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35화 (135/177)

[135] Ep.19 : 가면의 남자 (1)

어느새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나고, 의뢰인이 지명한 날이 밝았다.

딩… 딩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모차르트는 초췌한 표정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간혹 떠오르는 악상을 곧장 연주해보기도 하고, 마음에 들면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었다.

하지만 단지 그 행동을 반복할 뿐.

전체적인 피아노 소나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깃털로 만들어진 펜 끝으로 머리를 긁어보기도 하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새벽에 거리를 서성여 봐도 머리가 굳어버린 것인지, 도무지 전체적인 곡의 이미지가 떠오르질 않았다.

“제길, 제길, 제길~!!”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작곡에 임했던 그지만, 최근 몇 년 들어 작곡 활동에도 큰 지장이 생겼다.

의사의 말로는 술을 좀 줄이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지금 그의 삶에게서 술을 빼앗아가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가볍게 생각해. 예전처럼 즐거운 상상을 하는 거야. 누이와 함께 피아노를 쳤던 날을 떠올려.’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들도 잠시뿐. 그것이 본격적인 작곡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비록 망나니 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비록 곡을 완성시키지 못할지언정, 대충 곡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결국 약속한 기한의 해가 창가 너머로 기우는 와중에도, 그는 결국 의뢰인이 요청한 피아노 소나타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불안과 초조.

지난주에 의뢰인에서 받은 선수금은 이미 바닥까지 싹싹 긁어 써버린 지 오래였다.

만약에 그가 의뢰를 취소하고 선수금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단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대로 멱살이 잡혀도 할 말이 없었다.

“푸흐히히히~”

점차 어두워지는 방 안에서 모차르트는 특유의 어색하고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오선지에 치워진 미완성곡은 일반인이 듣기에 아주 좋을지 몰라도 모차르트의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작곡 활동을 소홀히 했던 것이 이제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창문 너머로 비치던 노을빛마저도 점차 옅어지고, 이윽고 좁은 방 안이 서서히 어둠에 잠기자, 아파트 복도에서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모차르트는 긴장감에 손끝이 떨려왔다.

‘돈을 돌려달라면 어쩌지? 기한을 조금만 더 달라고 해볼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복도에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딱 멈추었다.

똑 똑 똑.

‘와, 왔다…….’

모차르트는 노크 소리가 울리자마자,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방 안에서 인기척을 지웠다.

‘제발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 나는 지금 집에 없는 거야.’

그때였다.

하필 피아노 선반 위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던 잉크병이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결에 스르륵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현재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산 목록이자, 수익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잉크가 건반 안으로 스며드는 것은 둘째치고 혹시나 유리병이 떨어지는 충격에 건반이라도 상할까. 모차르트는 자신 모르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안 돼!!”

다행히 재빠른 동작으로 잉크병을 움켜쥐는 데 성공했으나, 문제는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복도에 있는 남자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노크 소리가 달라졌다.

쿵, 쿵, 쿵, 쿵!!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차르트는 인상을 구기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달칵.

반쯤 포기한 그가 잠금 장치를 풀자마자, 바깥으로 문이 벌컥 열렸다.

역시나 모차르트의 예상대로 문 앞에는 전신을 흑색으로 도배한 가면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집안으로 발을 디디며 입을 열었다.

“볼프강 선생. 곡은 완성되었습니까?”

“아, 그게…… 저…….”

“자신 없는 말투를 보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양이군.”

“…….”

가면의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모차르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망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남자가 풍기는 거대한 위압감에 흠칫 뒤로 물러난 모차르트는 혹시나 그의 품 안에서 흉기라도 나오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그가 모차르트에게 내민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것이었다.

자락…….

손에 들려진 가죽 주머니 안에서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약속했던 보수의 절반이오. 일주일 더 기한을 드릴 테니, 이번에는 꼭 완성시켜 주시길.”

모차르트의 손에 들려진 가죽 주머니의 무게는 지난주 받았던 보수와 비슷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

만약에 다음 주에도 곡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면, 오늘 느낀 부담감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할지도 몰랐다.

가면의 남자는 더 이상 모차르트에게 용건이 없는지 발길을 돌리다가 현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볼프강 선생.”

“네……?”

“혹시 최근 이 근처에서 제법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동양인 남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모차르트는 지난주에 술집에서 만났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훤칠한 키에 자신의 11번 소나타를 편곡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던 동양인 남자.

모차르트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한 정보를 털어 놓았다.

“오늘 그 주점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게 확실합니까?”

“확실히 올지는 모르겠지만, 지난주에 만났을 때 분명 오늘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가면의 남자는 가죽 장갑을 낀 채로 잠시 턱 끝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괜한 말을 꺼낸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잠시 후. 다시 현관을 나서던 남자가 모차르트에게 물었다.

“혹시… 그 주점의 자세한 위치를 알려줄 수 없겠습니까?”

* * *

“이크… 벌써 해가 떨어졌잖아. 이런. 너무 늦었다.”

