슷한 패턴이니까.”
“너라도 민준이 데리고 이곳저곳 다녀보는 게 어때? 너 민준이 좋아하잖아.”
“제, 제가요!? 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어라? 아니었어?”
“민준이랑 저는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그래? 그럼 이번 콩쿨이 끝나면 내가 민준이한테 먼저 고백해도 괜찮은 거지?”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안나의 말에 말문이 막힌 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자, 안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거 봐. 내가 그런 표정 지을 줄 알았지. 농담이야. 농담.”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다시 무대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안나의 모습에 진아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돌이켜 보면 어릴 적 그녀 역시 민준이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다는 걸 진아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연예계 활동으로 바빠서 잘 만나지도 못하고, 스캔들도 조심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민준이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일본까지 날아온 정도라면 분명 가벼운 마음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언제나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
그에 비해 자신은 평범한 가정에서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자랐다.
민준이가 이어준 인연 덕분에 지금은 국내에서 제법 알아주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나와 비교해 자신에게 주어졌던 가정환경을 탓하기엔 지금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민준이의 존재가 너무나도 빛나보였다.
‘저 아이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나는 정말 행복한 거지.’
어린 시절 진아의 눈에도 부당하게 보였던 민준이에 대한 선생님의 대우.
그 속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는 이제 21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솔직히 8년 만에 민준이가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만 해도, 불과 반년 사이에 이렇게 빨리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갈 줄은 몰랐다.
사에키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일본에서도 그의 개인 콘서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이번 콩쿨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아마 앞으로 굉장히 바빠질지도 몰랐다.
그만큼 민준이의 피아노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지난 가을 오래된 피아노를 처음 작업실에 들여 놓은 날. 선보인 쇼팽의 녹턴 No.20은 여태까지 그녀가 들어왔던 그 어떤 쇼팽보다 훌륭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본 것은 착각이었을까?’
둘만 남겨진 작업실에서 민준이가 처음으로 오래된 피아노를 연주했을 때. 순간적으로나마 그녀의 눈에 과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생동감이 느껴졌다.
피아노 선율 하나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영화에서나 등장할 연출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민준이의 피아노는 그것 이상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개인 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를 연주했던 그날처럼…….’
OST 안에 담긴 티켓으로 연주회에 참석한 관객들은 그날의 연주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무대라고 평가했다.
아마도 그들 역시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다.
민준이가 전해주었던 머나먼 과거의 향수 어린 풍경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만, 민준이의 피아노 선율은 듣는 이에게 거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특별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1악장의 절정에 오른 순간.
무대를 지켜보던 진아의 머릿속에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설마… 여기서? 오래된 피아노도 없는데?’
그 순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안나의 손아귀에 불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피아노를 다룰 줄 아는 연주자로서 무대 위에서 무언가가 시작되리라는 감각을 캐치한 걸지도 몰랐다.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절정으로 치솟은 차민준의 피아노는 이윽고 독주 부분에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관객들의 귓가를 다시 사로잡기 시작했다.
빠르게 건반을 치고 달리다가도 한순간에 멈춰서 고요를 노래하기도 했다.
‘고요’를 노래한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표현이지만, 건반이 멈추는 그 사이 사이의 여백마저도 텅 빈 음표 하나로 치부될 만큼 절묘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행진곡풍의 1악장이 끝을 향해 나아가고, 민준이의 피아노는 이미 끝을 맺었지만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계속 되었다.
플롯과 호른 여러 관악기들의 향연이 기분 좋은 끝맺음을 알리자, 감격한 관중들 몇몇은 섣부른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윽고 모든 소리가 잠잠해진 그 순간. 무대 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야마모토 켄스케가 지휘자 단상에서 몸을 돌려 차민준을 바라본 순간.
피아노 앞에 있던 민준이의 손이 오케스트라를 향해 긴 호선을 그렸다.
단단단, 단단단, 단단단, 단단단,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제2악장.
실로 치명적인 음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두 번째 악장은 음악인들을 비롯해 일반 대중들에게도 굉장히 유명한 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70년대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명화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여름날 화창한 햇살 아래 꽃밭에 누운 연인을 배경에 두고 울려 퍼진 이 곡은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피아노 연결까지 굉장히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마저 눈물 젖게 만든 안단테의 차분한 선율 속에 야마모토 켄스케는 단상 위에서 차분히 눈을 감았다.
길고 화려하게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금관악기의 음색이 더해지자, 무대를 지켜보던 심사위원들 마저 울컥 마음이 저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다시 바통을 야마모토 켄스케에게 넘겨준 민준의 손끝이 건반에 내려앉은 순간.
관객들의 입가에 낮은 탄성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세상에…….”
마치 대화를 나누듯 오케스트라의 단조로운 론도 속에 녹아든 피아노의 구슬픈 선율.
야마모토의 손에 들린 작은 지휘봉은 그 두 화음 사이를 춤추듯 거닐고 있었다.
‘지금 이 오케스트라 전체를 지휘하는 것은 야마모토 씨가 아냐…….’
숨을 죽인 채 어느 누구보다 유심히 무대를 지켜보던 안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현재 무대에서 모든 템포와 강약을 정하는 것은 민준이의 피아노였다.
일본 최고의 지휘자라 일컬어지는 야마모토 조차 그의 제안에 한 수 접을 만큼 민준이는 아주 작은 선율 하나로 섬세하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야마모토 켄스케가 무대에 오르기 전 단원들의 악보에 추가한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제2악장. 나의 지휘보다 차민준의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라.-
지휘자로서 자신의 권한 일부를 양도하는 것만큼 굴욕적인 선택지는 없으리라.
아마 야마모토 켄스케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민준이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랜 친구이자, 존경에 마지않는 발터 뮐러의 전언을 떠올리며 한발 물러선 야마모토는 현재 끝을 알 수 없는 환희에 젖어 가고 있었다.
‘이제야 당신이 했던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발터 뮐러 씨…….’
야마모토 켄스케는 두 눈을 감은 채 빙긋 미소 지었다.
* * *
“그렇지……. 그래.”
회장 안에서 울려 퍼지는 환상적인 피아노 선율에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발터 뮐러의 입꼬리가 저절로 실룩거렸다.
‘조금만 더. 길게 음을 끌어올려.’
“마에스트로.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아냐. 지금 이대로도 나는 괜찮다네.”
예기치 않은 비행기 연착으로 뒤늦게 일본에 도착한 발터 뮐러는 이제 막 울려 퍼지기 시작한 21번 협주곡 두 번째 악장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민준이의 피아노를 듣고 있는 관객들의 감상조차 해치기 싫었던 그는 최고의 지휘자란 타이틀을 가지고서도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참된 음악인이었다.
차음 역할을 하는 두터운 문틈 사이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어도 지금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발터 뮐러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떤가, 야마모토. 자네에게 있어 최고의 은퇴 무대가 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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