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34화 (134/177)

[134] Ep.18 : 비상(飛上) (20)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본선 2차전이 끝난 다음 날.

진아는 아직도 어제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지 딱딱한 바게트 빵을 거칠게 뜯어냈다.

함께 식사 중이던 송안나는 그런 진아의 모습에 커피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진정해. 다른 손님들 아침 식사하다가 체하겠다.”

“민준이 저 녀석은 원래 저렇다 치고,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자 스프를 입가에 가져가던 민준이가 진아의 말에 반박했다.

“내가 뭘?”

“너는 눈앞에서 트로피를 뺏기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아, 최우수 연주자 트로피?”

“그래.”

“별로… 딱히 아쉬울 것도 없는데? 어차피 최종 우승 트로피도 아니고.”

태평스러운 민준이의 대답에 커피 잔을 들고 있던 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민준이 말이 맞아. 그깟 작은 트로피는 100개가 있어도 아무 소용없으니까. 중요한 건 콩쿨 최종 우승이지.”

“하지만… 이왕이면 1, 2, 3차 모두 우승하는 게 좋으니까.”

“음, 솔직히 어제 민준이의 연주는 심사 위원들이 평가하기가 애매했을 거야. 관객들도 박수칠 타이밍을 놓칠 정도였으니까.”

“그야 그렇지만…….”

“거기다 아오바의 연주도 상당한 실력이었고, 그렇게 평가가 애매한 상황에서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거든.”

일본에서 열린 모차르트 콩쿨은 분명 국제 대회긴 했으나, 참가자가 아시아 쪽에 몰려 있었다. 같은 시기에 열리는 유럽 무대보다 명성이 낮은 탓에 야구로 치자면 일종의 마이너 리그 정도라 볼 수 있었다.

민준이에게 있어선 대회 감각을 익히는 가벼운 몸 풀기 정도였지만, 아오바 쥰이치라는 피아니스트 덕분엔 적당한 긴장도 필요한 안성맞춤인 무대였다.

“어쨌든 3차전 최종 명단에는 올라갔으니, 그걸로 된 거지. 다음은 피아노 협주곡이랬나?”

“네. 맞아요.”

진아의 대답에 안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이상하네.”

“뭐가요?”

“보통 피아노 콩쿨에서는 마지막 무대까지 개인의 피아노 실력 하나만을 보거든. 그래서 따로 피아노 협주를 메인 무대에 두는 경우는 드물어. 물론 대회가 끝나고 우승자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피날레 공연을 할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 무대가 끝나고 난 후니까…….”

안나의 말에 진아는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이상한 오케스트라를 민준이에게 붙이진 않겠죠?”

“에이~ 그건 아닐 거야. 그래도 명색이 국제무대인데, 그런 짓을 하겠어? 거기다 오케스트라가 한 번 무대를 비우고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너도 어릴 때 해봐서 알잖아. 잘해야 지휘자만 바뀌는 거겠지.”

“그럼 다행이지만…….”

그때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묵묵히 식사 중이던 민준이가 입을 열었다.

“세 번째 본선 무대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들어간 이유. 나는 조금 알 거 같은데?”

“뭐? 그게 뭔데?”

“아오바 쥰이치의 별명.”

“휴먼 메트로놈? 그게 왜?”

“보통 피아노 협주곡은 첫무대에서 단번에 호흡을 맞추기가 힘이 들거든. 그런 면에서 아오바의 특기를 살리기에 최적의 무대가 아닐까?”

민준이의 대답에 안나와 진아는 동시에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번 모차르트 콩쿨은 아오바 쥰이치의 독무대로 만들 셈이었는지도 몰랐다.

대회가 끝나고 유럽으로 향하는 그에게 화려한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차민준의 등장으로 완벽하게 짜였던 판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차민준을 제외하고, 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연주자는 니시노야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세계무대로 비상(飛上)하기 위한 발판.

하지만 이제는 그 작은 발판을 딛고 누가 먼저 세계로 비상하는지 겨룰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오~ 차민준. 맨날 피아노만 치고 멍 때리는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인데?”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냐……?”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로비에 다시 모였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딱히 안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기에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해방된 그녀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2차전 무대도 끝났는데, 다 같이 머리나 식힐 겸 쇼핑 하러 안 갈래?”

안나의 제안에 화들짝 놀란 민준이가 자신의 옆에 있던 진아를 살짝 끌어당겨 귓속말을 전했다.

“네가 좀 따라가서 누나가 이상한 거 사려고 하면 좀 말려.”

“뭐? 지금 나 혼자 가라고!?”

“안나 누나 쇼핑 하면 기본 6시간인 거 알잖아.”

“야, 그래도 그렇지…….”

그러자,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안나가 말했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소곤소곤 하실까?”

“아, 그게. 난 오늘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진아랑 둘이서 다녀올래?”

“해야 할 일? 그게 뭔데?”

“연습. 연습해야지. 자고로 피아니스트란 하루라도 건반을 쉬면 감각이 무뎌지니까.”

“그럼 다녀와서 하면 되잖아?”

‘언제 끝날 줄 알고?’

그때, 때마침 호텔 출입구 쪽에서 사에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로비 앞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을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마침 다들 계셨네요.”

“어? 사에키 씨. 이렇게 아침부터 무슨 일로?”

“아, 그게. 콩쿨 협회 위원장인 야마모토 님께서 민준 씨를 급히 찾으셔서요.”

