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38화 (138/177)

[138] Ep.20 : 뉴 에이지. (1)

마지막 3차 본선을 목전에 둔 금요일 오후.

화요일부터 내린 눈 덕분에 호텔의 카페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온통 은빛 세상이었다.

눈이 내리는 와중에도 진아와 데리고 평일 내내 쇼핑을 즐겼던 안나는 자신이 원했던 바를 전부 이루었는지 오늘 하루는 호텔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함께 커피를 즐기던 민준이의 질문에 안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뭐? 작곡을 해보고 싶다고?”

“응.”

“아니. 그건 갑자기 왜?”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

그녀가 알고 있는 민준이의 실력이라면 이대로 콩쿨에만 전념해도 금세 유명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에서만 해도 자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인 아오바 쥰이치의 존재감이 위태로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시기에 뜬금없이 작곡이라니.

솔직한 그녀의 심정으론 말리고 싶었다.

자칫 민준이가 만든 음악이 대중에게 외면될 경우 그에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무턱대고 음반 시장에 뛰어든 뒤, 대중의 혹평 속에 재기하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까.

더구나 음반시장을 전체적인 파이로 계산하면 안 그래도 좁은 시장이 클래식이었다.

물론 같은 장르 쪽에서 민준이의 개인 음반인 봄의 왈츠 OST가 대성공을 이루어 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았고, 대중에게 익숙한 곡들로 선곡했기에 가능했던 사례였다.

“정말로 간절히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는 조금 말리고 싶은데?”

그러자 민준이는 그녀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앨범을 내려는 것은 아냐. 단지 필요에 의해서 한 곡 정도 만들고 싶을 뿐이지. 별로 공개할 생각도 없어.”

“한 곡? 겨우?”

뭔가 거창한 것을 준비한 줄로만 알았던 안나는 민준이의 대답에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라면 그냥 취미 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래서 말인데, 누나는 작곡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는 편이야?”

“나? 글쎄… 우선은 컨셉을 먼저 떠올리지. 어떤 장르로 진행을 할지. 그 다음엔 가사 작업을 베이스로 두고, 그것에 맞은 멜로디를 찾아서 코드 작업을 하고…….”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민준이의 질문에 안나는 자신이 작업했던 순서를 떠올리며 차근차근 설명을 보태었다.

이미 한국의 음반 시장에서 싱어송 라이터로 자리를 잡은 그녀의 조언은 민준이에게도 꽤나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일찍이 송대표가 그녀의 가능성을 알아본 만큼 목소리를 비롯해 악기를 다루는 센스까지 그녀는 음악가보다는 가수에 더 어울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조언을 듣는 내내 민준이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다니던 조각난 악상과 악절들이 마치 퍼즐이 끼워 맞춰지듯 하나하나 차례대로 붙여지기 시작했다.

“어때? 조금은 이해가 가니?”

“음, 그럭저럭?”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작곡법이긴 하지만, 아마 다들 비슷할 거라 생각해.”

작곡이란 기본적으로 코드에 대한 숙달과 기보법, 음악적 센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이 더해져 완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음악적 센스였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음악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안나는 본능적으로 그 감성을 캐치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앨범을 낼 때마다 음반 시장에서의 성적도 제법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필요한 부분만을 정확히 짚어낸 안나의 조언 덕분일까?

과거에서 돌아와 지난 3일 동안 민준이를 괴롭혔던 수많은 악상들이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필요한 것은 머릿속에 담겨진 수많은 악상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이 완성된 순간.

생각에 잠겨 있던 민준이는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나. 잠깐 나랑 작업실 좀 같이 갈래?”

“뭐? 오늘은 연습 쉰다고 하지 않았어?”

“좋은 악상이 떠올라서 그래. 잠깐만 같이 가자.”

단순히 작곡에 대한 기본적인 요령만 들었을 뿐인데, 민준이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나 설마… 나도 모르게 뭔가 엄청난 조언을 해버린 게 아닐까?’

호텔 앞에서 택시를 이용해 작업실로 향하는 도중.

민준이는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이용해 허밍으로 베이스 코드를 잡기 시작했다.

며칠간 자신과 어울려 다닌 탓에 녹초가 되어 버린 진아를 호텔에 남겨둔 채 잠시 후. 두 사람은 콩쿨 위원회에서 마련해준 개인 연습실에 도착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은 민준이는 몇 번인가 자신이 만들어 낸 코드를 오선지에 그려 넣으며 연습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안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코드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데?’

단순히 주어진 악보를 연주하는 것과 새로운 곡을 만들어 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민준이가 피아노에 대해 천재적인 감각을 지녔다고 해도, 작곡만큼은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안나의 걱정은 차츰 완성되어 가는 민준이의 코드 속에서 점차 두려움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방금 그건 뭐지?’

