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Ep.18 : 비상(飛上) (17)
대회 진행자의 간략한 무대 인사가 끝나고, 첫 번째 연주자로 아오바 쥰이치가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은 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나. 세상에…….”
“헉? 일주일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내가 아는 쥰이치 군 맞아?”
아오바의 인사에도 관객들은 박수조차 잊은 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진아야. 혹시 아오바 쥰이치라는 피아니스트가 또 있는 건 아니지? 예전에 클래식 잡지에서 보았던 모습이랑은 완전 딴판인데?”
“그게 저도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운데요.”
며칠 전 그를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진아마저 얼떨떨한 표정과 함께 뒤에 말을 이었다.
“설마 삭발을 하다니…….”
몇몇 사람들은 1차 무대에서 최우수 연주자로 꼽히지 못한 자책감 때문이 아닐까 예상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게 아오바의 표정은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안나는 은근히 기대했던 아오바 쥰이치에 대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는지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으… 그 샤방했던 부잣집 도련님의 모습은 어디가고, 당장 내일모레 군입대하는 이등병이 되어 버렸지?”
“그게 며칠 전까진 그래도 언니가 상상했던 모습이었는데, 하하. 그래도 나름 귀여운데요?”
까까머리가 되어 버린 아오바 쥰이치는 생각보다 싸늘한 관객들의 반응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이건 내 나름대로의 결심이니까.’
단지 보여주기 식으로 소비되는 이미지는 필요 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무대 위에 놓여 있는 피아노였으니까.
아오바는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왠지 그동안 눈앞에서 찰랑이던 머리카락이 없으니까, 시야가 더 넓어진 느낌이 드는데?’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새하얀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아오바는 곧바로 연주를 시작하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흔히 그의 11번 소나타라 하면 터키행진곡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터키풍 론도를 가지고 있는 3악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1, 2악장은 굉장히 차분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와, 선곡 좋은데요?”
피아노 선율 하나로 18세기 고급 살롱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아오바의 연기에 송안나는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어라? 아오바의 실력이 이 정도였었나?”
어릴 적부터 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지금까지도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의 앨범을 챙겨들었던 그녀는 아오바의 실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깊이가 느껴지는 연주는 아니었는데.’
정교한 건반 터치로 아무리 난해한 곡이라도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것이 평소 아오바의 주법이었다면 오늘은 전체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심사 위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오? 오늘 아오바 군 연주는 느낌이 좀 다른데요?”
“확실히 곡의 분위기가 차분해서 그런지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이는군요.”
“지난주 최우수 연주자 수상에서 떨어진 것이 마음에 걸렸나? 갑자기 헤어스타일을 바꾼 것도 그렇고…….”
“본선 무대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는 건, 일종의 모험인데 어떻게 소화해 낼지가 관건이군요.”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던 아오바 군의 연주를 높이 평가했었는데, 이건 좀 미묘해지는군요. 야마모토 위원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야마모토는 그저 묵묵히 아오바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스타일까지 무리해서 바꿀 정도로 차민준의 연주에 감화된 것인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차민준 군의 피아노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 텐데?’
그러나 야마모토의 걱정과는 달리 아오바는 생각보다 센스가 좋은 피아니스트였다.
그가 단지 악보대로만 칠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다면 지난 10년 동안 각종 콩쿨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리가 만무했으니까.
모든 음계는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퍼즐들을 어떤 방식으로 나열하느냐에 따라 완성되는 그림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만들어 나가고 있는 그림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가 될 것이 분명했다.
‘피아노 선율이 마치 나비처럼 귓가로 날아드는 것 같군.’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청중들을 집어삼킬 듯이 무대 위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건반을 튕겨낼 때마다 아련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오바의 피아노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일생을 클래식에 몸담았던 야마모토는 아오바의 피아노에서 단번에 그 이유를 찾아내었다.
‘의도적으로 경과구 리듬을 조금씩 비껴 치고 있어. 심사위원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미세하게……. 끝부분의 여운은 불안정한 선율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아오바 쥰이치가 이런 식의 연주를 하게 될 줄이야.’
지난주 최우수 연주자 발표를 마쳤을 때 아오바 쥰이치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차민준의 수상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아오바는 어쩌면 그때부터 오늘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관객들에게 긴 여운을 남기고 모차르트 11번 소나타 1악장을 마친 아오바는 잠시의 휴식도 없이 곧바로 2악장으로 돌입했다.
1악장의 차분하고 조용한 선율을 지나 미뉴에트로 접어든 2악의 분위기는 때론 정열적이면서도 여전히 부드러운 템포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뉴에트라는 자체가 발레 이전에 있었던 춤곡에서 시작된 단어이기에 아오바는 거대한 홀에서 춤추는 귀족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건반을 두드렸다.
