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25화 (125/177)

[125] Ep.18 : 비상(飛上) (11)

‘저 녀석. 관객들과 우리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군.’

한껏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차민준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배려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앞에서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피아노 건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야마모토 위원장에게 그런 점은 전혀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의 피아노를 직접 자신의 두 귀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설마 콩쿨 본무대에서 연주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피아니스트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야마모토는 방금 전 떠올린 자신의 생각을 취소하였다.

‘아니. 오히려 완성시키고 있는 것인가?’

모차르트 8번 소나타의 복잡한 16분 음표마저 그 사이를 빠르게 오르내리는 패시지의 향연에서 하마터면 야마모토조차 깜빡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다.

한편 무대 뒤에서 차민준의 피아노를 듣고 있던 아오바와 니시노야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DVD에 녹음된 연주와 실제 연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어느 정도 갭이 있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민준이의 실력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분명 자신과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다른 느낌.

건반을 통해 울리는 선율 하나하나에 이렇게나 복잡하고 많은 감정을 실어 낼 수 있다니.

놀랍다 못해 허탈해서 도리어 웃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아오바의 곁에서 함께 무대를 지켜보던 니시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아까부터 피아노 페달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어······.”

“뭐!?”

그 말인즉슨 모든 건반이 내고 있는 음의 길이를 단지 손가락의 힘만으로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테크닉.

차라리 누군가가 이건 꿈이라고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로 아오바의 마음 한구석에 패배감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8번 소나타의 1악장이 서서히 끝을 맺어가고 있었다.

경쾌한 행진곡풍의 선율 속에서 모차르트의 비통한 심정을 그대로 전해준 차민준의 피아노는 8분간의 긴 연주와 함께 1악장을 마쳤다.

야마모토 위원장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무대 위의 젊은 피아니스트를 향해 격한 박수를 보내고 싶었으나, 아직 그의 연주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제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에스프레시오네(느리게 노래하듯, 진심을 담아), F장조, 3/4박자.

앞선 1악장이 행진곡풍의 비장하고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면, 2악장은 굉장히 세련된 선율로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실제로 8번 소나타의 두 번째 악장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차르트의 슬픔이 가득 묻어난 곡이었다.

초반의 아름다운 선율은 아주 잠시뿐.

중반 무렵엔 다시금 단조로 돌아가며 8번 소나타가 가진 특유의 긴장감을 더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심장을 죄어오는 가혹한 선율에 심사 위원들을 비롯한 청중들 몇몇은 눈가에 촉촉이 눈물이 고여 들었다.

어째서 그가 연주하는 소리가 이렇게 가슴에 와 닿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른 채······.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3악장에서 묵묵히 차민준의 연주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번개처럼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건반 놀림에 두 눈을 부릅떴다.

프레스토(매우 빠르게), a단조, 2/4박자.

메트로놈 수치로 분당 184박자 전후를 뜻하는 빠른 템포를 오르내리는 화려한 테크닉이 요구되는 악장이기도 했다.

아오바 쥰이치가 초절기교를 선보인 것도 바로 이 3악장에서였다.

하지만 차민준의 피아노는 프레스토의 템포를 넘어 프레스티시모(가능한 매우 빠르게)까지 오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프레스티시모의 메트로놈 수치는 분당 208박이었지만, 민준이는 그것마저도 뛰어넘는 엄청난 빠르기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초절정 기교술에 야마모토 위원장마저도 정신이 아득해져 감을 느꼈다.

8번 소나타의 마지막인 3악장은 1, 2악장에 비해 연주 시간이 굉장히 짧은 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민준이의 초절기교까지 더해지자, 마지막 악장은 정말로 눈 깜빡할 새에 끝나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차민준의 연주가 끝났음에도 객석은 조용했다.

숨 막힐 듯한 고요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의 연주가 끝났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최초의 박수가 나오기까지 약 5초의 시간이 걸렸다.

짝··· 짝··· 짝······.

객석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심사 위원들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객석의 박수 소리는 점차 넓게 퍼져가며, 이윽고 거대한 파도가 되어 무대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브라보~!!”

“역시 발터 뮐러의 제자로군.”

“이번 콩쿨은 수준이 굉장히 높은데? 니시노야 요코의 피아노도 좋았는데, 아오바 쥰이치에 거기다 발터 뮐러의 제자까지······. 남은 2, 3차전 연주도 상당히 기대되는걸?”

“그러게, 정말 듣고 있는 내가 가슴이 조마조마할 정도로 엄청난 연주였어······.”

보통 피아노 콩쿨에서 이 정도까지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것은 아오바의 피아노가 유일했었지만, 오늘만큼은 차민준를 향한 청중들의 환호가 더욱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니시노야는 무대 위의 민준이를 바라보고 있는 아오바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내가 두 사람의 피아노를 평가해 주길 원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완벽한 나의 패배다.’

자신의 대기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아오바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차민준. 역시 엄청난 실력이야······.’

처음 비디오 대여점에서 우연히 봄의 왈츠를 보았을 때, 피아니스트를 주제로 한 드라마라는 점원의 말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날 차민준의 피아노를 처음 들었다.