처음엔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흩뿌려진 음계들이 코드를 반복할수록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보통 작곡가들이 코드 연결을 위해 시험 삼아 반복하는 연주마저도 민준이는 거의 생략하고 있었기에 대체 어떤 곡이 나오게 될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 됐다.”

마지막 악절까지 전부 오선지에 옮겨 담은 민준이는 완성된 곡을 차분히 눈으로 훑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끝…난 거야? 벌써?”

“벌써는 아니지. 사실 삼 일 전부터 기본적인 틀은 잡아두고 있었거든.”

이윽고 정식으로 자세를 고쳐 앉은 민준이가 안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할게…….”

뒤돌아 앉은 민준이의 어깨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려온 순간.

낮은 음계의 단조로 시작하는 차분한 선율이 좁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정통 클래식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지 않고, 팝이라고 하기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마치 그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관철해 나가는 듯한 독특한 선율에 안나는 한 가지 장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뉴 에이지……?’

1980년대.

난해한 클래식 문화가 점차 대중성을 잃어가기 시작한 순간. 태동한 음악 장르의 한 부분이었다.

화려하기보단 차분한 선율로 듣는 이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이 장르는 휴식과 치유의 음악이라 불리며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더구나 한국에서도 지난 2001년 뉴 에이지 장르를 다루는 음악가들이 종종 등장하며 하나의 기반을 형성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크릿 가든이나, 일본의 히사이시 조. 한국의 이루마 등이 대표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음악가였는데, 안나 역시 그들의 음악을 굉장히 즐겨 듣곤 하였다.

하지만 설마 이곳에서 민준이가 직접 작곡한 뉴 에이지를 듣게 될 줄이야…….

연주 초반 민준이의 피아노 선율은 두근거리는 안나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귓가에 스며들었다.

음악적 성향을 따진다면 모차르트보다는 베토벤이나 쇼팽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초겨울 바싹 마른 낙엽 위를 거닐 듯 쓸쓸함이 가득 묻어난 선율에 안나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빈틈없이 계산된 경과구와 악절들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민준이의 피아노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무겁게 시작된 그의 음악은 악절이 지날수록 옥타브를 올리며 정적인 연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심금을 울리던 선율이 점차 템포를 더하며 하늘 높이 치솟은 순간.

다음으로 민준이의 건반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아래로 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

안나의 외침에 깜짝 놀란 민준이가 건반을 멈추자, 안나는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단지 음악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정신력을 소모시키는 민준의 연주에 안나는 차분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잠깐 근처에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어, 그래…….”

너무 연주에 몰두하는 바람에 잠시 안나의 존재를 까무룩 잊고 있었던 민준이는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연습실에서 빠져나온 안나는 볼에 스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안정시킨 뒤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잠시 신호음이 울리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니? 무슨 일이야. 갑자기?”

“오빠. 다음 주에 한국에 돌아가면 민준이에게 괜찮은 작곡가 한 분만 붙여줄래?”

“작곡가를?”

송 대표는 뜬금없는 안나의 통화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만날 수 있게, 미리 섭외 좀 부탁할게.”

“일단 체크해둘게. 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아무 것도. 그럼 끊는다.”

자신의 용건만 전달한 뒤 통화를 마친 안나는 가슴 깊이 밀려오는 서글픈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 * *

모차르트 콩쿨 파이널 스테이지.

자글자글 주름 파인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마모토 위원장은 오랜만에 차려입은 연미복에 빙긋 미소 지었다.

대기실 한구석에 세워진 전신 거울 속 전성기 시절 자신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은 남아 있었다.

가볍게 말아 쥔 지휘봉은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하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설마 이걸 다시 꺼내드는 날이 올 줄이야.”

연주를 앞둔 설렘 속에 야마모토 위원장은 자신의 지휘봉을 케이스에 넣어 두었다.

그때 대기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야마모토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차민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야마모토 위원장님.”

“오늘은 자네의 피아노를 위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해두지. 그래 무슨 일인가?”

“연주에 앞서서 선생님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에게? 직접?”

“잠시 선생님의 지휘자용 스코어 좀 볼 수 있을까요?”

“내 스코어를?”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편성의 악보가 그려진 지휘자의 스코어는 일반적인 피아니스트가 보기에도 굉장히 난해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발터 뮐러에게서 이미 그의 지휘 실력에 대해 전해들은 야마모토는 아무런 의심 없이 민준이에게 자신의 스코어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오케스트라를 이끌기 위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메시지를 잔뜩 적어 놓은 야마모토는 진지한 표정으로 스코어를 바라보며 허밍으로 구간별 화음을 잡아내는 민준이의 제스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전체적인 오케스트라의 흐름을 파악한 민준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야마모토 위원장과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선생님의 스코어에 제 메시지를 조금만 추가해도 되겠습니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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