이 순간만큼 자신은 콩쿨 무대에 선 것이 아니라, 파티를 즐기는 귀족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가라고 되뇌며 아오바 쥰이치는 관객들에게로 선율을 흘려보냈다.
“역시 아오바 쥰이치다…….”
“굉장해. 이번 무대만큼은 어마어마한 각오가 느껴질 정도야.”
“최고다. 지금까지 아오바 쥰이치를 무대를 많이 보았지만, 오늘이 최고의 무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해.”
한편 무대 뒤에서 다음 차례로 대기 중이었던 니시노야는 달라진 아오바의 연주에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또 너는 이렇게 멀리 도망가는구나.’
커튼을 부여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오바의 연주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모든 콩쿨을 석권하며 일본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칭송 받던 그에게 누군가를 동경하는 마음 따윈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따라잡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뛰어넘고 싶다.
이제껏 정상을 바라보며 느껴왔던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열망을, 어쩌면 이제야 아오바도 느낀 것이 아닐까?
차민준이라는 거대한 벽을 통감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아오바.
니시노야는 그것을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가려는 아오바를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다.
‘이래서 난 천재들이 싫다니까…….’
고생고생하며 겨우 따라왔다 싶으면 어느새 그들은 자신을 비웃으며 다시 격차를 벌려 놓았으니까.
분하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지 그녀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피아노 실력이 더 형편없었다면, 그냥 깔끔하게 그만둘 수 있었을 텐데…….
니시노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와아……. 피아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아오바 씨의 실력도 굉장한 거 같아요.”
2악장 미뉴에트에서도 변화된 자신만의 피아노를 관철시키는 아오바의 모습에 진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랜만에 누군가의 연주를 직접 보니까 내 손이 다 떨려온다.”
“그래요? 하긴 언니도 피아노 엄청 잘 치잖아요.”
그러자 안나는 미소와 함께 무릎 위에 올려져있던 진아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너 내가 왜 피아노를 그만둔 줄 알아?”
“글쎄요. 가수가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으음~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나는 콩쿨이라는 무대가 너무 싫었어.”
“언니가 무대에 서는 걸 싫어했다구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 보이는 안나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진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인 평범한 무대는 좋아해. 하지만 콩쿨 무대는 좀 다르거든.”
“그래요? 나는 어렸을 때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서 보았던 언니 모습 굉장히 인상 깊었었는데…….”
“그래. 딱 그날이 내가 피아노를 그만 접어야겠다고 결심한 무대였어.”
“네에? 정말요?”
“사실 항상 콩쿨에 나갈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거든. 이번에는 나보다 잘 치는 학생이 나오면 어쩌지? 중학교에 올라가면 훨씬 더 뛰어난 피아니스트 지망생이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대학교에 올라가면? 더 나아가 세계무대에 선다면, 분명 언젠가 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실감하지 않을까?”
안나는 무대 위에서 화려한 선율을 내고 있는 아오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얼마만큼 더 노력을 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 노력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을까? 보기완 달리 참 겁 많은 아이였지.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 피아노 대회 예선에서 좀 특별한 남자아이를 만났지. 그리고 그 아이의 피아노를 듣는 순간 깨달았어. 내가 항상 걱정했던 그 벽이 조금 빨리 찾아왔구나.”
“그게 민준이였군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오바의 모습이 이해가 가기도 해. 자신이 고집해온 스타일을 바꿔서라도 그 벽에 맞서고 싶은 거겠지.”
진아는 안나의 아리송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언니는 지금 아오바 씨의 연주랑 민준이의 피아노를 비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러자 안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민준이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면, 내가 피아노를 관두지도 않았지.”
“아…….”
“아오바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후에 민준이의 피아노를 직접 들어보면 깨달게 되겠지. 진아 너도 직접 들어보면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그나저나 민준이 차례가 몇 번째였지?”
“6번째 참가자 중에서 가장 마지막 무대예요.”
“이런, 아직 한참 남았네.”
“뭐, 어쩔 수 없죠. 차분히 기다릴 수밖에…….”
직접 민준이의 연주를 듣기 위해 송 대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까지 날아온 안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연말 방송 스케줄로 인해 바쁘게 지냈던 탓에 발터 뮐러의 공연에도 직접 찾아가지 못했던 그녀에게 정식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민준이를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가능하면 옛 생각도 할 겸 지휘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발터 뮐러의 공연은 놓친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이렇게나마 직접 두 눈으로 민준이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그녀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빨리 좀 나오라고…… 차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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