“네? 저를요?”

이유야 어쨌든 현재 민준이에겐 사에키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 예정된 시간은 오후 3시.

이대로 콩쿨 협회에 들렀다가 연습실로 향하면 적당히 시간이 맞을 듯해 보였다.

“아이쿠, 이런. 협회 위원장님께서 찾으신다면 얼른 가봐야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에키의 제안에 응하는 민준이의 모습에 안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 협회 위원장이 찾는 다면 어쩔 수 없지. 진아야, 넌 괜찮지?”

“네? 아, 그게…….”

“오케이 콜. 가자.”

진아의 대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안나는 진아의 손을 붙잡고, 호텔 문을 나섰다.

아마 지금부터 쇼핑 모드로 들어간다면, 아마 저녁 때 즈음에나 호텔에 도착할지도 몰랐기에 민준이는 진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어보였다.

돌아올 때 즈음이면 양손에 쇼핑백을 주렁주렁 들고 파김치가 되어 나타날지도?

민준이는 일단 커다란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에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콩쿨 위원장님께서 저를 왜 찾으시는 거죠?”

“아, 그게 3차전 무대 선곡 때문에…….”

“무대 선곡을 위원장님이 직접 들으신다구요?”

“네. 사실 민준 씨의 피아노 협주곡 지휘자로 위원장님이 직접 단상에 오르신다고 하셔서요.”

“네에!?”

잠시 후.

호텔 주차장에 세워진 사에키의 차에 올라탄 민준이는 불안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위원장님이 저와 협연을 위해 직접 지휘봉을 잡으신다니, 이런 일도 있나요?”

“그것 때문에 저희도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었어요. 이미 은퇴를 선언하셨던 위원장님이 갑자기 이번 마지막 무대에서 직접 민준 씨를 선택하다니.”

흥분이 가득 담긴 사에키의 목소리에 민준이는 볼을 긁적였다.

콩쿨 협회 위원장이라면 민준이도 직접 말을 섞진 않았지만,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예선 때부터 자신의 피아노를 바라보던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할아버지.

다른 심사 위원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연주 중에도 몇 번인가 저절로 눈길이 향했을 정도였다.

국제 콩쿨의 위원장을 맡을 정도라면 아마 일본에서도 꽤나 이름난 지휘자임이 분명할 텐데…….

“그런 분이 아오바 쥰이치가 아니고 저를 선택하셨다구요?”

“네. 그것도 다른 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이죠.”

사뭇 진지한 사에키의 대답에 민준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잠시 후.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콘서트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가운 바람을 헤치며 정문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어제완 달리 공연이 없는 오늘은 주차장부터 한산했기에 더욱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위원장님이 계신 곳은 3층 개인 사무실이에요.”

“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가 위원장님과 대화가 끝나면 연락주세요. 연습실까지 데려다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사에키 씨.”

자신의 업무를 위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녀와 헤어진 뒤, 차민준은 3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직 점심 식사 전이기에 직원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마저도 텅 비어 있어 손쉽게 3층에 오른 민준이가 고개를 돌리자, 위원장 개인 사무실로 보이는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가?”

일본식 한자어로 쓰여 있는 명패를 재차 확인한 그가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게.”

“실례하겠습니다.”

한기마저 느껴지던 복도와는 달리 전기스토브로 데워진 따스한 집무실로 들어서자, 야마모토 위원장은 차민준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민준 군.”

“안녕하세요. 위원장님.”

“어제 본선 무대를 마치고 피곤했을 텐데, 이렇게 오전부터 부르게 되어 미안하네. 컨디션은 좀 어떤가?”

자신을 바라보던 날카로운 눈빛 덕분에 내심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야마모토 위원장은 굉장히 따스하게 맞아 주었다.

“딱히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사에키 씨에게서 들었습니다만, 위원장님께서 직접 저와 협연을 하고 싶으시다고…….”

“음… 그렇다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결국 내가 그 녀석의 꾐에 넘어간 게지.”

“꾐에 넘어가다뇨? 그 녀석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누구긴. 네 스승 발터 뮐러지.”

“네에!? 발터 뮐러 선생님께서요?”

깜짝 놀라는 민준이의 반응에 야마모토 위원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를 이곳에 추천하며 그가 이런 말을 하더구나. 아마 네 피아노를 직접 눈앞에서 듣고 나면 지휘봉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말이야.”

야마모토 위원장은 차민준에 대한 자신의 추천서를 보내며 함께 보내온 마지막 메시지 한 줄을 떠올렸다.

-자네의 마지막 무대. 꼭 이 두 눈으로 지켜보겠네.-

‘자네 말대로 눈앞에서 지켜보니, 참을 수가 없더군. 정말로 식었던 피조차 다시 끓어오르게 만드는 피아니스트라니…….’

야마모토 켄스케.

클래식 애호가들의 아쉬움 속에 지휘봉을 내려두고 무대를 떠난 그가 모차르트 콩쿨 3차전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는다는 소식은 언론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때 일본을 대표하는 지휘자였던 그의 복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환영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더구나 현재 콩쿨 무대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를 협연자로 지명함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의 모두가 아오바 쥰이치를 지명할 것이라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발터 뮐러가 민준이를 일본으로 보내며 생각했던 계획이 한 가지 맞아떨어졌다.

-더 이상 팔은 안으로 굽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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