주인공의 라이벌이었던 강선우의 피아노를 들음과 동시에 TV를 바라보고 있던 아오바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피아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후로 아오바는 차민준에 관련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이렇게나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스승인 발터 뮐러와 협연을 갖게 된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아오바는 현장에서 그의 피아노를 듣기 위해 티켓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미 모든 티켓이 매진된 후였다.

결국 공연 관계자를 통해 발터 뮐러와 차민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손에 넣은 아오바는 몇 번이고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볼 정도로 차민준의 피아노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리고 오늘.

직접 자신의 눈과 귀로 접한 그의 피아노는 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의 8번 소나타는 관객들 머릿속에서 자신이 연주한 곡을 통째로 걷어내 버렸다.

오래전 어느 콩쿨 무대에서 니시노야가 자신에게 어떤 곡을 연주할 것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그런 걸 묻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었나?’

자신의 피아노가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 그러나 한편으론 차민준의 피아노에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그 어떤 콩쿨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묘한 긴장감.

남은 두 무대에서 차민준은 또 어떤 연기를 펼쳐보일지.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차올랐다.

***

니시노야 요코, 아오바 쥰이치, 그리고 차민준까지······.

점차 수준을 높여가던 본선 1차전 무대는 아쉽게도 차민준 이후로 이렇다 할 실력자가 나오지 않았다.

“10명의 본선 진출자 가운데 마지막 3차전에서 맞붙을 세 사람은 이미 정해진 느낌이군요.”

본선 1차전의 모든 무대가 끝나고, 회의실에 모인 심사 위원들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세 사람의 프로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야마모토 위원장이 따스한 녹차로 목을 축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지난 콩쿨에서는 아오바 군의 독무대로 끝이 났었는데, 올해는 흥미진진하겠군.”

그러자 한 젊은 심사위원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조심스레 자기 의견을 내었다.

“하지만, 일본의 콩쿨에서 한국인인 차민준이 우승을 하는 것도 체면이 서질 않으니 걱정입니다.”

“음··· 하기야 언론에서도 기대가 큰 인물이니.”

“아오바 군. 이번 콩쿨을 마지막으로 유럽으로 떠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더욱더 유종의 미를 생각해서······.”

그때 심사 위원들의 대화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야마모토가 ‘유종의 미’라는 표현에 눈썹을 추켜올렸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네? 아, 저는 아오바 군이 걱정되는 마음에······.”

야마모토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심사 위원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콩쿨 위원장으로서 도저히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스즈키 군.”

“네. 위원장님······.”

“자네는 본선 2차 심사부터 이곳에 나올 필요 없네. 명찰은 책상 위에 두고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게.”

“위, 위원장님. 제가 잠시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즈키 심사 위원은 야마모토의 심기를 건드린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했지만, 야마모토는 단호히 그를 내쳐버렸다.

결국 자신의 명찰을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스즈키가 회의실을 나서자, 야마모토는 남아 있는 심사위원들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콩쿨의 심사 위원으로서 객관성을 잃는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걸 다들 마음속에 담아 두시게.”

스즈키의 퇴장으로 한층 썰렁해진 회의실 분위기에 야마모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섰다.

착잡한 기분에 실외 휴게실에서 연초를 꺼내 문 그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누군가에게 통화를 시도하였다.

잠시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아.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야.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허허~ 목소리를 들으니, 아직 팔팔하시군. 듣자 하니 황천길 한 번 건넜다 돌아왔다고 하던데.”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아? 아무튼 그건 됐고, 콩쿨은 어떻게 됐어?”

야마모토가 통화하는 상대방은 다름 아닌 발터 뮐러였다.

그는 자신을 재촉하는 발터 뮐러의 목소리에 연초 한 모금을 길게 뿜으며 뜸을 들였다.

“왜? 제자의 심사 결과가 그리도 궁금한가?”

“이 영감탱이가 누구 화병으로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그래?”

“허허~ 그것 참 또 살아 돌아올까 무섭군.”

“늙은이 실실거리는 걸 보니, 무사히 통과했나보군. 그래, 어땠나? 자네가 듣기에 민준이의 피아노는?”

발터 뮐러의 질문에 야마모토는 잠시 차민준의 연주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가차없더군. 정말로 오랜만에 지휘자의 피가 끓어오른다고 할까?”

야마모토의 평가에 발터 뮐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게 왜 그리도 일찍 은퇴한 건가.”

“자네가 없으니 영 심심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 몰랐지.”

비록 발터 뮐러만큼 세계적인 지휘자 자리에 오르진 못했지만, 야마모토 역시 발터 뮐러와 동시대를 살아간 지휘자 중에 한 명이었다.

발터 뮐러는 그의 농담 섞인 대답에 기분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난 민준이의 피아노가 다른 참가자들과 똑같이 공정한 평가를 받길 원한다네. 그러니 자네가 나를 대신해 좀 도와주었으면 해.”

“미안하지만, 나는 참관을 비롯해 약간의 조언을 더할 뿐이지. 직접적인 심사를 하진 않아.”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야. 자네가 똑바로 눈을 뜨고 있다면 9년 전 콩쿨에서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기회를 놓치진 않을 테니까.”

“알겠네. 내가 그런 쪽에선 신중하게 검토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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