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26화 (126/177)

[126] Ep.18 : 비상(飛上) (12)

모차르트 콩쿨의 본선 1차전을 마친 뒤, 일본 음악계는 하루아침에 발칵 뒤집혔다.

대부분의 언론은 콩쿨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오바 쥰이치의 마지막 우승을 미리 점치기라도 하듯이 대거 기사를 내보냈으나, 1차전 심사평 결과의 최우수 연주자는 다름 아닌 한국인 차민준이었기 때문이다.

[20분간 장내를 뒤흔든 기적의 선율.]

1차전 종료 후. 다음 날 차민준의 피아노를 극찬하는 기사들이 인터넷을 통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아오바의 우승 행진에 비상 신호가 들어왔다는 자극적인 제목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기사 내용은 호평 일색이었기에 민준이에겐 상당히 기분 좋은 스타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호텔 조식을 즐기는 와중에 민준이를 알아본 몇몇 직원들이 조심스레 펜과 종이를 들고 와 사인을 요청할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민준이의 사인을 받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러나는 여직원들의 모습에 진아는 뿌듯함을 느끼며 어제 있었던 무대를 떠올렸다.

무대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

그 속에서 무대 중앙으로 유유히 걸어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민준이의 모습.

한순간 콘서트홀 전체를 압도해버린 천재 피아니스트의 당당한 모습에 진아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 저 오빠 피아노 엄청 잘 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응. 저 오빠가 피아노를 칠 때 주변이 막 반짝이는 것만 같았어~!!”

“으응? 그래?”

“진짜라니깐!!”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진아는 문득 어릴 적에 소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준이가 발터 뮐러 선생님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떠나고 얼마 후, 어느 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2년 후에 민준이가 콩쿨에서 우승할 거라 믿어.”

“정말? 선생님 말로는 전 세계에서 피아노 잘 치는 아이들은 모두 나온다던 것 같던데?”

“응. 그래도 그중에서 최고로 잘 칠 거야. 민준이의 피아노는 그만큼 특별하거든.”

“특별하다고? 어떤 점이······?”

“음~ 뭐랄까. 그 아이가 피아노를 치면 소리가 반짝반짝 빛났거든.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어.”

“피아노 소리가 반짝반짝?”

당시에는 소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왠지 이제는 조금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덧 성인이 된 진아는 민준이를 처음 만났던 그때랑 비슷한 나이를 가진 옆자리 여자아이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소희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하교 길에서 민준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며칠 뒤, 소희마저 부모님을 따라 해외로 떠나 버려, 한동안은 학교생활이 참 쓸쓸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 돌아가면 메일이나 한 통 보내볼까? 그러고 보니 소희도 파리에서 쇼팽 콩쿨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남겼었지. 다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음악을 하고 있구나.’

그러고 보면 안나도 가수고 되었고, 승우도 축구 선수가 되어 어릴 때의 꿈을 이루었다. 물론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꿈을 이룬 친구들이 조금 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찬란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수많은 박수를 받고 있는 민준이.

진아 역시 어릴 적 오케스트라 대회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조명 빛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힘찬 박수와 함성.

채 몇 분도 되지 않았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

함께 연주를 끝마친 소희의 손길에 천천히 고개를 올리자, 청중을 향해 안나와 함께 허리를 숙이는 민준이의 모습이 보였다.

‘작지만 믿음직스러웠던 뒷모습. 참 멋졌었는데······.’

“진아야, 천진아?”

잠시 옛 추억에 잠겨 빙긋 미소 짓던 그녀에게 민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마주 앉은 자리에서 볼 한가득 빵을 삼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진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음? 그게 무슨 말이야?”

“됐거든. 얼른 식사나 하시지?”

진아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민준.

그 모습을 옆자리에서 지켜보던 사에키는 민준이가 잠시 물을 가지러 자리를 비운 사이 진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민준 씨는 무대 위에 있을 때랑 평소 때를 비교하면 완전 다른 사람 같네요.”

“어릴 적부터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그때도 평소에는 엄청 개구쟁이였는데, 피아노를 연주할 때만큼은 굉장히 진지했었으니까.”

사에키는 진아의 대답을 미리 예상했었는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것 같아요. 전에 일본에 처음 도착한 날에도 진아 씨 많이 생각해주던데, 유머스러운 면도 있지만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고 할까?”

“그, 그런가요?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솔직히 어제 민준 씨의 연주를 듣고 저 역시 진짜 감탄했거든요. 물론 바로 직전 아오바 씨의 연주도 훌륭했지만, 뭐랄까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인상 깊었던 연주였어요.”

어제 처음으로 민준이의 연주를 들은 사에키는 하루가 지났음에도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어제의 광경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으니까.

“하지만 오카다 씨의 무대는 너무 아쉬웠어요. 하필 민준 씨 다음으로 연주하다니.”

그 점에 대해선 진아 역시 자기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카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올라온 오카다는 누군가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유리처럼 섬세한 멘탈을 가진 오카다에게 앞서서 펼쳐진 세 사람의 무대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중간에 미스터치가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꿋꿋하게 연주를 마친 것은 칭찬하고 싶어요. 아마 저라면 부담감 때문에 마지막까지 연주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으니까.”

“음~ 듣고 보니, 그렇네요. 나중에 만나면 위로의 말보다 칭찬을 하는 게 좋겠네요.”

사에키의 대답에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어보였다.