야마모토 위원장과의 대화가 길어진 탓에 그와 함께 식사까지 하게 된 민준이가 다시 모차르트의 시대로 넘어왔을 때는 지난주보다 약간 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어차피 모차르트라면 주점에 있을 테니 그를 만나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한 차민준은 서둘러 빈민가의 주점으로 걸음을 달렸다.

여전히 퀴퀴한 공기 속에서 바닥 고여 있는 정체 모를 오물을 피해 골목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자, 낯익은 주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어라? 그런데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네. 설마 모차르트는 아직 안 온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자신에게 쏠렸다.

“오~!! 자네 왔구만.”

“뭐야. 볼프강은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났나?”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집에서 못 나오고 있는 거 아냐?”

“킥킥. 그럴지도 모르지.”

“오늘 돈이 들어오면 술 한 잔씩 돌린다기에 일부러 왔더니만.”

“기다려 봐. 그 녀석이라면 늦더라도 꼭 올 거야. 하루라도 술을 안 마시곤 못 배길 테니까.”

‘아, 역시 안 온 건가? 어쩐지 밖이 너무 조용하더라니.’

만약에 그가 있었더라면 더욱 활기찬 분위기에 문밖까지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을 텐데, 차민준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근처 카운터에 앉았다.

그러자 마른 헝겊으로 젖은 유리잔을 닦아내던 주인장이 민준이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볼프강을 만나러 온 건가?”

“아, 네. 오늘 다시 만나기로 지난주에 약속했었는데, 사정이 있나 보네요.”

“너무 걱정 마. 이제 겨우 초저녁이니 금방 나타날 거야. 여기 말고는 달리 갈 곳도 없는 양반이니까.”

“그렇겠죠……?”

민준이는 주인장이 내미는 럼을 홀짝이며 모차르트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20분이 흘러도 딱히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찾아갈 걸 그랬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계 바늘만 바라보던 민준이의 등 뒤로 슬슬 손님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볼프강 이 녀석. 오늘은 안 오려나 본데?”

“그러게, 저녁 시간 지났는데? 뭐야, 우릴 상대로 사기 친 거 아냐?”

그러자 툴툴거리는 손님들에게 주인장이 소리쳤다.

“그동안 그만큼 얻어먹었으면 됐지. 언제까지 볼프강 선생의 호주머니를 털 거야!?”

“아니. 우리가 언제 그 녀석 호주머니를 털었다고, 매번 자기가 혼자 신나서 술 돌린 거 아냐?”

“정말 내 단골들이지만, 양심도 없군.”

“이곳 빈민가 거리에 양심이란 게 어딨나. 주인장. 그냥 하루 끼니나 때우고 저녁에 술 몇 잔 걸치면 그게 전부인걸.”

차민준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모차르트에 대한 평가에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돈은 퍼줄 대로 퍼주고, 실속 하나 없는 친구들이로군.’

천재 음악가라는 수식어가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모차르트의 평판은 이곳에서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평민 출신의 음악가이기에 귀족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평민들과 어울리기엔 귀족과의 연줄이 너무나 닿아 있으니, 그 어느 쪽에서도 반기지 않는 존재.

오로지 피아노만이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을지도 몰랐다.

주인장과 손님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 가던 그때.

주점의 작은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진 것은 그의 복장이 너무나 특이했기 때문이다.

가죽 장화에서부터 상의와 하의 전체를 가린 긴 망토 역시 올 블랙 패션.

특이하게 가면과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가면 뒤로 보이는 새하얀 턱 선만 제외하고는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뭐야 저건?”

너무나 독특한 그의 패션 탓에 시끌벅적했던 주점 안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골 때리는 인간이 하나 더 왔네.”

“어이, 입 조심해. 혹시나 귀족이면 어쩌려고?”

“뭐? 귀족이 이 시간에 빈민가 골목에 뭣 하러 와? 어디 연회나 가서 춤이나 추고 있으면 모를까?”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가면의 남자는 주점 안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가면 속 눈동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은 서둘러 시선을 피했고, 이윽고 그 눈동자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차민준에게로 향했다.

‘뭐지? 저 사람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천천히 걸어와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주인장에게 동전 한 닢을 던지며 럼을 주문했다.

동전을 받아 든 채 잠시 위 아래로 가면의 남자를 훑어보던 주인은 이윽고 투명한 유리잔에 럼주를 담아 내주었다.

남자의 등장과 함께 주점 안 분위기가 제법 싸늘해졌지만, 가면을 쓰고 있는 탓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일단 옷차림부터가 빈민가 골목에서 자주 볼 만한 행색은 아니었기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은 곁눈질로 남자를 훑어 내리며 다시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앞에 놓인 잔술을 테이블 위에서 빙빙 돌리던 남자가 차민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볼프강 선생을 기다리나?”

남자의 물음에 흠칫 놀란 차민준이 고개를 돌리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면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당신 누구야?”

가면 속으로 보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탁한 눈동자는 민준이의 질문에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내 이름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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