***

식사를 마치고 민준이는 언제나 그렇듯 호텔 근처의 개인 연습실로 향했다.

이미 본선 2차전 과제 곡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부터 19번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기에 다음 연습에 들어간 것이다.

10명의 참가자 중에서 2차 무대에 오른 것은 단 6명.

이 중에서도 2차전 결과에 따라 세 명이 탈락하고 남은 세 사람이 피아노 협주곡으로 3차전을 치르는 시스템이었다.

‘민준이 실력이라면 아마도 마지막 무대까지는 무난히 갈 수 있겠지?’

연습실을 빠져나와 공원 쪽으로 향하던 진아는 남은 대회 일정을 살피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매니저 입장으로 일본까지 따라왔지만, 나름 해외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민준이는 걱정했던 것보다 제법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었다.

“왠지 나만 멈춰 서 있는 듯한 기분이네.”

발터 뮐러 선생님의 말대로 끝까지 오보에를 놓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제 민준이가 섰던 빛나는 무대 위에 자신도 설 수 있지 않았을까?

민준이와 소희가 떠나고,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사라지자, 진아는 차츰 오보에를 불지 않게 되었다.

물론 실력이 녹슬지 않게 가끔 연주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던 친구들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물해주었던 안나에게는 미안한 마음에 악기를 정리하여 돌려주려 하였지만, 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진아에게 오보에를 다시 돌려주었다.

“한번 선물해준 악기를 다시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 대신 잠시나마 오케스트라에서 화음을 맞췄던 만큼 소중히 간직해 주었으면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시 연주하고 싶은 날이 올 거야.”

그 당시 안나가 했던 말이 맞았다.

민준이가 한국에 돌아오고, 곁에서 그의 피아노를 들으며 진아는 어느 순간 자신의 오보에를 다시 꺼내 들었다.

물론 처음엔 제대로 소리조차 낼 수 없었지만, 옛 기억을 떠올려 연습을 거듭하자, 금세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본까지 들고 와 버렸지만······.

진아는 손에 들려 있는 가죽 가방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비록 처음 때보다 낡긴 했어도,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은 탓에 안에 담긴 오보에는 새 것만큼 반짝였다.

오늘도 주머니에는 작은 손난로를 챙겨들고 진아는 서둘러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항상 연주하는 공원 놀이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야, 너 이번에도 같은 곳에서 또 틀렸잖아~”

“미안······.”

지난번 아오바와 함께 나타났었던 현장 학습 중인 아이들······.

그녀는 혹시나 아오바가 같이 있는지 주변을 살핀 후.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지난번에는 다들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는데, 오늘은 모두 악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때 파란색 모자를 눌러쓴 아이가 진아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아!! 지난번에 보았던 피리 부는 누나다!!”

‘피리 부는 누나?’

왠지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떠오르는 미묘한 호칭에 진아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니?”

“음악 수업 때문에 조별 연습하고 있어요.”

“오~ 그거 대단한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4명의 아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악기를 들고 있었다.

리코더와 멜로디언, 그리고 캐스터네츠와 트라이앵글까지.

모두 그녀가 어릴 적 음악시간에 연주해보았던 악기들이었다.

“이걸로 어떤 곡을 연습하고 있는 거야?”

“반짝반짝 작은 별. 그런데 리코더가 자꾸 틀려요.”

멜로디언을 들고 있는 파란 모자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이끄는 조장인 듯했다.

리코더를 손에 쥔 아이는 친구의 공개적인 지적에 창피했는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진아는 제법 귀여움이 묻어나는 악단 구성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누나가 잠시 도와줄까?”

“네? 누나가요?”

“응. 반짝반짝 작은 별. 나도 좋아하는 곡이거든.”

아이들은 진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평소에 하던 대로 불면 되니까. 대신 리코더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누나가 연주하는 대로만 따라와 줄래?”

그러자 리코더를 들고 있던 아이는 진아의 요청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함께 천천히 연주해볼까?”

멜로디언을 연주하는 아이는 천천히 튜브를 입에 물고 조원들과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아이들의 모습에 진아는 차분히 오보에를 결합하고 수통에 담겨 있던 리드를 꽂아 넣었다.

“그럼 시작한다?”

리드를 입에 물기 전 진아가 아이들의 의사를 한번 확인한 진아는 가볍게 호흡을 떼어 리드 안으로 불어 넣었다.

반짝 반짝 작은 별~

공원 놀이터에서 시작된 아이들의 작은 공연은 진아의 오보에 음색에 맞춰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아가 앞장서서 전체적인 템포를 조절했지만, 잠시 후 그녀의 오보에는 아이들이 내는 화음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다.

특히 리코더를 부는 아이가 조금 더 자신감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오보에의 고운 음색으로 아이들의 연주에 매듭을 짓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연주에 깜짝 놀라 멍하니 악기를 바라보았다.

“우와아~ 처음으로 한 번도 안 틀렸어.”

특히나 리코더를 연주하는 아이는 스스로의 연주에 가장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알았지?”

“누나 한 번만 더 맞춰 봐요. 네?”

처음에는 그녀를 경계했던 아이들도 화음을 맞추는 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한 번 더 연주하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알았어. 해줄게. 잠깐만~”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같이 참가해도 될까요?”

“아······?”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오바 쥰이치가 서 있었다.

“하지만 악기가 없으니, 그냥 관람만 할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